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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72화 (171/250)

172화

“협조요. 합리적으로 어떻게 협조해 드릴까요. 말씀해 보시죠.”

“나는 무섭습니다, 이도하 군.”

그가 말했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 수 있었는지, 이게 수석님 말씀대로 맹약의 결과인지, 이외에도 이 세상에 어떤 유효한 영향을 미칠지, 그도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어떤 일이 이미 세계에 영향을 끼쳐 지금까지 가능하지 못했던 일이 가능하게 된 건지, 앞으로 더 이런 식으로 저쪽에서 넘어오는 게 가능한 일인지. 나 같은 일반인은 그런 게 걱정이 된다는 말입니다. 나 몰라라 할 게 아니라, 그런 걸 함께 규명해야 할 의무가 이도하 군에게 있다고 봅니다만. 전쟁 중인 다른 나라의 전제 군주가 강력한 특기자를 대동하고 이 세계로 넘어온 것에 정부 쪽에서도 우려가 큽니다. 해명해 주지 않을 겁니까?”

그의 말 중 하나도 이도하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는 게 없었지만, 단어 하나가 그 모든 걸 잠시 잊게 했다. 전쟁 중이라고? 최윤석이 멈추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미 인소더블 특별법까지 신설됐는데, 이 이상 특기자들에게도, 계약자들에게도 불리한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좋을 거라 봅니다만.”

이도하가 미간을 좁혔다. 인소더블 특별법이 신설됐다는 얘기를 들은 지는 꽤 되었지만 이도하는 단 한 번도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강제할 방법이 없이 입만 나불대는 탁상공론식 졸속 법이라고 어지간히 욕을 먹은 건 알고 있다. 그게 특기자들이나 계약자들과 무슨 상관이라고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인식’ 말입니다, 이도하 군. 무서운 겁니다.”

그가 말했다. 화를 꾹 눌러 참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도하는 기시감을 느꼈다. 이런 비슷한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래서 뭘 어떻게 협조해 주길 바라냐고요. 자꾸 정부가 어쩌고저쩌고, 정치할 거예요? 말이 길어.”

“아이라로 같이 가죠.”

마침내 최윤석이 말했다. 신성호도 이도하를 보았다. 이도하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이라로 가는 게 불편하면 이도하 군이 원하는 장소를 마련해도 됩니다. 어차피 어디로 가든 달라지는 것도 없잖습니까. 이도하 군이 거부하면 누가 막을 수 있겠어요. 그저, 같이 알아가자는 말입니다. 우리가 위협이 되지는 않을 텐데요.”

“의전은 제대로 해주는 걸로 하죠. 상황이 급박해서 그랬지, 우리도 무례하게 굴 생각은 정말 없어요. 잘 생각해 봐요, 이게 더 바람직한 길이에요, 도하 군. 우리 모두 소란을 원하는 게 아니잖아요. 레무스 비숍 팀장이 협조를 해준다고 해도 대중이나 속이지, 어차피 아이라와 정부의 눈만큼은 가릴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지 않아요? 이건 절대 그냥 덮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세상을 혼자 살 수는 없잖아요. 이도하 군이 원하지 않는 것도 분명 있겠지만, 타협할 만한 건 타협해야지요. 다들 그렇게 사는 거예요.”

달래듯, 신성호가 말했다. 이도하가 일어섰다.

“그럼요, 이해해요.”

최윤석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이도하가 말했다. 그도 키가 커 얼추 눈높이가 비슷했다. 최윤석의 뒤에 있던 남자들이 긴장으로 몸을 굳히는 게 느껴진다. 최윤석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이도하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거. 알아야만 한다는 거. 이해한다고요.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더 똑똑한 사람들 찾아가든 할게요. 좀 더 믿을 수 있는 사람들. 알아내서 잘 전달해 줄 테니까, 그때까지 좀 기다리죠. 합리적으로.”

최윤석의 눈빛이 굳었다. 신성호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린다. 이도하가 그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말끝마다 황제, 황제, 노출을 시키니 마니… 의전을 해‘주니’ 마니, 말을 그따위로 하면서 예우는 무슨. 그쪽 말마따나 ‘인식’이라는 거 말이에요. 특기자니 계약자니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는데, 특기자세요? 일반인이라며.”

이도하가 시선을 비껴 신성호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졌다. 제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입술을 깨문다.

“아니면 진짜 격에 맞춰서 대통령이라도 데리고 오던가.”

“이도하 군, 소란이 이는 건 꺼리는 줄 알았는데요.”

최윤석이 말했다.

“특기가 남발되는 상황 같은 거 말입니다.”

그가 흘긋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도하의 손에 묶인 푸른색 리본에 보란 듯이 시선을 준 그가 다시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정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떡합니까?”

어젯밤 남산에서 일었던 소동, 그럼에도 특기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이도하, 택시와 버스를 이용했던 행적, 손목에 묶인 끈. 그것만으로 최윤석은 ‘특기가 사용되는 상황’을 기피하는 이도하를 얼추 상황을 짐작해 낸 것 같았다. 꽤 젊어 보이는데도 급박하다는 이런 상황에 직접 이도하를 만나러 올 정도의 요직에 있으니, 과연 머리가 남다른 모양이었다. 그리고 머리가 좋은 만큼, 남의 신경을 건드리는데도 일가견이 있는 것 같다.

“…일.”

이도하가 최윤석의 멱살을 잡았다. 옆에서 신성호가 주춤거린다.

“무슨 일.”

끌려온 최윤석의 턱이 움푹 들어갔다. 이를 악문 것 같았다.

“당신들이 이러니까. 이런 식이니까. 멋대로 도약으로 남의 집에 밀고 들어오고, 협조를 구한답시고 정부니 세상이니 운운해대면서 협박이나 해대고, 안 하면 무슨 내가 죄인인 양, 지금도! 하나부터 열까지 깔짝깔짝 사람 신경을 거슬리게 하면서 무슨 협조, 이게 협조를 구하는 태도야?”

“애초에 처음부터 그렇게 나온 게 누군데요!”

마침내 그가 와락 소리를 질렀다. 제 멱살을 쥔 이도하의 손을 그러쥐며 최윤석이 쏟아냈다.

“당신은 시종일관 그러지 않았습니까? 뭐든 그냥 원하는 대로, 내키는 대로! 세상이 어떻게 나오든, 사람들이 무슨 걱정을 하든, 뭘 무서워하든, 신경 쓴 적이나 있습니까?! 김 연구원과 통화했었죠. 미리 얘기한 걸로 압니다. 조심하라고, 더 이상 노출되면 안 된다고, 그걸 귓등으로나 들었습니까? 여봐란 듯이 온 세상이 다 보도록 쏘다니고! 막으려고 했던 사람들은 밟아놓고! 당신 좋을 대로 다 해놓고 의무는 싫습니까?! 언론은 우스개로 알고, 연락 같은 건 개무시하고, 이미 삐딱한 사람을 상대로 그럼 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말, 어떤 설득을 하던 들을 생각이 있긴 했습니까? 그냥 바닥이나 길까요? 당신이 바라는 게 그런 겁니까?!”

“의무, 의무, 씨발 그놈의 의무 진짜 지겨워 죽겠네. 도대체 내가 바란 게 뭔데? 내가 뭘 요구했는데. 다 필요 없으니까 그냥 좀 가만히 내버려 두고 꺼지라는 게 그렇게 알아먹기 힘들어?”

“그럼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던가!!!”

최윤석도 기어이 이도하의 멱살을 붙잡았다.

“그럼 정말 저 미국의 해밀턴 블랙처럼 없는 것처럼 살던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계약도 하지 말고, 특기도 쓰지 말고! 그랬어야지! 철없는 소리 좀 하지 마요! 나도 당신을 그냥 내버려 두고 싶어요, 제발 모른 척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네 맘대로 살아라 하고 신경 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현실을 좀 보란 말입니다! 당신은 인소더블이라고요!! 당신이 바랐든 바라지 않았든!!”

이도하는 무언가 뚝, 끊어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이도하의 뒤에서 껴안듯 불쑥 손이 하나 뻗어 나왔다. 다음 순간에 쾅!! 쨍그랑!! 엄청난 소리가 났다. 티비가 넘어가고 벽이 움푹 파였다. 눈 깜짝할 새였다. 이도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미처 보지도 못했다. 제 손에 쥐어져 있던 옷깃이 쑥 빨려 나갔고, 한 번 눈을 깜빡였을 때에 최윤석은 이미 티비를 부수고 넘어가 그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의 뒤에 있던 또 다른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풍선 인형처럼 최윤석과 한데 엉켜 있다. 둘 다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등 뒤로 단단한 가슴이 그를 품에 넣었다. 채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이도하와 마찬가지로, 신성호와 최윤석과 함께 도약해 온 이들도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닫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그들은 모두 특기자 같았고, 곧 특기가 난무하는 상황이 닥칠 것 같다. 이도하는 다급해졌다.

“시오한, 잠깐-!”

“걱정하지 마, 화이람.”

시오한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 순간 이미 서련이 남자들 중 둘을 때려눕히고 있었다. 정말 ‘때려’ 눕혔다. 그는 시오한이 움직인 것과 거의 동시에 움직인 것 같았다. 서련은 특기를 쓰지 않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쏜살같이 쏘아져 나갔다. 그의 무릎에 가슴을 강타당한 남자가 대포에 맞은 것처럼 와장창! 베란다 유리창을 부수고 튕겨 나갔다. 그 시점에 허공을 빙글 돌아 크게 회전한 발끝이 또 다른 남자의 턱을 가격했다. 남자가 그대로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시오한이 그의 눈을 가렸다. 이도하는 분명 뼈가 아작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모든 게 조용해졌다. 누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시오한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이런, 집이 부서졌네.”

그가 나긋하게 사과했다.

“미안, 화이람.”

“…어…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이도하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뒤에서 그를 끌어안은 시오한의 손이 구겨진 이도하의 앞섶을 토닥토닥 펴주었다.

“참 기이하다 했더니….”

그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이도하는 제 눈을 가린 그의 손을 톡톡 두드렸으나, 시오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 뭐가?”

“그대가 이리 마음이 약한 것에 감사할 줄을 모르니, 참 기이하지.”

“……”

조용해진 거실에는 신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며칠 전 차가운 동토의 어느 저택에서 사람의 살갗도 찢고, 칼도 박았던 이도하는 몹시 양심이 찔렸다.

“…시오한, 나도 당신을 진짜 사랑하는데, 그건 정말 굉장한 콩깍지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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