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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69화 (168/250)

169화

“화이람, 밥 먹어야지.”

마침내 시오한이 점잖게 말했다. 그는 까맣고, 동그란 눈의 노란 용 인형을 안고 자세를 잡아주고 있던 참이었다. 어느새 잃어버린 사진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이도하는 방금 찍은 사진을 배경화면으로 바꾸었다. 이도하가 제 배를 문질렀다. 전혀 생각 없었는데, 시오한이 저렇게 말하니 과연 이제야 배가 고프다. 몇 시인가 보니 벌써 정오에 가까웠다.

“얼른 편의점 갔다 오자.”

세상이 난리가 났건 말건 난 모르겠다. 만족하고 즐거워진 이도하는 그렇게 가뿐하게 마음을 먹으려고 했다. 그가 산뜻하게 방문을 열었다.

<오? 드디어 일어났네!>

꼬부라진 영어가 그의 귀에 꽂혔다. 커다란 덩치에 아주 짧은 머리의 미국인이 소파에서 일어나 반갑게 손을 흔든다. 그 옆에 서서 뉴스를 보고 있던 남자도 이도하를 돌아보았다. 이도하는 순간 제가 뭘 잘못 봤나 싶었다. 그러나 분명하다. 이렇게 보니 한층 덩치가 더 커 보이는 남자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이고, 하나는 원래도 유명한 데다가 이도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준 적 있었다. 암군의 계약자이자, 기억을 읽는 특기를 가진 SCU의 수사관과 그 팀의 팀장인 레무스 비숍이다!

-다행히 해당 사태로 인한 피해자는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으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린다. 그들의 뒤로 비춰지는 화면에는 뉴스가 틀어져 있었다. 오밤중인 데다가 멀리서 찍혀 화질이 더럽지만, 그래도 특기일 게 분명할 뭔가가 번쩍번쩍하는 것은 보인다. 뒤로 불빛이 점등된 남산 타워의 모습이 이도하를 세게 강타했다. 밑에는 푸른 바탕에 흰색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지난밤 남산서 특기자들 소요 발생.’

“……”

이도하는 할 말을 잃고 서서 멀거니 이 기가 막히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나왔더니, 저희 집 거실에, 먼바다 건너 FBI의 수사관이 둘이나 저를 맞이하는 것도 모자라, 그들이 보고 있는 뉴스에는 간밤의 제 행적이 아주 심각하게 보도되고 있다. 어떻게 시야에 이렇게 하나 같이 기가 막힌 것들만 꽉 꽉 채워놓을 수 있지? 이도하는 뭐부터 받아들여야 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주방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또 다른 외국인도 더는 놀랍지 않았다.

<와, 진짜 황제 폐하네. 대박….>

<케일럽.>

이도하가 그들을 보고 기가 막힌 만큼이나 그들도 이도하를, 정확히는 그의 뒤로 나타난 시오한이 기가 막힌 듯했다. 심지어, 캘리포니아 대지진 당시 머리에 바다가 찰랑이는 걸 보고서도 그저 피곤한 얼굴로 놀랍다, 한마디 했을 뿐인 레무스 비숍마저도 놀란 얼굴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놀라움으로 가득 찬 가운데, 레무스 비숍이 먼저 시오한을 향해 짧게 목례했다. 시선을 낮춘 정중한 인사였다.

“‘불꽃’이로구나.”

뒤에서 껴안듯 이도하의 어깨에 팔을 걸친 시오한이 느긋하게 말했다. 이도하가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레무스 비숍은 거의 누구나가 다 아는 유명한 특기자지만, 계약자는 아니었다.

“알아?”

“여러 번 듣기는 하였지. 저자의 휘하에 암군의 계약자들이 여럿 있으니.”

시오한이 시선을 옮겼다. 주방 근처에 반쯤 숨은 듯 서 있던 남자가 자세를 바로 하더니 고개를 숙였다.

“궁.”

“궁?”

“암군, 나사디아 튤리파의 계약자야. 그대는 아직 만난 적이 없지.”

<안녕하세요, 처음 보네요. 로건 화이트요. 근데 폐하가 뭐라고 하시는 건지?>

어쩐지 겁을 먹은 것 같은 궁이 어정쩡하게 손을 흔들며 물었다. 악수를 하자는 건지, 손 인사나 하자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덩치가 꽤 커다란데 그렇게 숨어 있으니 대체 왜 저러나 싶었고, 아침부터 때아닌 영어 듣기에 부딪힌 이도하를 더 정신 사납게 했다.

“뭐라고요?”

“응?”

<예?>

의사소통이 단 한 방향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혼란한 현장이었다. 이도하는 심각한 언어의 장벽을 깨달았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문제가 되지 않아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나, 생각해 보니 이 중 다른 국적이 둘이요, 하나는 국적이 아니라 아주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이다.

“헌데 어째서 드리시니언이 왔을까.”

<예, 폐하?>

“아, 드리시니언.”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텐데.”

시오한이 중얼거리듯 말했고, 이도하가 비로소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드리시니언, 그런 이름이었다. 암군의 계약자이자 FBI 소속 SCU의 수사관, 기억을 읽는 특기를 가지고 있는 그 남자. 그리고 이도하보다도 더 빠르게 반응을 한 이 남자는 대답을 해놓고 무심코 제 또 다른 상관의 눈치를 보았다. 시오한이 한 말은 알아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아니, 이거 진짜 기분 이상한데….>

그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레무스 비숍은 조금 더 피곤해진 얼굴로 핸드폰을 꺼냈다. 주방과 거실에 반반씩 걸쳐 금방이라도 대피할 듯 선 궁, 로건 화이트도 그런 제 팀장을 보더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드리시니언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통역 어플을 찾느라고 잠시 침묵이 찾아온 사이 이도하도 마침내 차분하게 깨달았다.

“시오한, 당신 때문에 온 거구나.”

이도하가 물었고, 그의 어깨에 턱을 걸친 시오한이 나른하게 눈을 접으며 대답했다.

“그런 셈이지. 이건 비밀인데… 암군은 이곳에도 있어, 화이람.”

“뭐?”

설마 이들이? 띵똥- 마침내 어플을 까는지 차례로 맑은 소리가 난다. 이도하가 그들을 가리켰고, 시오한이 소리 없이 조금 웃었다. 단순히 암군의 계약자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들 역시 암군이라는 소린가? 이도하가 그들을 다시 보았다. 이건 그들이 일종의 스파이라는 거나 다름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좀 복잡해졌다.

“말이 통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 못 해서… 곤란하긴 하네.”

전혀 곤란하지 않은 목소리로 시오한이 말했다. 그때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궁이 반색을 하며 즉시 현관으로 향했고, 이도하는 저조차도 놀랄 정도로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다. 그의 어깨에 턱을 얹고 있던 시오한이 그대로 턱을 강타당했다. 그가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입을 감쌌고, 방금 놀란 것보다 딱 두 배는 더 놀란 이도하가 으악, 소리를 지르며 그를 붙잡았다.

“와 씨, 시오한!”

이도하에게 감싸인 시오한이 고개도 들지 못하고 가녀리게 어깨를 떨었다. 아무래도 혀를 깨문 게 분명했다. 이도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른 곳이라면 약도 발라주고 만져주기라도 하지 혀를 뭐 어쩐단 말인가. 시오한이 고개를 들었다. 어지간히 세게 씹었는지 눈물까지 그렁그렁하다. 황금색 눈동자가 유난히 반짝거린다.

“야, 봐 봐. 피 나?”

그의 턱을 받친 이도하가 물었다. 시오한이 얌전히 혀끝을 내밀었다. 으, 이도하가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겼다. 거의 끝을 아주 조금 씹었으나, 한 번이라도 혀를 씹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더 아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부르르, 몸서리치던 이도하의 머릿속에 문득 생각이 스쳤다.

…만져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니까. 그… 반짝거리는 혀끝이 이도하의 시야를 완전히 점령했다. 그리고 시오한은 훌륭한 황제답게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화이람, 아파.”

제 턱을 받친 이도하의 손을 잡으며 시오한이 말했다. 혀가 그 모양이니 의도치 않게 조금 꿍얼거리는 소리가 났다. 거의 완전히 홀려 있던 이도하가 핑계를 빙자한 욕망에 넘어가려는 순간 툭, 묵직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도하는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돌렸다. 궁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온 것 같은 호리호리한 남자가 아주 굉장한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서 있었다. 양옆에 뭔가가 가득 든 꾸러미가 그가 잃어버린 넋처럼 떨어져 있다. 잊고 있던 관객들이 아주 가지각색의 표정들로 그를 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황급히 시선을 돌린다.

“…뭐요.”

문득 현실을 자각한 이도하가 짜증스럽게 물었다. 시선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시오한은 다 글렀다는 걸 깨닫고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꾸러미를 떨어트린 남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가 상냥하고 어색한 웃음을 띠더니, 그들에게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아쳐 테세이르입니다.”

억양은 이상했지만, 발음은 제법 완벽한 한국어였다. 궁과 드리시니언이 배신감 어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음, 하고 난처하게 눈치를 보더니 말을 이었다.

“브라질에서 왔어요. 암군. 폐하 보러 왔어요. 서련입니다.”

열심히 연습한 한국어가 부끄럽다는 듯, 남자가 수줍게 웃었다. 옅은 갈색 머리칼이 말티즈 솜털처럼 곱슬곱슬했다.

-경찰은 지난밤 갑작스레 나타난 이 외국인 특기자에 대해 수배를….

혼자 어지럽게 떠들고 있던 뉴스에서 자료 화면이 마침 멈추었다. 핸드폰으로 찍어 제보한 화면은 화질이 너무 구려 뭘 찍은 건지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반짝이는 남산타워를 배경으로 호리호리한 신형에 밝은 머리칼을 가진 외국인이라는 것 정도만 구분할 수 있었다. 멈춰져 있던 화면이 다시 움직이는 순간 또 화면의 어둠 속에서 뭔가 홱 쏘아졌다. 누군가 황급히 몸을 피하는 장면은 모자이크 처리가 되었다. 저 자리에 있었던 이도하는 모자이크 속에서 남자의 팔이 잘려나갔다는 걸 알고 있었다.

“……”

이도하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덩달아 티비를 잠깐 보았던 아쳐 테세이르- 서련이 또 멋쩍고 수줍게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꾸러미를 가리켰다.

<아침 사 왔어요.>

그렇지 않아도 웬 국밥 냄새가 폴폴 나던 참이었다. 아니 무슨 외국인이 아침으로 국밥을… 이도하는 이제 이 이상으로 어이가 없을 수도 없는 가운데, 시오한이 만족스럽게 그의 등을 토닥였다.

“밥 먹어, 화이람.”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레무스 비숍이 모든 걸 체념한 것 같은 얼굴로 꾸러미를 집어 들고 식탁으로 갔다. 그는 여기서 그 어떤 상식적인 것에 대한 기대도 포기한 것 같았다. 그가 핸드폰을 두드렸다. 핸드폰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먹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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