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시오한이 같이 일어나 그의 팔을 잡았다. 꼭 부축하는 것 같았다. 이도하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얼른 손을 뗀 시오한이 빙그레 웃었다.
“말도 잘하고, 걷기도 잘 걷고….”
참 귀엽고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며, 시오한이 술병을 치웠다.
“뭐래. 나 24살이야.”
내가 아긴가,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게. 별 희한한 소리를 다 한다 싶어 말한 이도하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너도 24살.”
“응. 24살.”
26살이지만, 그대가 24살이라니 그냥 24살 하지 뭐. 아니, 24살이 맞다. 시오한이 곱게 웃었다.
“그대가 다 맞아.”
“…진짜 뭐지. 왜 이렇게 예쁘지. 미쳤네….”
“하하.”
이도하가 속마음을 주절주절 내뱉으며 주머니를 뒤졌다. 핸드폰을 꺼내 시오한에게 들이밀다가, 그게 아주 진즉에 꺼졌다는 걸 깨닫고는 에이씨, 하며 주머니에 돌려놓는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주변을 치운다.
“가자, 사진 찍으러.”
이도하가 모자를 눌러썼다. 시오한은 삐뚤어지고 구겨진 모자를 고쳐주며 그의 손에서 검은색 봉지를 가져갔다.
“어디든 갈 테니, 나와 약속 하나만 해, 화이람.”
“무슨 약속. 아, 사진 찍으려면 어디로 가야 되지. 그냥 번화가 가면 있었나. 학교 앞에 또 가야 되나… 진짜 망할 것 같은데.”
“앞으로 술은 나와 마시자. 다른 이 말고.”
“왜?”
“그대는 썩 술에 강하지 않은 것 같거든. 지켜주고 싶어서.”
“뭘 지켜, 내가 인소더블인데 내가 널 지켜줘야지. 가만, 택시 타야 되나? 돈 모자랄 것 같은데.”
시오한이 잠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어깨가 들썩들썩 떨렸다. 왜 저래. 이도하가 소리 내어 말했다.
“그냥, 다. 다 지켜주고 싶어. 그러게 해 줘.”
이를테면, 그대의 사회적 자아라든가, 수치심이라든가, 이불을 찰지도 모를 미래의 어느 순간이라든가, 귀여움이라든가, 하여간 꽤 많이 나열해야 할 그런 것들? 시오한은 그렇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잡아먹을 생각이나 좀 감추고 그런 말을 하지… 진짜 죽겠네.”
조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도하가 말했다. 뚱한 얼굴이었다. 시오한은 웃음을 너무 참으면 배가 아프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다. 거의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를 꽉 깨문 그가 숨을 골랐다. 이도하가 꽤 눈치가 빠르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 역시 숨길 생각도 없었지만 저렇게 생각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저런 말을 하다니. 저야말로 죽겠다. 몹시 곤란하다. 인내심을 발휘한 시오한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
이도하가 뭔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손가락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손가락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한참이나 쳐다보더니, 곧 제 손가락을 건다. 두 손가락이 빈틈없이 얽혔다.
“약속.”
이도하는 그대로 그의 손을 이끌고 교실을 나가려고 했다. 둘 사이에 늘어져 있던 줄넘기 줄이 중간에 책상에 걸렸으나 거침없었다. 시오한이 얼른 몸을 움직여 줄을 풀었다. 이도하는 벨트도, 줄넘기도 포기하지 못하면서 그래도 시선을 꽤 의식하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런 건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물론 시오한은 처음부터 그런 건 안중에도 없었다. 이도하가 부끄러워하니 장단을 맞춰주었을 뿐. 음, 웃음을 꾹 누른 시오한이 당당해진 이도하의 뒤를 따랐다.
***
이도하는 아주 개운한 머리로 잠에서 깨어났다. 일주일쯤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아주 편했다. 창문으로 쨍하게 햇살이 해맑게 비추고 있었고, 공기가 아주 싸늘했지만 몸은 훈훈했다. 두껍고 보들보들한 겨울 이불이 거의 그의 머리끝까지 덮여 있었다. 여기가 어디더라. 이도하는 멍하니 기억을 되새겼다.
기억이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참 좋았겠으나, 이도하는 취해도 통 필름은 끊기지 않는 편이었다. 간밤의 기억들이 파도처럼 몰려들어 이도하를 덮쳤다. 그는 그대로 딱 침몰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순식간에 자괴감에 휩싸였다.
“…개 망했네.”
진짜 개 망했다. 아주 그냥 망해 버렸다. 왜 그랬을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괴감에 몸서리치며 베개에 얼굴을 묻으려던 이도하가 멈칫했다. 베개가 베개의 감촉이 아니다. 말랑말랑하고 펑퍼짐한 게 아니라, 동그랗고 단단하다. 이거 팔인데. 이도하가 이불 밖으로 얼굴을 쑥 내밀었다.
그린 듯 선이 아름다운 턱과 매끄러운 입술, 그리고 콧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코앞이라 흐리게 보이는 황금색 속눈썹은 햇살 줄기가 번진 것 같다. 이도하에게 조금 기댄 그는 고요하게 눈을 감고 있었다. 그를 더러 기적의 현신이니 뭐니 하는데, 진짜 기적 같은 모습이었다. 이도하는 잠시 자괴감도 잊고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시오한. 이도하가 생각하는 순간, 그가 조용히 눈을 떴다. 몽롱한 기색도 없이 아주 또렷한 황금색 눈동자로 가만히 보던 시오한이 부드럽게 웃었다.
“일어났어?”
“…됐어, 후회는 없다.”
“응?”
“인생 뭐 있어.”
한숨을 내쉬며 이도하가 다시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시오한이 꼼꼼히 이불을 덮어주며 그의 머리에 턱을 얹었다. 시오한의 끌어안으려는데 중간에 뭔가 걸리적거린다. 들여다보니 까맣고 동그란 눈은 노란 용 인형이었다. 이건 또 왜 여기 있어.
대충 머리맡으로 내던진 이도하는 다시 욕심껏 시오한의 허리를 끌어안고 욕심껏 그를 만지작거리며 현실 도피를 시도했다. 그는 코트만 벗었지 여전히 청바지에 니트 차림이었고, 이도하 어제 그대로였다. 밤새 쏘다닌 차림으로 이리 누워 있자니 좀 찝찝하지만 그냥 이대로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실컷 즐겁게 저지르고 나니 뒤가 좀 무섭다. 후회는 없지만 정말로 개 망했다.
“어떡하냐.”
“걱정 돼?”
“좀 말릴 생각은 안 들든?”
이도하가 다시 이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럴 이유가 없었는걸. 그대는 즐거워했고, 해서 나도 무척 즐거웠던 터라.”
시오한이 눈을 휘었다.
“원래 막 살면 즐거운 거지, 뭐.”
“겨우 밤 산책 정도로? 너무 소박한데.”
“…그러게.”
어쩌다 이렇게 됐냐. 한탄하며 끙, 한 번 크게 마음을 먹은 이도하가 이불을 젖혔다. 찬바람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집을 비워둔 지 꽤 되었고, 어제도 잠깐 와 있는 새에도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난방을 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것이다. 보일러라도 좀 켜지 그랬냐, 하려던 이도하는 시오한이 그런 걸 할 줄 알 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한국의 온돌 맛을 보여줘야 하는데.
부스스한 머리를 가다듬으며 이도하가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에게 손이 딸려 간 시오한도 몸을 일으켰다. 밤사이에 어느 이름 모를 아이의 줄넘기는 옅은 푸른색의 고운 리본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를 의자에 앉힌 이도하는 책상 위에 곱게 놓인 핸드폰을 발견했다. 충전 선이 예쁘게 꽂혀 있었다. 제가 이런 걸 했던가? 이도하가 혹시나 싶어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시오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어제 아주 아쉬워했거든.”
“어차피 얼마 못 가긴 하는데….”
아쉽긴 했지. 핸드폰이 살아 있기만 했어도 아마 사진을 찍으러 가겠다고 나서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어제의 그 요란도… 아니다. 이도하는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시오한의 말마따나 좋기는 아주 좋았다. 그게 문제가 되어서 그랬지. 그리고 또 그의 말마따나, 겨우 좀 놀러 다닌 것 같고 문제가 될 것을 이렇게 걱정해야 하니 여간 억울한 일이 아닌 것이다. 사진 좀 찍겠다는 게 뭐라고… 사진.
사진에 생각이 미친 이도하가 점퍼를 찾았다. 그러나 옷장에 곱게 걸려 있던 점퍼 주머니에 사진은 없고 동기 윤윤형의 신용 카드와 영수증 몇 장, 그리고 동전 두어 개만 들어 앉아 있었다. 이도하는 다른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안주머니와 바지 주머니까지 모조리 뒤집어도 그 손바닥만 한 사진은 온데간데없었다.
“시오한, 나 어제 사진 어디 넣었어?”
시오한이 입었던 코트 주머니에, 그가 입고 있는 바지까지 다 뒤져도 없다.
“인형을 뽑는 가게에 갈 때까지 그대가 계속 들고 있었어.”
“없는데….”
이도하가 턱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넣을 곳이라고는 주머니 밖에 없으니 이렇게 찾아도 안 나오면 잃어버렸다고 봐야 할 것 같았다. 간밤에 쏘다닌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어디다가 떨어트렸는지 짐작도 안 갔다. 이도하는 썩 물건에 정을 붙이는 편이 아니었으나, 그 손바닥만 한 작은 사진은 정말로 아쉬웠다. 사진도 없는 주머니만 만지작거리는데, 시오한이 그를 불렀다.
“이리 와, 화이람.”
시오한이 책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이도하를 제 옆에 당긴 그가 핸드폰을 들었다. 어디서 많이 보던 각도였다. 그런데 카메라는 천장을 비춘다. 이도하가 풉 웃음을 터트렸고, 시오한은 어리둥절해졌다. 이도하가 카메라를 전면으로 바꾸었다.
“반만 배웠네, 반만.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이도하는 화면에 비친 제 얼굴과 시오한을 보며 어색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셀카 같은 건 한 번도 찍어본 적이 없어서 영 어색했다.
“어제 그 산 위에서. 다들 이러고 있던 걸.”
시오한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정하게 머리를 붙였다. 이도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몸서리쳤다. 반만 배운 시오한이 타이밍 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이도하는 사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지만 어떻게 찍어도 기적 같이 나오기만 하는 시오한의 옆에서 굴욕을 당할 수는 없었다. 카메라를 뺏어든 이도하는 여러 장의 사진을 찍다가 필터 어플까지 받았다. 시오한의 얼굴에다 토끼 귀며 여우 수염이며 별의별 희한한 필터를 적용하는 데 재미가 들린 이도하는 멈출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