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
시오한이 눈을 깜빡였다. 그야 지갑에 있는 것이었으니 가치 있는 것이기는 했겠지. 그러나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시오한의 엄지가 이도하의 손등을 살살 어루만졌다. 은근슬쩍 눈웃음을 치며 슬그머니 웃는다. 부러 좀 뚱하게 보고 있던 이도하가 참지 못하고 그를 끌어안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와 씨, 진짜 귀엽다 당신!”
“그래?”
시오한이 기꺼이 허리를 숙여 이도하의 품에 안겼다. 아주 작정을 한 듯 가슴과 어깨에 머리를 비비기까지 한다. 매끄러운 금발이 잔뜩 흐트러질 정도였다. 덩치는 대형견인데 행동은 고양이 같다. 어쨌든 최고다. 홀딱 넘어간 이도하가 만족감에 끄응, 하고 신음했다. 아쉬워서 놓기가 힘들 정도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우리 학굔데.”
“그대가 다닌 학교?”
“응. 초등학교.”
“가 보자.”
라면 봉지 하나를 달랑 들고서, 둘은 사람이 얼마 다니지 않는 한적한 뒷골목을 돌아 학교에 도착했다. 노을이 질 무렵인 터라 학교엔 남아서 노는 아이들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이도하와 시오한은 아직까지 남아있는 골목 안쪽의 문방구에 가서 만 원 어치의 불량식품과 하찮은 장난감들을 쓸어 담은 다음, 인근 편의점에서 음료수와 소주와 맥주를 샀다. 점원이 몹시 성실하게 신분증을 요구하는 난감한 상황이 있었으나, 이도하는 등과 핸드폰에 사인을 해 주는 것으로 비밀을 보장받기로 했다. 계약명을 한 번 만져보게 해 달라는 요청을 정중정중히 거절하자, 원인을 알 수 없게 감동받은 점원은 달달한 맛의 아몬드를 서비스로 주었다.
라면을 한 봉지 더 사서 뜨거운 물을 받은 둘은 나란히 학교 담을 넘었다. 동전으로 형광등도 두 개씩 콤보로 박살내는데 뜨거운 물이 든 라면 봉지 두 개쯤은 들고 넘어갈 수 있지 않냐, 하는 이도하의 도발에 시오한은 물론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라면 두 봉지에 서로 손을 묶어놓은 이도하까지 달고는 제아무리 시오한이라도 무리였다. 둘은 처음 겪어보는 약간의 발버둥 끝에 라면 봉지를 무사히 사수한 채 담을 넘었다. 낄낄거리며 삐그덕거리는 복도를 지나, 두 사람은 1학년 8반의 어느 조그만 책상에 나란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창밖으로 노을이 진득해진 무렵이었다.
“익은 거야?”
“완전. 손 조심해.”
조그만 김치 봉지를 뜯은 이도하가 똑 반으로 가른 젓가락을 내밀며 말했다. 시오한은 나무로 된 이 젓가락을 조금 신기하게 쳐다보다 조심스레 생소한 요리를 한 젓가락 떴다. 이도하는 흥미진진하게 꼬불꼬불한 면발이 그의 입속으로 소리도 없이 빨려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주 신중하게 맛을 음미한 시오한이 말했다.
“맛있네.”
“이것도.”
이도하가 얼른 김치를 내밀었다. 붉은빛이 아무래도 심상찮아 보였는지 시오한이 물었다.
“뭐로 만든 거야?”
“한국인의 소울.”
“응?”
“오백 가지 양념에 절인 배추야.”
이도하가 대충 설명했다. 그는 아예 제 젓가락을 집어넣어 라면과 김치를 한 번에 떠주었다. 같이 먹어 봐.
“과연, 요리를 잘 했네, 화이람.”
“아, 그럼. 뽀글이도 요리지. 물 맞추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지난날 한 냄비 가득했던 늪 따윈 전혀 기억 안 난다는 듯 시오한이 말했고, 이도하는 일말의 양심도 없이 뻔뻔하게 대답했다. 뭘 먹으려니 그래도 양손이 필요해서 벨트는 풀어야 했는데, 이도하는 교실 창고를 뒤져 아주 좋은 대체제를 발견했다. 줄넘기는 길어서 손목을 묶어놓고도 자유로운 동작이 가능했다. 시오한이 물었다.
“며칠 만에 먹는 끼니지?”
“한 3, 4일 됐-”
함께 데워온 핫바를 우물거리던 이도하가 멈칫했다. 시오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망할. 이도하가 시선을 피했다. 노을이 붉게 스며들어 교실에 이런저런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무 빛깔이 모두 짙게 물들었다.
“…그냥 까먹은 거야. 보니까 나 안 먹어도 사는 것 같던데.”
이도하가 대충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는 원래도 썩 식욕이 있는 편이 아니었지만 근래에는 정말 손톱만큼도 식욕이 일지 않았다. 게다가 정말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듯 배도 고프지 않았고 아주 멀쩡했으니 깜빡한 것에 불과했다. 그냥 그런 것뿐인데, 이상하게 눈치가 보였다. 그러나 시오한은 별말 없이 데운 냉동만두를 이도하에게로 좀 더 밀어주었다. 흘끔, 한 번 더 그를 본 이도하가 만두를 쿡 찍어 제 입에 넣었고, 시오한이 빙그레 웃었다.
“인기가 많던데.”
나란히 만두를 집으며 시오한이 말했다.
“당신 인기일걸. 나도 이런 일은 24년 만에 처음이거든.”
아까는 진짜 다들 단체로 정신이 나간건가, 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이도하는 이해가 가기도 했다. 이도하도, 아이라도 시오한이 시오한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어쨌든 다들 멋대로 그렇게 여기고 있기는 했다.
존재는 당연하지만, 실체는 없이 계약자의 입으로나 전해 듣기만 하던 다른 세상의 존재가 이곳으로 넘어왔으니 오죽 보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유명한 이리스티리움의 황제, 인소더블의 계약주라면 한 번쯤은 그냥 미친 척 해볼 만도 하지 싶다. 두 번 다시없을 기회라는 생각에 내일 없이 일단 질러버린 건 이도하도 마찬가지였다.
“그대를 두려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던걸.”
“두려워하긴, 아주 잡아먹으려고 들지.”
이도하가 코웃음을 쳤다.
“그대를?”
시오한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것 참 굉장한 믿음이네.”
“그게?”
“그대는 이전에 재해를 막은 적이 있다고 했었지. 바다가 덮치려는 것을 막았다고. 그 모습을 모두가 보았을 텐데.”
보았다 뿐인가, 거의 생중계 됐었다. 요즘은 누구든 핸드폰을 들고 다니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굳이 방송 카메라가 따로 필요 없었다. 지금도 인터넷에 이도하, 치면 연관 검색어로 캘리포니아 대지진, 이도하 쓰나미가 뜬다. 영상도 아주 각도별로 수십 개가 있었다. 분석 영상에 반응 영상까지 있다는 건 이도하만 몰랐다.
“그런데도 그대가 그 힘을 저들에게 쓰지 않으리라 여기는 건, 정말 대단한 믿음이지.”
시오한이 여상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 말은 이도하에게 몹시 이상하게 들렸다. 믿음이라기보단, 당연한 거 아닌가? 이도하가 머리를 굴리는데, 입술에 촉촉하고 따뜻한 것이 닿았다. 무심코 입을 벌리던 이도하가 순간 놀라 몸을 뺐다. 가만 보니 만두다. 시오한이 이도하의 입술에다가 만두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이 양반이? 이도하가 만두를 물어 터트려버렸다.
“나 좀 짜증났다고 사람 패고 그런 양아치 아니야.”
“응?”
“뭐 인성 파탄난 놈도 아니고-”
만 하루도 전에 러시아에 있는 저택에다가 장갑차를 매다 꽂고 온 이도하가 멈칫했다.
“…아무튼 보통 그렇잖아. 빡친다고 대뜸 쳐버리고, 누가 그래. 어쨌든 법과 정의라는 게 있는데. 아 뭐래냐 진짜.”
이도하는 대충 마무리해 보려 했지만, 그래 봐야 거기서 거기였다. 그건 정말 그럴 이유가 있었고, 그 새끼들은 정말 법 위에서 노는 망나니 중의 망나니였으며 사람 팔고 장기도 팔고 약도 파는 아주 나쁜 사람들이었다, 하는 변명이 이 횡설수설 뒤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은 시오한에게 비밀이었다.
“뭐, 그렇다는 거지.”
이도하가 얼버무렸다.
“흐음.”
제 어깨에 턱을 괵 시오한이 만두를 우물거리며 말하는 이도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숙인 어깨와 무릎 위로 노을빛에 물든 황금빛 머리칼이 차르르 흘러내렸다.
“요즘 같은 때 특기자라고 쟤가 사람 팰 것 같아요,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실컷 패고 온 이도하가 말했다. 그건 역시 그 새끼들이 매우 나쁜 새끼들이었으니까 그랬던 거지, 하고 이도하가 다시 한 번 되뇌었다. 그 매우 나쁜 놈들에게야 제가 진짜 지구도 두 쪽 내버릴 것처럼 얘기했지만, 누구든 화낼 때는 허세 정도야 부리지 않는가 말이다. 물론 저는 진짜 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니 허세는 아니고, 아무튼 진짜 그럴 일은 없으니까. 이도하가 복잡한 머리를 굴렸다.
“요즘은?”
“옛날에나 그랬지. 원래 그러다가 사고 한 번 터져야 정신 차리잖아.”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진짜 조상님 말 틀린 게 하나 없다, 하며 이도하가 봉지를 뒤적거려 소주와 맥주를 꺼냈다. 종이컵과 서비스로 받은 달달한 맛의 아몬드, 생선 모양의 과자까지 꺼낸 이도하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초등학교 교실에 앉아 술을 까려니 약간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초등학교에서 술 궤짝으로 까면서 동창회를 하기도 하니까. 게다가 이 자리는 딱 이도하가 8살 적 앉았던 자리다.
소주냐, 맥주냐. 이도하가 병 두 개를 들고 고민했다. 그도 엄청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라 조예가 깊지 못했다. 음식은 맛이 덜 강한 것부터 먹어야 한다던데. 이도하가 작은 종이컵을 시오한에게 건넸다. 잔을 받은 그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술병을 가져가 이도하의 잔에도 술을 따라 주었다.
“자작하면 안 되지.”
이도하는 그 능숙한 모습에 조금 놀랐다. 코트 차림으로 라면 냄새를 폴폴 풍기며 저렇게 말하니 갑자기 한국인의 냄새가 난다. 이리스티리움도 술 문화가 비슷하던가?
“쨘.”
시오한이 술잔을 내밀었다. 이도하는 술잔을 보았다가, 시오한을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버릇처럼 슬그머니 웃는다. 그는 몹시 감회에 잠겼다. 술은 여전히 맛이 이상하지만, 오늘은 맛있게 마실 수 있을 것 같다. 바깥에서 차 소리가 속삭이는 것처럼 작게 이어졌다. 쨘, 두 사람이 술잔을 부딪쳤다.
“크.”
“음.”
시오한이 눈가를 찡그렸다. 텅 빈 종이컵을 한 번 더 보고, 읽지도 못하는 술병까지 다시 한 번 본 확인한다. 이게 정말 여기 사람들이 마시는 술인가, 확인하는 듯한 모습이라 이도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별로야?”
“내 입맛에는 아니지만.”
시오한이 빈 종이컵을 내밀었다. 한 번 더 주거니, 받거니 한 다음 이도하는 자연스럽게 생선 맛 과자를 주워 먹었다.
“무슨 사고가 났기에?”
묻는 시오한의 손도 자연스럽게 과자를 향했다. 바사삭, 경쾌한 소리를 내며 과자를 씹은 그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이도하는 아무것도 못 본 척 태연히 다시 과자를 입에 넣으며 시오한의 턱이 느려지고, 입술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웃음을 눌러 참느라 이도하가 잠시 하늘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쓸모없어진 핸드폰으로 손이 갔다. 이게 사진을 찍어놔야 하는데.
“6살짜리 애가 하나 죽었어.”
이도하가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