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그건 이도하가 4살 무렵의 일이라 기억이 나지는 않아다. 어렴풋이, 뭔가 큰일이 났었다는 것 정도만 기억났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티비를 보며 몹시 화를 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게 그 일이었구나, 하고 알게 된 건 좀 더 커서였다. 이도하가 다른 봉지과자를 하나 더 뜯어 펼쳐놓았다.
“아이의 죽음은 늘 비극적이지.”
시오한이 나긋하게 말했다.
“범인도 애들이어서 더 그랬을 걸.”
“저런. 따돌림인가?”
“아니, 놀라서 그랬대. 처음에는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다고 하던데.”
한 아이가 놀이터에서 사고로 죽은 사건, 정도가 끝이었다고 했다. 뉴스 밑에 자막으로 한 줄 지나가는, 뭐 그런 일로 여겨졌던 것이다.
“꽃을 만들었다나.”
이도하가 좀 더 큰 종이컵을 뜯었다. 슬슬 소맥으로 주종 변경을 해도 될 것 같다. 이것 봐라, 하는 것처럼 시오한에게 컵을 들어 보인 이도하가 소주와 맥주를 꼴꼴 따라 부었다. 젓가락 뒷부분으로 탁, 내려쳐 섞는 것까지 선보인 이도하가 시오한에게 소맥을 건넸다.
“알려지긴 그렇게 알려져 있는데, 시작이 꽃이고 뭔가 더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다들. 그 애 특기가 ‘스케치북’이라고… 그림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거였대.”
이도하가 하는 것을 잘 지켜보고 있던 시오한이 그의 손에서 병 두 개를 가져갔다. 자작의 개념이 거기까지는 아닌데. 말리려고 했던 이도하는 그가 몹시 집중하는 게 귀여워 그냥 내버려두었다. 뭐든 잘 하는 시오한이 헛다리를 짚는 건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그림이 움직이는 게 무섭기는 하지.”
“이게 아니라, 이렇게.”
이도하가 손을 위로 들었다. 그림이 도화지 위에서 그림으로 깨작깨작 논 게 아니라, 위로 튀어나왔다는 뜻이다.
“자기가 그린 걸, 말 그대로 진짜 살아나게. 이야, 황제가 말아준 소맥이다.”
시오한이 이도하와 아주 똑같이 완성한 소맥을 그에게 건넸다. 이도하가 종이컵을 납죽 받았다.
“6살에? 굉장한 힘인데.”
“그치. 근데 애들이 보기엔 완전 호러였나 봐. 그 애를 놀이터에서 쫓아내려고 했고… 누가 돌을 던지기 시작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누구 돌에 맞은 건지도.”
입술만 축이다시피 하며 맛을 본 시오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6살 아이가, 다른 아이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었다는 거야?”
이도하가 미간을 좁혔다. 모두가 알지만 별로 입에 올리지 않는 일이기도 했고, 대체로 ‘한지유 사건’으로 부르곤 하니 저렇게 노골적인 표현은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피부로 겪기에는 너무 어렸고, 글자로, 귀로 읽고 들었을 뿐인데 제가 돌멩이에 다 맞은 기분이다. 쯧, 혀를 찬 이도하가 술잔을 내밀었다. 가볍게 맞부딪친 잔이 바로 비워졌다.
“그런 일이 어째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럴 수도 있지, 애들인데 그럴 만도 하지, 하고 여긴 거지. 실수라고. 그때는 그랬대.”
그런 걸 봤으니 애들이 얼마나 놀랐겠냐. 아무렴 죽이려고 했겠냐. 아이들은 그저 놀랐을 뿐이며, 두려웠을 것이다. 누가 이 아이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초반에는 그렇게 기사가 났고, 모두가 마음 아파하며 꽤 그럴 듯하게 고개를 끄덕였었다고 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럴 만하지. 모두가 그렇게 납득했다고.
“근데 죽은 애 장례식이 끝나고 애 아버지가 자살을 한 거야.”
제 딸이 죽은 놀이터에서, 남자는 제 자신을 불살라 죽였다. 공개된 유서는 절절했고, 비탄과 통한에 젖어 있었다. 실수, 사고, 그렇게 흐지부지 묻힐 뻔했던 사건에 모두가 다시금 주목했다. 맹맹했던 여론은 단번에 뒤집혔다고 했다. 모두가 피해자인 사건. 그런 꼭지를 달고 올라왔던 사건 초기의 한 기사는 활활 타오르는 사건에 기름을 부어놓은 장작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피해자는 지랄이… 그거 보고 나도 어이없었는데.”
“그대가 4살 때 일이라고?”
“그쯤일걸?”
당시에는 오죽했겠는가 말이다. 이도하는 심란한 기분이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노을이 다 지고 교실은 먼 하늘처럼 검푸른 빛으로 잠겨 가고 있었다.
특기는 그저 재능일 뿐이라고. 운동 신경이 뛰어나든가, 어렸을 적부터 유달리 그림을 잘 그린다든가, 끼가 있다든가, 하는 그런 것처럼 그렇게 타고나는 재능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 모든 것들을 다 특기라고 부르기 때문에 특기고, 그리 부르는 거라고. 그렇게 배웠고, 그러니 그도 당연히 그렇게 여겼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조금 개소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림을 잘 그리고 달리기를 잘 한다고 사기꾼이니, 반칙쟁이니 몰아대지는 않을 테니까.
아닌가. 특기자가 아니어 본 기억이 없어서 모르겠다. 뚱하게 생각한 이도하가 시오한을 보았다.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불현듯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아예 아빠다리를 하고 올라앉은 이도하와는 달리 시오한은 엉덩이만 걸치고 있었는데, 책상이 그에겐 높이가 좀 낮은 탓에 평소와 달리 자세가 삐딱했다. 볼 때마다 새삼스럽고 신기한 코트 차림과 더불어 또 새삼스럽다.
이도하가 잔을 들었다. 그런데 안이 텅 비어 있다. 저가 소맥을 원샷했던가? 소맥을? 언제 그랬지. 이도하가 시오한에게 잔을 내밀었다. 곧바로 따라줄 줄 알았던 시오한이 조금 곤란하게 물었다.
“왜?”
“화이람, 얼음이 녹으면 어떻게 되지?”
“물이 되지, 뭔 소리야. 혹시 봄이 된다, 뭐 그런 거 물어보는 거야?”
“응?”
시오한은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대답은 생각지도 못해본 것 같았다.
“당신도 이과네. 이거 맛있는데.”
이도하가 손바닥만 한 은색 봉지과자를 뜯었다. 이게 옥수수맛이 나는 건데… 중얼거리며 이도하가 과자를 시오한의 입에 넣어 주었다. 오도독-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맛있어?”
“맛있어.”
“그치? 나 초등학교 때 엄청 먹었어.”
시오한이 얌전히 소맥을 말아 이도하에게 바쳤다. 이도하는 잔을 들며 이건? 하고 물었다.
“그대와 먹으니 다 맛있는데, 화이람. 밥은 없는 거야?”
“할배야, 술 마시는데 웬 밥을 찾아.”
푸하하 웃으며 이도하가 시오한의 잔에 소맥을 타 주었다. 쨘, 한 번 더 두 종이컵이 부딪쳤다.
“네가 여기 있으니까 신기하다. 진짜 봐도 봐도 신기하다.”
돌이켜 보면, 이도하는 두루두루, 그때그때 누구와든 잘 어울리는 편이었지만 또 누군가와 특별히 친한 편도 아니었다. 쌈박질도 무지하게 한 데다가, 집 앞이든 어디서든 기다렸다가 만나 같이 학교에 가는 친구도 없었고, 집에 놀러 와서 자고 가는 친구도 없었다. 그냥 세상이 다 제 것이었던 이도하는 뭐든 제 맘대로 했기 때문에 딱히 그게 아쉽지는 않았다. 그런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기보다는 시오한이랑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고 바랐었는데, 그건 딱 하나. 이도하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할 수 있었을지도.”
할 수 있지만, 그러면 정말 큰일 난다고 무심결에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도하가 푸르르 투레질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옅은 미소를 띠운 채 이도하를 보며 종이컵을 만지작거리던 시오한이 물었다.
“화이람, 세상이 두려워?”
잠깐 사이에 금세 밤이 되어 주변이 깜깜해졌다. 교실은 완전히 어둑해졌지만, 바깥이 밝았다. 천천히 내려앉은 밤에 익숙해진 눈이 쉽게 시오한의 모습을 담았다. 까만 코트 위로 황금색 머리칼이 찬란하게 쏟아진 그는 마치 환상 같아서, 후- 불면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이도하가 줄넘기 줄을 만지작거렸다.
“무섭지.”
그가 대답했다. 황금색 머리칼이 사르륵, 금실이 부딪치는 소리를 낼 것처럼 흘러내렸다. 밤이 어른거리는 얼굴은 아주 묘했다. 슬퍼하는 것 같기도, 조금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대는 그런 걸 몰라도 되었을 텐데.”
“그런 거?”
“두려움.”
그가 손을 뻗었다. 유려한 손끝이 이도하의 이마 언저리에 닿았다. 닿을 듯 안 닿을 듯, 솜털만 간질이며 뺨으로 내려온다. 코웃음을 친 이도하가 그냥 그 손을 제 뺨에 찰싹 붙였다. 공기가 무척 싸늘한데도 손이 아주 따뜻했다
“무서운 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라고 다른가.”
시오한이 대답 없이 웃기만 했다.
“이 세상이 네게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아주 무서워 죽겠다고.”
“그대가 지켜줄 거잖아?”
“물론 그렇긴 한데.”
술잔을 비운 이도하가 말했다. 그가 시오한의 손을 잡아 조몰락거렸다. 손가락을 펴보기도 하고, 마디도 눌러보았다. 이게 인형이나 살덩이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라는 걸 실감하려는 사람 같았다. 시오한은 이도하가 뭘 하든 내버려두었지만, 그가 제 손가락을 깨물자 눈을 크게 떴다.
“아야?”
손가락을 오므린 시오한이 손을 뺐다. 손을 가져가다니- 이도하는 굉장한 배신을 당한 사람처럼 그를 보았다. 시오한이 별수 없이 다시 손을 내어주었다.
“진짜 모르겠단 말이야. 네가 무슨 원리로 여기 있을 수 있는 건지. 그걸 알아야 되는데….”
다시 시오한의 손을 주물럭거리며 이도하가 말했다. 빼앗긴 손을 바라보고 있던 시오한이 말했다.
“굳이 실감하고 싶다면 다른 방법도 있는데, 화이람.”
“딴 소리 하지 말고.”
“네에.”
시오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무슨 원리지….”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살도 별로 없는 손인데 그렇게 만지작거리고 있으니 멈출 수가 없었다. 거의 무아지경에 빠진 이도하는 시오한의 손을 주물럭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뭔가 비슷한 상황을 생각해 보려고 해도 제 자신밖에 없었다. 8살, 천지분간도 못 하던 이도하가 세상을 망쳐놓을 뻔했던 일.
그러나 그것도 완전히 같은 건 아닌 것이, 그래도 오즈는 원래부터 다른 세계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세계였다는 것이다. 편법처럼 소환과 마력을 통해 세계를 속이는 방식이기는 했지만, 그만하면 다른 세계의 대한 것이라고는 계약자들이 매개하는 마력과 이야깃거리밖에 없는 이 세계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굳이 쥐어 짜내보면 아마 알키오라의….
“사진?”
“응?”
난데없는 말에 시오한이 또 되물었다.
“사진.”
“화이람?”
“사진 찍으러 가자.”
이도하가 벌떡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