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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65화 (164/250)

165화

이도하가 좀 더 빠르게 카트를 밀었다. 지금도 은근히 사람이 모이는 기색이 있으니 더 몰리기 전에 얼른 내뺄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산대에 도착해서, 이도하는 아무래도 이미 다 글러 먹었다는 걸 알았다.

와아아악- 진열대 하나를 벗어나자마자 왁 터지는 비명 소리에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이도하는 저도 모르게 특기를 쓸 뻔했다. 와- 이도하와 나란히 카트를 잡고 있던 시오한이 태연히 감탄했다.

“…미친.”

이도하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대포와 비슷한 카메라를 든 사람들과 그보다 좀 작은 카메라, 핸드폰, 하여간 촬영을 할 수 있는 온갖 것들이 그가 진열대 사이로 나타나기만 기다렸던 것처럼 일제히 셔터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촤르륵 터지는 셔터 소리가 고함, 함성 소리와 한데 엮여 아주 현란하고 정신 사납다. 소심하게 눈길만 주던 사람들도 이 카메라 열기에 편승해 핸드폰을 들었다.

사람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이건 이 근방에서 싹 다 몰려든 수준이다. 한국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아이라로. 홍길동이라고 부를 만할 정도로 신출귀몰한 도약을 일삼았던 덕에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으니, 이도하도 이런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이전부터 그는 이미 인소더블이었고, 계약자가 된 지도 벌써 몇 달이 지났다. 시선과 흘긋거리는 카메라에는 익숙했지만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몰려든 적은 단연코 없었다.

“헐리웃 다 됐네, 망할.”

이도하가 험악하게 카트를 밀었다. 나오세요! 나와요! 밀지 마요! 밀지 마세요! 비켜 주세요! 그래도 어떻게든 물건을 수북이 쌓아온 고객이 무사히 계산대까지 도달하게 해 주려 애쓰는 마트 직원들과 미리 자리를 잡고 있다 떠밀린 사람들 사이에서 혼란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마트 바깥까지 아주 새까맣다. 어디까지 인파가 몰려든 건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밀린 건지, 아니면 다들 그러고 있으니 대담해진 건지 점점 더 가까이 오기까지 한다! 모자챙을 깊숙이 누른 이도하가 바짝 시오한에게 붙었다. 그는 위기감까지 느꼈다.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계산 같은 건 이미 물 건너간 것 같고, 이제는 고작 5분 거리의 집에 어떻게 무사히 갈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비키죠?”

이도하가 챙을 올렸다. 서슬 퍼런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짜증이 날 대로 난 얼굴이 훤히 나타나자 모두가 잠깐 움찔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누구 하나 물러나기는커녕, 아주 기회를 잡았다는 듯 그를 잡아먹을 기세로 카메라가 미친 듯이 터지기 시작한다.

“나오라고.”

“이도하씨! 이도하씨! 동행한 게 황제 맞습니까?!”

“나오라잖아요!”

“밟혀요, 밀지 마요!!”

“황제 폐하! 여기 한 번만 봐주세요!!”

“…….”

기자도 섞여 있었나 보다. 몹시 혼란하다. 질린 건 도리어 이도하였다. 인해전술에는 답도 없다더니 이게 딱 그 짝이다. 이도하가 그냥 냅다 카트를 밀었다. 치이기 싫으면 비키겠지, 했는데 깜짝 놀라 분분히 물러서던 사람들이 저들끼리 엉키더니 와르르 도미노처럼 넘어져 버린다. 그러든가 말든가 또 카메라가 와르륵 터졌다.

“…….”

“화이람.”

짙은 환멸감에 빠진 이도하를 시오한이 불렀다.

“어.”

“왜 능력을 쓰지 않아?”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모자를 깊이 눌러써서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아도 검은색 코트는 시오한에게 정말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그 뒤로 카메라와 핸드폰을 든 사람들과 마트의 전경이 함께 눈에 들어온다. 이도하가 벨트로 한데 묶인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못 쓰겠어.”

시오한은 뭐라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이도하가 질끈 입술을 물었다. 그냥 밀치고 빠져나가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러면 정말 난리도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시오한이 그런 꼴을 당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시오한이 이도하에게 손을 뻗었다. 목 끝까지 끌어올린 점퍼의 지퍼를 부드럽게 내리더니 가슴 속으로 손을 넣는다. 갑자기? 이도하가 흠칫 놀라며 눈을 둥그렇게 뜨고 시오한을 보았다. 모자 아래로 드러난 입가가 매끄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안주머니에 손을 넣은 시오한이 그의 지갑을 가져갔다.

“시오한- 뭘.”

“화이람. 이 지갑, 특별한 거야?”

“아니?”

이도하가 이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오한이 작게 웃더니 대답했다.

“물어줄게.”

“뭐?”

여러 장의 카드와 지폐 칸에 들어 있던 백 원짜리 동전 세 개, 왜 넣어 놨는지 기억도 안 나는 쿠폰과 명함까지 모조리 꺼낸 시오한이, 별안간 동전 하나를 손끝에서 튕겼다. 이도하의 눈에는 그냥 동전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쾅-! 마트의 형광등 두 개가 터져나가며 불티와 유리, 플라스틱 파편이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그들 머리 바로 위였다. 꺄악-! 악!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고, 이도하도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시오한이 다시 손가락 끝으로 동전을 퉁겼고, 쾅-!! 다시 형광등 두 개가 터졌다! 이도하가 입을 벌렸다. 시오한이 검을 쓰는 모습은 몇 번이고 봤다. 검이 아니라 무슨 절삭 레이저를 들고 휘두르는 것처럼 시오한이 한 번 휘두르면 두부처럼 쓱싹쓱싹 뭐든 잘려 나간다. 그런데 이건 그보다 더 믿기지 않는다.

쾅-! 형광등이 또다시 터지고, 마트는 좀 더 어두워졌다. 카드를 든 시오한이 이번에는 좀 더 어깨를 휘둘렀다. 그가 손을 퉁길 때마다 어김없이 형광등이 줄줄이 터져나갔다. 탄내가 진동을 하고 마트는 단숨에 종말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변했다. 이도하고 시오한이고 이제 사람들은 도망치기 바빴다. 워낙에 엉켜 있었던 데다가 빛이 죄다 꺼져버리고 어두워지기까지 하니 아비규환이었다.

마지막으로 이도하의 지갑까지 날려 근처의 형광등이란 형광등은 모조리 박살내 버린 시오한이 이도하의 옆으로 발을 들었다. 이도하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그가 각종 샴푸와 린스 등 욕실 용품들이 진열된 진열대를 ‘밀었다’. 기우뚱, 넘어간 진열대가 그대로 바닥으로 냅다 누워 버렸다. 와장창! 철제 진열대가 쓰러지며 세상 무너지는 소리를 냈고, 상품들이 와르르 바닥을 쏟아졌다. 사태 파악이 안 된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마트가 폭발할 것처럼 으아악! 악! 비명을 질러대며 밖으로 모조리 달려 나갔다. 그중에 이도하와 시오한도 있었다.

시오한이 이도하를 끌고 달렸다. 이도하가 넋을 놓고 정신없이 그를 따라 달렸다. 사람들 속에 섞여 달리는 그는 약간 어깨를 움츠리고, 무릎을 굽힌 채였다. 난리가 난 와중에도 그 우뚝 솟은 키가 잘 보이지 않았고, 묘하게 인파에 섞여 들어간 것이다. 와중에 슬쩍 이도하를 돌아보며 씩 웃는 입매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있는 대로 열이 받았던 이도하도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놀란 쥐 떼처럼 우르르 쏟아져 나오던 인파가 좀 흩어진 기미가 보이자 시오한은 자연스레 걸음을 늦추었다. 놀란 정신에 누군가 소방차와 경찰차까지 불렀는지 사이렌 소리까지 정신없이 난리였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기웃거리니 시오한은 좀 흥미가 일지만, 어쨌든 갈 길이나 가는 행인1처럼 슬쩍슬쩍 돌아보기까지 하는 불꽃 연기를 선보였다. 심지어 몹시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인적도 별로 없는 한적한 골목에 다다랐다.

“와, 힘들었다.”

시오한이 모자를 벗었다. 눌린 머리칼이 흐트러트리며 그가 휴, 한숨까지 내쉰다. 숨 한 톨 흐트러지지 않은 데다가 땀 한 방울 나지 않았는데 저런다. 어처구니없이 그를 보던 이도하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진짜 웃기네.”

이도하가 시오한의 손가락을 확인했다. 뭐 부스터 같은 거라도 달린 게 아닌가 했더니 그냥 멀쩡한 손이다. 좀 많이 예쁘고 고운 손. 알까기 한 번 안 해 봤을 것 같은 손으로 고작 동전과 카드를 던져서 마트 형광등을 죄 깨버리다니.

“응?”

“아니, 연기자세요?”

“뭐든 잘 한다니까?”

시오한이 으스댔다. 이도하도 그렇지만 황제인 시오한도 생전 비슷한 일이라고는 당해본 적이 없을 텐데 그런 능숙한 임기응변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이도하도 모자를 벗었다. 싸늘한 바람이 스치자 아주 시원했다. 시오한이 손가락으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리해주었다. 이제 슬슬 노을이 지고 있었다.

“편의점이나 가야 하나.”

카트에 한가득 실었던 것이 못내 아쉬워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장 보는 재미야 충분히 봤고 그건 그냥 돈지랄이었다. 다 먹을 수도 없었던 것들이니 크게 상관은 없지만 그래도 개중에 시오한에게 꼭 먹여보고 싶은 것들이 있기는 했는데. 이도하의 집은 이미 대한민국이 다 알고 있는 공공연한 주소니 배달을 시키기도 영 그렇다. 게다가 이도하는 이제 카드와 지갑까지 모조리 날려 먹은 빈털터리였다. 핸드폰은 울다 지쳐 죽어버린 지 오래였다.

“라면 끓여 줘, 화이람.”

“라면 상… 그건 또 뭐야.”

집에 있는 라면은 상했는데, 왜 당신 코트 안쪽에서 라면이 나오냐. 영국 여왕이 탄다는 고스트니, 팬텀이니 하는 멋들어진 차의 차키가 나와야 할 것 같은 품에서 벌건 라면 봉지가 푸근하게 나오니 이도하는 순식간에 황당해졌다. 게다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폐까지 꺼낸다. 와중에 이도하의 신분증까지 꼽사리 끼어 있었다.

“그대 사진이 있기에. 몇 살 때야?”

“고딩- 18살 때지. 민증 처음 만들 때 찍은 거니까. 아니, 와중에 그건 또 언제 챙겼어.”

“귀여운걸. 그대를 빈털터리로 만들어서야 못 쓰지.”

이도하의 신분증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시오한이 뿌듯하게 말했다.

“당신이 날린 카드가 진짜 돈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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