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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64화 (163/250)

164화

“혀였는데.”

“혀나 껍데기나. 하기야, 당신은 계약자가 아니니까… 그럼 글자도?”

“약간 바보가 된 기분도 괜찮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시오한이 말했다. 그로서는 졸지에 팔자에도 없었을 까막눈 체험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도하는 기분이 몹시 오묘해졌다. 시오한에게 계약자의 특혜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건 꽤 중요한 문제였다. 아는데도, 그가 저 외에 누구의 말도 알아듣지 못하고, 글도 읽지 못한다는 그 사실이 이상하게 머리에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꾹 입술을 누른 이도하가 말했다.

“이건 세상이 당신을 내 계약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건가? 아니면 계약주는 원래 특혜 같은 게 없었던가.”

계약주야 제 세상에 머무르는 이들이니 언어의 자유 같은 특혜가 필요 없기도 하겠지만, 이건 애초에 이 세상이 계약자와 계약주라는 걸 인식하는지 그것부터도 의문인 문제였다.

“계약주의 특혜라고 하면, 아무래도 호의겠지.”

능숙하게 카트를 밀며 시오한이 말했다. 뭐든 잘하는 시오한은 카트로 매대를 딱 한 번 박았을 뿐이었다.

“소환된 계약자들이 계약주에게 갖는 호의 말이야.”

느릿느릿하게 걷는 그는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코트 자락이 흔들리며 긴 다리가 드러날 때마다 시선을 빼앗기는 게 이도하뿐만이 아니었다. 얼굴이라고는 콧대와 턱선 정도밖에 안 보였으나 그걸로 이미 충분했고, 무엇보다 아우라가 남달랐다. 그것도 모자라 키가 문짝만 한 남자 둘이 모자를 눌러쓰고 카트를 끌고 있으니 그들을 알아보았든 아니든, 이미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한 것이다. 여기저기서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꽤 노골적이었으나 시오한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아, 애착.”

“애착?”

시오한이 되뇌었다. 재미있는 단어라는 듯한 어투였다.

“술 먹고 동성인 계약주에게 뽀뽀한 사람도 있다며.”

시오한의 얼굴이 기묘해졌다. 코끝에 물씬 와 닿는 해산물 냄새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도하가 그를 잡아끌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건 아마 진심이었을 텐데. 계약자가 처음 소환주에게 갖는 감정이 애착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니까. 그대가 더 잘 알잖아? 화이람?”

이도하가 집어 든 것은 봉지 가득하게 든 생굴이었다.

“제철이래. 나야 뭐,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니까.”

아무래도 일반화하기에는 힘들다. 몹시 혼란에 빠져 무려 김윤혜에게 상담을 다 받기는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이도하는 좀 머쓱한 동시에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어땠어요?’

‘별생각 없었어.’

물론 그건 이도하 저도, 김윤혜도 아는 거짓말이었다.

“김윤혜씨는 애착, 애정, 그런 거라고 하던데.”

“몹시 불쾌하게 생겼는걸.”

“응?”

모자챙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시오한의 시선은 분명 물속에서 찰랑찰랑 흔들리는 굴에 꽂혀 있었다. 이도하가 씩 웃었다. 그도 굴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몹시 불쾌하게’ 생겼다는 시오한의 말마따나 생김새나, 향이나, 식감이나 도무지 정이 안 갔다. 그러나 낙지가 고래의 정액이라는 낭설이 도는 곳에서 온 이를 놀리기에는 제격이다. 게다가 생소해하는 반응을 보니 이리스티리움에는 없는 게 분명하다. 아마 고래의 콧물쯤으로 보이지 않을까. 이도하가 봉지를 흔들었다. 굴이 찰랑찰랑 흔들렸다.

“몸에 좋은 거야. 원기 보양식이라고.”

시오한이야 그런 낭설을 믿을 리 없지만, 어쨌든 그도 썩 해산물을 즐기지는 않아 보였다. 시오한이 굴을 앞에 두고 난감한 얼굴로 젓가락을 든 모습을 생각하자 이도하는 신이 났다. 진짜 졸라 귀엽겠다! 이도하가 흥분하는데 시오한이 몹시 흥미로운 어투로 말했다.

“내게 보양식을 먹여 어쩌려고?”

“…….”

신나게 굴 두 봉지를 카트에 담던 이도하는 모자 밑으로 시오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아주 진득하게 웃고 있었다. 시오한이 그를 볼 때 언제나 다양하게 웃고 있긴 하지만 대체로 몹시 부드럽고 다정했는데, 지금은 좀 달랐다. 발가락이 움찔거리고 순간적으로 속이 홧홧해졌다. 굉장한 생각들이 떠오르려고 했다. 이도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굴리다, 제 딴에는 순발력을 발휘해 대답했다.

“…당신 맨날 쓰러지잖아. 우리 과거를 반추해 보자.”

첫… 처음은 아니지만 어쨌든 처음 만난 셈으로 칠 수 있는 소환의 순간이 떠오른다. 시오한은 문자 그대로 정말 다 죽어가고 있었으며, 그다음에는 침대 신세를 지다 피를 왈칵 토했고, 이후로도 안고, 업고… 수많은 부축의 순간들이 차르륵 이어졌다. 이도하가 문득 시오한을 다시 보았다. 하얗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밝은 마트 조명 아래서 유독 더 새하얀 게, 좀 창백한 것 같기도 하다. 잠깐 속이 뜨거워졌던 게 무색하게 이도하는 심각해졌다.

“…당신 아픈 데 없지?”

“응?”

깊게 모자를 눌러쓴 시오한이 조금 고개를 들었다. 챙 아래에 가려져 있던 황금색 눈동자가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아니, 진짜 좀 창백해 보이는데. 이도하가 묶인 손을 다시 만져보았다. 차갑지는 않았다. 그런데 시오한이 말했다.

“좀 눕고 싶기는 해.”

“뭐?”

“기대고 싶기도 하고….”

“어지러워?”

“그건 아니지만.”

눈꼬리를 아래로 떨어트리며 시오한이 뒷말을 흐렸다. 따뜻한 곳에 가고 싶은걸. 하고 중얼거린다.

“추워?”

“음.”

따뜻한 곳 좋지. 밥 먹고, 이불로 바람 한 톨 안 들게 꽉꽉 감싸놓은 다음 과자 까먹으면서 영화나 한 편 보면 천국이겠다. 이도하도 곧장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집에 가자.”

이미 카트는 바퀴가 끼릭거리며 좀 버거워할 정도로 가득 쌓여 있다. 이도하는 일단 굴을 한 봉지 더 담고, 눈에 띄는 알탕 세트와 구운 장어까지 던져 넣으려다 잠깐 멈칫했다. 무심코 시오한을 보려던 이도하가 재깍 시선을 내렸다. 기력 때문이다, 기력. 그 독이니 특기니 했던 것이 시오한의 기력을 잡아먹었다고 했던 게 얼마 전이니까. 장어까지 카트에 밀어 넣은 이도하가 괜히 이마를 문질렀다. 원기보충, 원기보충, 하는 제 목소리와 시오한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맴 돈다. 이도하가 다른 생각을 하려 머리에 한껏 힘을 줬다.

“아무튼, 계약주의 특혜 그거. 김윤혜씨는 애착, 애정, 그런 거라고 했는데 그럼 김윤혜씨가 잘못 알았다고?”

“소환주들은 기원 하나만으로 다른 세계의 존재를 부르는 거고, 능력을 가진 그가 어떤 이일지는 전혀 모르지. 능력을 가진 이 존재들은 누군지도 모르는 이에게 소환되는 거고. 소환엔 물론 동의가 필요하지만 악의를 갖고 있지 않다고도, 갖게 되지 않는다고도 장담할 수 없어. 그러니 해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정도로만, 그 정도인 거야. 오래가지도 않지.”

끼릭끼릭, 다시 카트가 움직였다. 이도하는 뒤통수에 시선을 느꼈다. 족족 다 쓸어 넣어서 그렇지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제 마트에 있는 사람들이 죄다 그들이 여기에 온 걸 안 것 같았다. 주뼛거리고 조심스럽게 흘끔거리던 사람들이 꽤 노골적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대의 말처럼 그런 애착과 애정이라면 소환에 성공하고도 계약에는 실패하는 소환주들이 있을 리도, 계약을 하고도 싸우느라 바쁜 계약주와 계약자가 있을 리도 없지.”

“세계가 취하는 최소한의 보호 같은 거라고 듣긴 했는데. 아.”

이도하가 시식대에서 지글지글 볶아지는 불고기를 찍어 시오한에게 내밀었다. 불고기를 열심히 볶던 집게가 어느 순간 굉장히 놀란 것처럼 허공에 뚝 멈춰 있었지만 이도하는 전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시오한이 얌전히 입을 벌리고 조그만 고기 조각을 받아먹었다.

“어때?”

“맛있어.”

우물거리며, 모자 아래로 시오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이도하는 불고기를 두 점 더 찍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럼 이 세계도 그런 게 있다는 말인가.”

시오한이 이도하의 손에서 이쑤시개를 가져갔다. 조금 찌푸린 이도하의 입에 불고기를 넣어주며, 시오한이 말했다.

“나는 그대를 잊곤 했어.”

시오한이 매대에서 불고기 팩을 집어 카트에 올렸다. 카트는 이제 거의 안에 든 것을 모조리 토해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가 그대를 잊었고, 나도. 그대를 다시 보고서야 기억해냈었지.”

“…역시 당신도 잊히려나.”

이도하가 제 가슴을 슥슥 문지르며 말했다. 태연하게 말했지만, 이내 그는 묶인 시오한의 손을 꾹 잡았다.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그를 기다리던 어린 시오한의 순간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을 홀로 붙들고 그를 기다리던 시오한의 순간들이 떠오르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가슴이 일렁였고, 제 옷을 입은 그를 보니 동시에 녹은 사탕을 한 냄비쯤 속에 부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문득 시오한이 이도하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뭔가를 물어보려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그가 속삭였다.

“입 맞추고 싶다.”

“뭐?”

갑자기?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모자의 챙이 덜컥 부딪쳤다. 시오한의 얼굴이 정말 코앞에 와 있었다. 찰칵- 작은 카메라 소리가 들렸다. 잠깐 얼어붙었던 이도하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않아도 시선이란 시선은 죄다 쏟아지고 있는 와중에 취하기에는 몹시 부적절한 거리였다. 반면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시오한이 말했다.

“몹시 행복하여서.”

“…….”

모자챙을 잡아 누른 이도하가 대답했다.

“…얼른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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