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해서 각기 국적이 다른 넷과 세계가 다른 존재가 단란하게 같은 식탁에 둘러앉게 되었다. 그 가운데 국밥 냄새가 폴폴 올라오니, 시오한이 이곳에 앉아 있는 것보다도 더 위화감이 든다.
<난 리가 정말 영어를 하는 줄 알았어요. 아니, 그보다는 그, 특기가 있는 줄 알았던 거라고요. 뮬러 놈을 만난 적도 있으니까.>
드리시니언이 시오한과 레무스 비숍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투덜거렸다. 국밥이 한국인인 제게야 좋은 한 끼지만 외국인도 아니고 다른 세계, 그것도 날 때부터 곱게 자란 시오한에게도 좋은 끼니가 될지 고민하던 이도하가 그 말을 들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렸다.
“마누엘 뮬러?”
<마누엘 뮬러는 세상에 한 놈밖에 없어, 리. 둘이면 끔찍한 일이지. 그 새끼가 아주 제대로 엿 먹었다는 걸 듣고 내가 얼마나 짜릿했다고!>
드리시니언이 통쾌해했다. 독일 특별 수사국 국장, 마누엘 뮬러. 그 인간이 재수 없다는 데는 이견이 없었지만, 그와 만났던 걸 드리시니언이 어떻게 알고 있는가는 좀 다른 문제였다. 이도하가 독일로 갔던 건 증거만 없지 모두가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마누엘 뮬러를 만난 건 정말 독일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그걸 중장정보국인 CIA도 아니고 FBI인 드리시니언이 알고 있다는 건, 그냥 가만히 앉아서 소문으로 듣지는 않았을 거란 뜻이었다.
시오한의 국밥을 살살 젓고 있던 이도하가 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시오한이 습관처럼 옅게 웃었다. 그는 이곳에도 암군이 있다고 했고, 그게 정말 드리시니언이나 궁이 암군의 ‘계약자’인 위치로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라면… 이도하는 생각이 복잡해졌다. 암군은 그들이 하는 일의 특성 때문에, 계약자들도 비슷한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는데. 총사령관인 군나르 아스터의 계약자, 중국인 리 첸도 공안 비슷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고. 이도하가 레무스 비숍을 보았다. 이 사람도 알고 있는 건가?
“근데 왜 온 겁니까?”
이도하가 물었다. 드리시니언이나 궁은 그렇다 쳐도, 레무스 비숍은 여기에 올 이유가 없는 것 같았다. 단정하게 국밥을 먹던 레무스 비숍이 또 좀 난감한 얼굴을 했다.
“아.”
환장하겠다, 진짜. 이도하가 핸드폰을 꺼냈다. 알람과 부재중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을 무시하고 통역 앱을 켜서 보여주며, 이도하는 제가 여태 참 편하게 살아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특기를 그다지 쓰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의식중에 도리어 쓰지 않는 순간이 없었던 것 같다.
<우리 팀장은 불꽃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거든. 이건 비밀인데, 장막에도 안 걸려요. 죽이지.>
<케일럽, 조용히 해.>
<넵. 참, 내 이름 케일럽이에요.>
드리시니언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기어이 한 마디 더 소곤거렸다.
<진짜 비밀이야.>
이미 국제 도약 없이 왔으면 불법체류인데 뭔 소리야… 이도하는 이대로 정말 괜찮은가 싶은데, 레무스 비숍의 핸드폰이 말했다.
“여기로 데려와야 하는데 물어볼 게 있어서.”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이도하는 번역되기 전의 영어를 읽어보았다. 이들을 데려와야 했고, 물어볼 것도 있어서. 12년 교육과정이 말하기는 안 되도, 읽기 성능은 번역기보다 나은 것 같다.
“뭔데요?”
이도하가 물었다. 흘긋, 존재감도 없이 앉아있는 궁에게 시선을 한 번 준 레무스 비숍이 말없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번역 앱의 성능이 썩 좋지 않은 것 같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엉뚱한 번역을 믿어도 될까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이도하도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불꽃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고, 장막에도 안 걸리면 잠깐 누구라도 좀 데려오면 안 됩니까?”
이름이 뭐였더라. 이도하가 기억을 짜냈다.
“한나 브라운.”
<한나 브라운?>
레무스 비숍은 그 이름 하나밖에 알아듣지 못했으나, 그걸로 충분했다. 그는 꽤 오래전부터 이드로에 가입되어 있었으니 이도하보다도 그녀를 더 잘 알 테였다. 그런데 레무스 비숍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드리시니언이 푸핫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보다 빨리 왔던데, 어떻게 왔어? 돈. 돈? 국제 도약. 아. 그는 옆에서 서련과 수다를 떨던 참이었다.
<리, 우리 팀장님 말라 죽어. 이미 엄청 말랐다고.>
그가 말했다.
<온 미국이 다 바라고, 그런 소문이 돌기도 하지만 정말로 팀장님은 인소더블이 아니야.>
인소더블이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불꽃이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으니 가면 되지 않느냐고 물어본 것뿐. 레무스 비숍이 인소더블이라는 소문이 도는 것도 몰랐다. 이도하는 이해가 안 가 무슨 소리인가 싶은데, 시오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보통은 모두 힘에 한계가 있으니까, 화이람.”
“…아?”
“그대와 같이 자유롭지 않지.”
시오한은 이도하의 말을 듣고 분위기를 눈치챈 것 같았다. 그리고 이도하는 그제야 이해했다. 그는 약간 멍청해진 것과 동시에 뒤통수를 살살 어루만져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과연, 그게 그럴 수 있구나. 이도하는 머쓱해졌다. 그렇구나. 어쨌건 그럼 별수 없다. 저들이 단숨에 한국어를 하길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니 좀 엉뚱한 번역 앱과 제 어설픈 영어 실력에 기대보는 수밖에 없겠다.
<그런데 리는 뮬러가 아니더라도 한나도 만난 적이 있잖아? 우리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왜 특기를 사용하지 않아? 드리시니언이 의아하게 물었다. 국밥을 사와 놓고 먹지도 않고 얌전히 앞에 모셔만 둔 채 그들을 지켜보던 서련도 궁금한 기색이었다. 그는 어젯밤 남산에서 그 ‘실랑이’가 벌어졌을 때 그곳에 나타났으니, 이도하가 특기를 쓰지 않는 걸 똑똑히 본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이도하가 얼버무리듯 말했다. 말하는 게 별로 탐탁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련은 물론이고 드리시니언도, 궁도 별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레무스 비숍만이 묵묵하게 앉아 있었다.
“특기를 썼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잖아요. 다들 물어보는데, 나도 몰라요, 시오한이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건지. 내가 어떻게 데려온 건지. 그러니까 웬만하면… 특이한 상황 같은 건 만들고 싶지 않다는 말입니다.”
오즈에는 일종의 ‘간섭’이고 ‘오류’라고 볼 수 있는 특기자들이 그곳에 드나들고 머물 수 있는 건 계약주의 마력을 통해서였다. 그곳의 존재인 계약주의 힘을 통해 세상을 속이는 일종의 편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이도하에게 마력 같은 건 없었고 특기는 마력으로 치환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굳이 계약자들이 세상을 넘나들며 마력을 매개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이태학 같은 인간이 계약자를 양산하겠다는 헛꿈을 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오즈와 달리 이 세상이 계약자와 계약주 같은 것을 인식하는지조차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이도하로서는 시오한이 세계를 속이는 편법이나 어떠한 매개도 통로도 없이 이 세상에 그저 눌러앉아 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이전에, 제가 멋대로 그곳으로 넘어갔던 것처럼.
<아, 그럼 리본도…?>
둘 사이에 늘어진 푸른 리본을 보며 드리시니언이 말했다. 이곳의 물건을 오즈로 가져가면 몸에서 떨어지는 순간 사라지니, 제 신체와 끈 따위로 묶어놓는 건 꽤 오래전에 유행했던 방법이었다. 한동안 계약자들을 대상으로 ‘핸드폰 분실 방지 고리’라는 것이 불티나게 팔린 적도 있었다. 손목에 묶어놓다 보니 영 불편해 한때의 유행으로 그쳤지만.
“아무튼.”
이도하가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결국 이건 시오한의 옆에서는 특기를 쓰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드리시니언이 곤란한 기색으로 궁과 서련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어… 팀장님은 그렇고. 우리는, 이리스티리움도 공식 입장을 밝혀야 해서 폐하의 의중이나 명령을 전달해야 하니까. 일단 일리온이 아무 일도 없다고 잡아떼기는 했다는데 어젯밤에 워낙에 난리가 났어야 말이지.>
드리시니언이 말했다. 아, 어젯밤. 이도하가 이마를 짚는데, 그가 좀 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도 이렇게 말하기는 좀 그런데, 아마 지금 상황이 뭘 생각하고 있든 그거보다 더 심각할 거거든. 한가롭게 밥이나 먹고 있는 게 좀 불안할 정도로 말이야. 이게 침략의 전조라고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있는 건 알아?>
“침략?”
대충 알아듣는 와중에도 그 단어 하나는 귀에 쿡 박힌다. 이도하는 정말로 이 모든 게 점입가경으로 치달아 가고 있다는 걸 슬슬 깨닫고 있었다. 물론 어제 소동이 좀 있긴 했으나, 그건 맹세코 ‘소요 사태’라고 표현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떡볶이 좀 먹고, 남산 가서 경치 구경도 좀 하고, 어젯밤은 정말 밤 산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저들이 ‘소요 사태’라고 말하는 그 난리를 보고 다들 놀랐을 수도 있긴 하겠으나, 침략을 운운하는 건 정말 오버가 아닌가. 게다가 그 사태에 정작 이도하는 특기를 요만큼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드리시니언이 말했다.
<무려 폐하잖아. 이리스티리움의.>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저 오즈의 어느 일반인이 아닌, 하다 못 해 작위가 있는 어느 귀족 정도도 아니고 강력한 정복 전쟁을 펼쳤던 광활한 제국의 황제. 이 나라 저 나라를 오가며 제 나라에서는 갖가지 논란에 휩싸여 있는 인소더블의 계약주.
“무슨 개소리-”
그때, 거의 존재감도 없이 얌전히 국밥만 탐닉하고 있던 궁이 고개를 들었다. 시오한이 고개를 돌렸고, 순식간에 서련이 시오한의 앞을 막아섰다. 궁의 눈동자에 푸른 섬광이 확 번졌다. 거실의 허공에 까만 선이 세로로 쫙 그어졌다. 거대하고 두꺼운 붓으로 먹칠을 한 것 같은 선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다섯 명쯤 되는 이들은 모두 까만 양복 차림이었다. 도약이었다. 이도하가 벌떡 일어섰다. 드르륵- 거칠게 밀린 의자가 쿠당! 뒤집어졌다.
“이도하 씨?”
남자 중 하나가 주변을 둘러보다 이도하를 발견하고 앞으로 나섰다. 국밥과 함께 단란하게 둘러앉은 다른 이들을 본 그가 까딱 눈썹을 세웠다. 누군지 모르고, 궁금하지도 않다. 이도하가 이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