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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63화 (162/250)

163화

“먹여서 잡아먹으려는 거야?”

강렬한 유혹에 시달리고 있는 이도하는 이 말을 듣지 못했다. 가고 싶다. 진짜 가고 싶다. 그는 시오한이 이 세상으로 넘어온 적이 없는 걸로 하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지만 정말 가고 싶었다. 이건 앞으로 두 번은 오지 않을 기회였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할 수 있는 건 그냥 다 해버리면 안 되나?

찬장에는 유통기한이 한 달쯤 지난 라면 세 개만 덜렁 남아 있고, 호텔에 머물던 그의 부모님이 한적한 시골의 펜션으로 내려간 지도 꽤 되어서 냉장고에 있던 반찬은 전부 상한 상태였다. 다시 요리는 손도 대지 말자고 마음먹었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핸드폰도 쓸 수 있고, 찾아볼 게 많으니 꽤 먹을 만한 걸 만들지 않을까. 무려 시오한이 저희 집에 왔는데. 그러면 배달 음식만으로 퉁치는 건 바람직한 한국인의 예의가 아니지 않나? 집 밥도 하고, 배달도 시키고 그러면 되지. 그리고 머리끈도 사야 한다.

훌륭한 자기 합리화 끝에 마침내 유혹에 넘어가고만 이도하가 벌떡 일어났다. 방긋 웃는 돼지머리와 푸짐한 족발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시오한이 덜컹 딸려가는 손에 그를 올려다보았다.

“장 보러 가자, 시오한.”

“응?”

“아무튼 가자.”

한 번 고삐가 풀린 욕심은 아주 끝이 없었다. 적당히 청바지에 니트 하나 정도 꺼내려고 했던 이도하는 생전 처음으로 이 옷과 저 옷 사이에서 고심하다 기어이 옷장을 다 뒤집어엎고 말았다. 시오한이 말렸다면 정신을 좀 차렸을지도 모르나, 그는 이도하가 절 가지고 인형 놀이를 하든 말든 조금도 말릴 기색이 없어 보였다. 그는 벨트로 한데 묶인 이도하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가 쏟아내는 옷들을 구경하다가, 이따금 어설프게 개켜 보려는 시도를 할 뿐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어머니가 보았더라면 힘차게 등짝을 날려버렸을 꼴로 방을 어지럽힌 후에야, 이도하는 마침내 가장 먼저 시오한에게 입혀보고 싶은 옷들을 골라낼 수 있었다. 문제는 아주 단단히 묶어놓은 손이었다. 혹시, 하는 생각이 한 번 고개를 드니 그와 떨어진다는 것이 못내 불안해, 아까 전처럼 그냥 별생각 없이 갈아입고 나와라, 할 수가 없었다. 손이야 잠깐 푼다고 해도 같은 공간에라도 있어야만 했다. 옷을 벗어야 하는 시오한과 한껏 내외를 한 끝에 이도하는 벽을 보고 앉았다.

부스럭거리는 옷 소리에 귀까지 막고 싶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시오한이 제 옷을 입는다고 생각하니 그것도 또 기분이 이상하다. 이도하가 벽에 이마를 박았다. 시오한은 원래도 동작이 느린 사람인데다가 낯선 옷을 입으려니 그가 옷을 갈아입는 시간이 이도하에게는 아주 한나절처럼 느껴졌다.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쓴 끝에, 마침내 손끝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도하가 돌아보았다.

“…….”

벨트를 들고 다시 손목을 내밀고 있던 시오한이 푸핫 웃음을 터트렸다.

“표정이 굉장한 걸, 화이람. 마음에 들어?”

“…개미쳤는데.”

이도하는 옷에도 썩 관심이 없으니 옷도 다 기본적인 것뿐이었다. 색도 죄다 무채색밖에 없다. 그러니 시오한이 입은 것도 딱 기본적이었다. 무난한 청바지에 검은색 니트, 검은색 긴 코트. 온통 까맣고 무난할 뿐인데 미친 듯이 화려해 보이는 건 도대체 뭐 때문일까. 이도하는 지금 새롭게 패션과 욕망에 눈 뜨고 있었다.

“진짜 좀 미친 것 같아.”

“누가?”

시오한의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난 이도하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당신 얼굴이.”

“하하.”

시오한이 어서 묶으라는 듯 벨트를 건넸다. 이도하는 다시 꼼꼼하게 벨트를 엮으면서도 계속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에트레제에서의 시오한은 좀 성스러운 느낌에 가까웠다. 정복을 입고 왕관을 쓰면 유독 더 그렇긴 했지만, 어쨌든 누구도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며 손대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하니 비현실적인 느낌이 한층 더 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검은색 일색에 가까운 코트 차림의 시오한은… 시오한은.

왜 이렇게 야하단 말인가. 이도하는 잠시 아찔해지는 정신을 추슬러야 했다. 맨발 때문이 아니었나. 다 가렸는데 야하다는 말이 무슨 느낌인지 이제야 알겠다. 이도하는 이번에 제가 몰랐던 세상에 대해 참 여러 가지로 알아가는 기분이었다.

“화이람?”

시오한이 고개를 기울여 그를 바라보았다. 검은 챙 아래로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그가 눈이 마주치자 버릇처럼 슬며시 웃는다. 이도하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다가, 기껏 씌운 모자를 그냥 벗겨버렸다. 모르겠고, 일단 지금 당장 키스나 해야겠다.

한참 질척거리는 소리가 난 뒤에야, 이도하가 신음을 삼키며 입술을 떼어 냈다. 시오한이 배부른 사자 같은 얼굴로 만족스럽게 그의 입술을 한 번 훔쳐 주었다. 방 안은 아주 조용했다.

“가야지, 장 보러.”

이도하의 손에 들려 있던 모자를 가져가 가볍게 그의 머리에 얹으며, 시오한이 느긋하게 말했다. 시오한이 아니라 제 양손을 묶어야 하는 게 아닐까, 잠깐 고민하며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진짜 뭐에 홀린 것 같다.”

아주 즐거워 죽겠다는 듯, 모자 아래서 시오한이 깊이 눈웃음 지었다.

***

[81730] <미쳐싿 ㅇㄹㅁ니 나 엄마가 미역 사오래서 집 앞에 마트 왔는데 이도하있음>

<사진>

<사진>

몰래 찍느라고 사진 존나 흔들렸는데 시발 미쳤다 심장마비 걸릴 것 같음 헉헉헉 모자 눌러쓰고 있는데 앞구르뒷구르기백스탭하면서 봐도 이도하 키 생각보다 존나 크고 늘씨한 턱만 봐도 잘생겼음 미쳤다 시발 눈 밑에 계약명 한번만 보고 싶다 한번만 만져보고 싶다 개섹시하던데 아 한번만요 와아아악

댓글(817)

ㄴ어디냐 당장 불어라

ㄴ와 화질구지인데도 진짜 연예인비율이다 다 가졌네

ㄴ이모형도 마트 가는구나 밥도 먹고 그러는구나

ㄴ특기쓰는거 한 번만 보고싶다 샌프때 개오졌었는데 진짜 인간적으로 이모형 특기쇼 한번 해줘야 함

ㄴ아니 근데 아이라 존나 뒤집어졌다는 말 있던데 마트가서 장 보고 있고 존나 태연하네ㅋㅋㅋㅋㅋㅋ이모형 계란과자 먹는거임? ㅋㅋㅋㅋㅋㅋㅋ

ㄴ카트에 저거 뭐냐 민트초코파이냐 아무리 이모형이라도 민초 용서할 수 없다 뭐하는 거야 이모형(정색)

ㄴ아 맛못알

ㄴ와 씨 나 글쓴인데 이도하 누구랑 같이 옴 시발 심장 벌렁거려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아니 그냥 심장마비 올 것 같음 와 이모형 분위기 뭔데

ㄴ헐 이리스티리움 황제 넘어왔다는 소리 있던데 황제임??????

ㄴ이쪽도 모자 눌러쓰고 있는데 금발 보임 머리 개 작고 키 개큼 이도하보다 큼 그냥 미쳤음 검은색 코트 입고 있는데 개섹시하고 저세상 분위기 삼보일배해야할것 같음 구두에 입맞추고싶다하악하악

ㄴ???ㄹㅇ???? 같이 옴???

ㄴ황제 마즘?????

ㄴ ㄱㅆ 근데 둘이 손잡고 있는거 가틈 이모형 소매가 낭낭해서 잘 안 보이는데 백퍼 잡고 있는거다 시발 좋은 인생이었다 잘 있어 여러분 나 먼저 갈게

ㄴ이도하 계약주 데리고 마트 간거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황제 아니고 그 SCU에 레무스 비숍이라는 얘기도 있던데 둘이 샌프때 안면 익혔다고

ㄴ아 이걸 믿는사람이 있네 옥장판 단돈 오만원

ㄴ레무슼ㅋㅋㅋㅋㅋㅋ비숍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 그 대학가에서 이모형 본 사람인데 아님 절대 아님 그냥 저세상 미인이었음 아 아직도 눈에 어른거린다 이모형 책임져라 진짜

ㄴ이모형 삼겹살!! 삼겹살이야 돼지갈비 꼭 먹어줘 비빔밥은 아니야 고기야 고기 알지? 치킨피자 꼭 먹어야 함 족발에 보쌈 후식으로 냉면 때리고 저녁으로는 국밥 한그릇 말아서 소주 한잔 한 다음에 따뜻한 이불에 말아놓고 귤을 하나씩 떼서 입에 넣어줘

ㄴ글쓰닝 어디갓니 다시 도라와 제발 더 알려줘 둘이 뭐 하고 있는데

ㄴ이모형 황제님 많이 데리고 다녀줘 우리 다 모른척 할게 레무스 비숍이잖아 그치?

ㄴ아 RGRG 레무스 비숍임 FBI 팀장님 멀리 오셨네

ㄴ아니 ㄹㅇ 황제임????? 진짜로?????? 어떻게 데려온 건데?????? 인소더블 존나 오지네 이모형 특기가 대체 뭐임

ㄴ이모형 일반 계약 아니라는 소문도 있음.

ㄴ????계약이 다 계약이지 일반 계약이 아니면 뭐야

ㄴ아니근데난좀무서우려고 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리스티리움 황제자나 황제를 왜 데리고 온 건뎈ㅋㅋㅋㅋㅋㅋㅋㅋㅋ이제 지구 정복하는거임?

ㄴ몰라 다 됐어 시발 잘생김이 나라를 구한다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고?”

채끝살, 갈빗살, 안심, 등심, 종류가 왜 이렇게 많아… 붉은 고기 팩들 앞에서 고민하다가 그냥 가장 비싼 것으로 카트에 던져 넣던 이도하가 놀라 물었다. 아까의 전화 통화 당시, 김윤혜가 그를 두고 황제라고 불렀던 게 아무래도 찜찜해 슬그머니 말을 꺼냈는데, 시오한은 김윤혜가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그대 말 밖에는.”

“같은 한국언데?”

“글세, 언어의 자유는 계약자들의 특혜니까. 이건 뭐야?”

“어? 그거 돼지 껍데기다.”

“돼지의 껍데기…?”

“공작의 눈도 먹는데 뭘 새삼.”

이도하는 시오한의 손에 들려 있던 돼지 껍데기를 카트에 던져 넣었다. 커다란 카트는 이미 과자와 빵, 라면에 술까지 온갖 것들이 종류별로 혼잡하게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도하는 시오한이 잠깐이라도 관심을 보인 것이라면 모조리 카트에 때려 넣고 있었다. 떼돈을 벌어도 처음 한 번이나 재미를 봤지 그 뒤로는 쓸 일도 없었는데, 이참에 아주 아낌없이 돈지랄을 해 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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