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미친 거지? 남의 집에 이따위로 쳐들어와?”
남자가 양손을 들어 보였다.
“실례합니다. 상황이 불가피해서. 밖에 기자들이 완전히 점령을 한 건 아시는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드나드는 걸 찍히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데다가….”
남자가 이도하의 주머니를 흘긋 눈짓했다.
“도저히 연락이 안 되더군요.”
“아, 연락이 안 되면 그냥 막 쳐들어가도 된다?”
“그만큼 상황이 위급하다는 거죠. 아이라 한국 지부 사무차장 최윤석입니다. 이쪽은 아시겠지만….”
“오랜만에 봅니다, 이도하군.”
이도하는 그제야 그를 알아보았다. 그는 40대쯤 된 남자였다. 덩치가 제법 있지만 이도하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귀엽고 동글동글한 인상이라 곰돌이 푸처럼 보여 귀엽다는 말도 더러 있지만 이도하는 그게 완전히 정신 나간 소리라고 코웃음을 친 적이 있었다. 굳이 동물에 비유하자면 남자는 곰돌이보다 개미핥기에 더 가까운 인간이다. 수석 연구원 신성호. 이도하가 인소더블로 밝혀진 이후 그를 담당한 연구팀의 팀장이었다.
신성호가 손을 내밀었다. 이도하가 쳐다도 보지 않자, 그는 멋쩍은 기색도 없이 손을 내렸다. 그의 눈이 바쁘게 이도하의 뒤를 훑었다.
“그러게요, 오랜만이네요. 아침 먹었어요? 보다시피 우린 밥 먹고 있었는데.”
이도하가 이죽거렸다.
“안 먹었으면 남은 거라도 먹던가. 포장해 줄게요.”
먹던 거라도 줄 테니 갖고 꺼지라는 소리다. 그들 중 누군가가 허, 하고 헛바람을 냈다가 이도하와 눈이 마주쳤다. 이도하의 뒤에 시선을 주려던 그는 몸을 움찔하며 조금 시선을 내렸다. 고집스럽고 분한 얼굴이었다. 이것 봐라. 이도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최윤석이 말했다.
“레무스 비숍?”
신성호도 놀란 얼굴을 했다. 여기서 그를 볼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 레무스 비숍이 국제 도약을 해서 한국에 입국했다면 그들의 귀에 들어갔을 게 분명했다. 그런 적이 없는데, 직항으로도 12시간 거리에 있어야 할 타국의 수사관이 이도하의 식탁에서 국밥을 앞에 두고 있으니 이건 뭔가 불법적인 수단을 썼다는 의미였다.
<도움을 좀 줄까 해서.>
이도하의 옆으로 다가온 레무스 비숍이 말했다. 드리시니언과 궁까지 훑은 최윤석이 서련을 발견하고는 이채를 띠었다. 지긋이 쳐다보다, 다시 느리게 시선을 옮기며 그가 물었다. 능숙한 영어였다.
<도움이요?>
<한국에는 수사 때문에 비밀스럽게 입국한 걸로 하죠. 내 신분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좋은 핑계로 썼던데.>
레무스 비숍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도하는 목격된 시오한의 사진들을 두고 저건 이리스티리움의 황제가 아니라 그 FBI 특별 범죄 분석팀의 레무스 비숍이라더라, 하는 뜬소문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눈치챘다. 물론 레무스 비숍은 키도 컸고, 보기 드문 금발도 시오한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도하도 처음 그를 보았을 때 시오한을 떠올린 적이 있었다. 머리가 짧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흐릿한 사진을 두고 굳이 우기자면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정작 그 레무스 비숍은 미국에 있을 테니 정말 누구도 믿지 않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게 이렇게 이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건 최윤석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냥 그렇게 해 주겠다는 말입니까?>
<미국에서도 알고 싶은 게 많고…. 혼란은 누구도 원하지 않을 테니까. 눈 가리고 아웅이라지만 되도록 많은 이들이 모르는 게 나을 거라는 덴 동의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레무스 비숍은 흘긋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조금 미안해하는 기색이었는데, 이도하는 그들이 하는 대화를 아주 어렴풋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제가 제대로 이해한 건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혹시 몰라 켜놓은 통역 앱은 엉뚱한 소리나 남발하고 있었다. 통역 앱에 희망을 버린 이도하가 다시 쓸모없어진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미국에서도 알고 싶은 게 많다니, 그런 말은 없었는데. 이도하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궁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저 핑계가 거짓말이라면 기가 막힌데. 앞뒤가 착착 들어맞지 않는가 말이다.
<도움은 고맙지만, 정보 공유는 약속드릴 수 없겠는데요. 그건 저희 입장에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건 당신에게 물어본 게 아닙니다.>
앞으로 나서는 신성호를 내려다보며, 레무스 비숍이 대답했다. 그를 올려다보던 신성호가 허를 찔린 것처럼 지그시 웃었다. 다 이해한다는 듯, 인자해 보이는 미소였다. 저 새끼 마누엘 뮬러랑 좀 닮았네. 뒤에서 드리시니언이 궁에게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도하군, 그렇다는데… 계속 이렇게 집에만 있을 생각은 아니지요?”
그 웃는 낯으로, 신성호가 물었다. 그는 이도하가 당연히 앞의 대화를 모두 이해했겠거니 가정하고 있었다. 아니라면 내가 모두 설명해 주겠다, 하는 은근한 눈초리다. ‘마누엘 뮬러랑 비슷한 새끼네.’ 이도하는 드리시니언의 말에 동의했다. 마누엘 뮬러도 본 순간부터 기분이 나쁘더라니, 이래서 그랬던 모양이다.
“뭘 원하는지는 알겠는데, 나도 아는 게 없는데요.”
이도하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좀 앉을까. 이도하는 뒤집어진 식탁 의자를 끌고 오며 잠깐 시오한과 눈을 마주했다. 곧게 선 서련의 뒤에 앉아 있던 그가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그가 입을 벙긋거렸다. 이도하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대로 있어. 조그맣게 손짓한 이도하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앉을래요?, 아. <앉아요.>”
<괜찮습니다.>
레무스 비숍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작게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최윤석이었다. 신성호가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
“도하군, 이건 정말 도하군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예요. 물론 도하군이 이걸 비밀로 하려고 그런다는 건 아니지만, 정말 모른다면 함께 알아가야지요.”
“아 그러니까 뭘요?”
난 진짜 조금도 모르겠다, 다 설명해 봐라, 하는 식이었다. 한국어라고는 안녕도 할 줄 모르는 드리시니언의 귀에도 이도하의 말투는 몹시 껄렁하게 들린 것 같았다. 그가 풉, 하고 뒤에서 웃음을 삼켰고, 신성호는 좀 더 인자하게 웃었다. 부처예요, 부처. 고개를 꺾어 드리시니언을 바라보며 이도하가 다 들리게 소곤거렸다. 드리시니언이 척 엄지를 들었다. 시오한의 손목에 묶인 푸른 리본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러나 이어진 질문에, 이도하는 순간 굳고 말았다.
“맹약 덕분인가요? 황제가 이곳에 올 수 있었던 게.”
“…….”
이도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신성호는 수석 연구원이자, 이도하를 담당하고 있는 연구팀의 팀장이며, 그건 김윤혜의 상관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도하와 가장 가까이서 연구를 진행한 건 김윤혜지만, 그렇게 얻은 자료를 김윤혜가 혼자만 연구하는 건 아닌 것이다. 처음 시오한을 만나 계약한 이후 김윤혜와 만나 나누었던 대화, 습관적으로 제가 토로했던 감정들… 모두 알고 있었음에도, 이도하는 이 순간 지독한 불쾌감을 느꼈다.
“아니면 이도하군의 특기인가요. 이도하군도 알잖아요, 도하군의 특기는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 걸. 계약자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지만 두 세계가 서로를 인식한 지는 꽤 되었지요. 우리는 그동안 많은 걸 연구하면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었어요. 그렇게 결론 내린 이유가 복잡한 만큼 지금 굳이 그걸 다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파악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말이에요, 도하군. 위급하다고 표현해서, 이렇게 도하군 집에 무례하게 도약을 할 수밖에 없었을 만큼.”
“더구나 이도하군이 어제 내내 계속해서 황제를 노출시키고 소동을 일으킨 탓에,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정부라든가.”
최윤석이 말했다. 이도하가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어느새 까만 눈동자가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이명은 없었다. 최윤석이 흠칫했으나, 물러서지는 않았다.
“싸가지 없게.”
이도하가 말했다.
“황제 ‘폐하’겠죠. 존댓말 안 배웠나 봅니다.”
“…이 나라에는 황제가 없습니다만.”
최윤석이 말했다. 그의 팔을 붙잡은 신성호는 여전히 미소를 띤 낯이었지만, 조금 불안해 보였다. 그들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이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왔다. 이도하가 빙그레 웃었다.
“그럼 황제가 아니라 그냥 내 계약주가 놀러 온 거니까, 심각할 일도 아니네요. 어제도 우리는 그냥 떡볶이나 먹고 남산 구경이나 하러 간 건데 먼저 시비를 건 건 그쪽이잖아요? 그래 놓고 정부 운운하며 다 내 탓인 것처럼 말하네. 이건 협박인가….”
“그건 오해가-”
“꺼져요.”
“…….”
“난리가 났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니까 알아서 해결하시고.”
둥그런 은색 테두리 안경 뒤, 최윤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서련을 보며, 그가 말했다.
“어제 일은 제가 사과하겠습니다. 그건 정말 오해였지만, 그쪽도 팔을 잘라내지 않았습니까? 이것도 문제 삼자면 꽤 문제가 될 일인데요.”
“그래서 특별히 FBI에서 잡으러 왔잖아요. 안 그래요, 팀장님?”
이도하가 물었다. 미리 입을 맞춘 것도 없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고, 이도하의 한국말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어쨌든 레무스 비숍이 그냥 대답했다.
<그렇죠.>
표정 변화도 없이, 여전히 그저 피곤한 얼굴이었다. 이도하가 슬그머니 웃었다.
“…이건 맞서겠다는 뜻밖에 안 됩니다, 이도하군.”
“최 차장.”
신성호가 지그시 그의 팔을 눌렀으나, 최윤석이 말했다.
“맞서?”
“충분히 합리적으로 협조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인소더블이라 그런 겁니까?”
이도하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