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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62화 (161/250)

162화

얼렁뚱땅 넘어가 버렸지만, 시오한과 했던 대화가 머리를 스쳤다. 대재앙 당시에 무너졌던 궁이 무사히 복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오한의 초상화는 아무도 복구하지 못했다고 했다. 처음 초상화를 언급했을 때, 모든 시도가 ‘실패했다’고 시오한이 말했던 걸 이도하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정말로 그의 존재에 어떤 오류가 생겼던 거면 어떡하지. 세계에 간섭한 특기로 인해 죽었다 살아나는 바람에… 혹시라도 이 세계까지 그를 죽은 자로 판단하면. 오즈에서, 계약자들의 ‘시체’는 ‘물건’으로 취급된다.

“괜찮아, 화이람.”

자박, 맨발이 마룻바닥을 디디는 조용한 발소리가 났다. 뒤에서 다가온 시오한이 이도하의 어깨에 쿡 머리를 얹었다.

“고작 옷인걸.”

시오한의 손을 잡은 이도하가 몸을 돌려 그를 끌어안았다. 단단하고 따뜻한 몸을 꽉 끌어안자 그의 체향이 훅 밀려들었다. 이렇게 그를 안으면 늘 사이에 옷가지가 한 짐이었는데, 그 한 겹을 벗겨낸 지금은 한층 더 그가 선명하게 와 닿았다. 등을 살살 쓸어내리는 손길에 콱 막힌 숨이 한 올 한 올 풀어지는 것 같다. 이도하가 시오한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다. 분명 괜찮을 테지만….

“화이람.”

시오한이 손을 뒤로 돌려 절 끌어안은 이도하의 손을 잡았다. 조금 몸을 떼어 내며 눈을 맞춘 그가 말했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되지.”

그가 잡은 손을 들어 보였다. 이도하의 손 밑으로 제 손을 끼워 넣어 잡힌 모양새였다.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더니 장난스럽게 흔든다.

“잡고 안 놔주면 되잖아?”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도하씨. 이도하씨!

“어, 김윤혜씨, 잠깐만.”

시오한이 즐겁게 눈웃음을 지었으나, 핸드폰을 어깨에 낀 이도하는 사뭇 심각하고 진지하게 눈높이까지 들어 올린 그 손을 바라보았다. 잠깐만, 하더니 그는 난데없이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시오한은 손이 잡힌 채로 이도하가 일어서면 일어서고, 쭈그리면 쭈그리는 대로 그가 도대체 무엇을 찾는지 영문을 모르는 동시에 아무렴 즐거운 기색으로 지켜보았다. 찾는 게 없는 모양인지 씁, 혀를 차더니 다른 방으로 간다. 졸졸 끌려가며 시오한이 흥미롭게 주변을 구경했다.

“김윤혜씨, 시오한 말이야. 아마… 잊히지 않겠어?”

이도하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했다. 무심코 시오한을 흘긋 바라보자, 화장대 위에 놓인 사진에 시선을 주고 있던 시오한이 시선을 느끼고 돌아본다. 그가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아주 순진무구한 표정을 해 보였다. 이도하가 픽 웃었다.

-그럴 수도 있죠. 오즈에서도 보통 물건들은 남겨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잊히니까. 근데 일반적으로 그렇고, 반복해서 보는 경우에는 기억하기도 하잖아요. 이도하씨의 그분은 사진까지 왕창 찍혀버렸고.

“…….”

-그리고 이도하씨가 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황제는 이미 우리 세계에서도 유명인사예요. 팬클럽도 있는 거 알아요? 실시간 검색어에도 올랐는데 게다가 얼굴이 진짜 좀… 그… 충격적이던데요. 이도하씨가 첫눈에 홀랑 넘어간 거 완전 인정.

망할. 진짜 망할. 이도하는 잠시 자조했다. 멍청이 이도하, 똥멍청이 이도하. 왜 그랬냐 진짜. 솔직히 이도하는 이렇게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잠깐만 생각해 봐도 짐작이 가는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 세계에서 시오한을 쑥 빼온 이도하 스스로도 이게 아직까지 실감이 안 나고 꿈인가 싶은데, 다른 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말이다. 시오한은 제게 대단한 능력도 없으니 다 괜찮다 낙관했지만, 이건 이도하가 시오한의 세계에 미치던 영향과 크게 다르다고 할 수도 없었다. 종류가 좀 다를 뿐이었다.

“언론 통제, 이런 거 잘하잖아. 기사는 내리고, 기억도 지우고, 좀 그러면 안 돼?”

뭐 쓸 만한 게 있을 텐데. 시오한의 손을 놓지 않은 채로 이도하가 안방의 옷장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시오한은 두 가지 일을 한 번에 처리 중인 이도하를 지켜보다 눈을 가늘게 떴다.

-기사 지우고, 그 많은 사람들 기억 지우고, 그걸 누가 하는데요.

“아이라지.”

-그러니까요.

문제를 파악한 이도하는 골치가 아파졌다. 그사이에 이 ‘쓸 만한 것’을 발견한 이도하가 그걸 들고 일어섰다.

-그러니까 차라리 합의를 보는 게 어떠겠냐, 했던 거예요 아까. 내줄 건 내주고, 받을 건 받고. 딜을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아무리 이도하씨라도 세계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잖아요.

다시 핸드폰을 목과 어깨 사이에 끼운 이도하가 이 물건을 시오한과 제 손목에 걸쳐 둘둘 감았다. 그 와중에 한 손으로 단단한 매듭을 지으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어서 절로 얼굴이 구겨졌는데, 김윤혜에게서 저 말까지 들으니 한층 더 험악한 목소리가 나왔다.

“뭘 내 줘. 시오한이 실험 쥐 취급받는 꼴을 보라고? 꿈도 꾸지 마라.”

꽉, 한 번 더 매듭을 여미며 이도하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6살 무렵부터 아이라를 드나들었고, 그래서 소위 그들이 말하는 연구라고 하는 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아주 지겹게 알고 있었다. 딱히 비인도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실험 쥐 운운을 하는 것은 좀 과한 감이 있지만, 수많은 연구원들이 시오한을 앉혀 놓고 온갖 질문을 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이도하는 벌써 눈이 뒤집힐 것 같았다. 감히? 흔드는 게 아니라 건물을 아주 가루 내 버릴 가능성이 컸다.

“일단 생각 좀 해 보자. 김윤혜씨는 혹시나 아이라가 헛짓거리 하려거든 이도하가 아주 그냥 다 죽는 꼴을 보겠대요, 해. 너 죽고 나 죽고, 아니 너만 죽는 거라고. 똑똑한 인간들이니까 뭐 하기 전에 한 열 번쯤 생각하라고.”

-안 그래도 러시아에서 불 아주 크게 난 소식 듣고는 다들 좀 신중해진 것 같던데요, 이도하씨.

아, 그거. 단단히 묶인 매듭을 한 번 흔들어보고 만족하던 이도하가 흘끔 시오한의 눈치를 보았다. 묶인 손목을 한 번 흔들어보는 시오한은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그러라고 한 거야.”

-역시 지리는 인질머리, 도질머리

이건 또 뭔 소리야.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이도하씨!

“왜, 또.”

-…나 한 번만 만나게 해 주면 안 돼요?

“끊는다.”

-아 아무것도 안 물어볼게요, 진짜 한 번 보기만- 한 번 만져보기만 할게요!

전화를 끊은 이도하가 핸드폰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으려다 또 탄식하고 말았다. 아까부터 자꾸 핸드폰이 진동을 해대는 게 계속 메시지가 들어오고 있어서 그런 줄 알았더니, 또 전화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번엔 무려 어머니다! 이도하가 거대한 뼈다귀를 주운 호랑이처럼 난감하게 핸드폰을 바라보는데, 시오한이 말했다.

“기분이 묘한걸.”

“…….”

“약간 흥분되는 것 같-”

이도하가 황급히 시오한의 입을 틀어막았다. 눈만 드러난 시오한이 지긋이 웃었다. 그가 묶인 손을 살살 흔들었다. 이도하와 그의 손목을 아주 단단히 엮은 것은, 손가락 두께쯤 되는 아주 얇은 검은색 벨트였다. 어머니의 것이었다. 음. 이도하가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이따가 좀 더 적당한 걸 찾자.”

“좋은데.”

이도하는 무시했다.

“안 쓸려?”

“응.”

“…리본 같은 거 있을 거야.”

안 묶는다는 소리는 안 한다. 보기에 조금 그렇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도하도 정말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오즈에서 이곳으로 누군가 넘어온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정말 아무도 모른다. 법칙과 이치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이도하는 누구보다도 그걸 뼈저리게 체험했고, 두 번 겪을 생각은 없었다. 이건 도박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떨어지지 마.”

이도하가 말했다.

“내가 어찌 감히.”

시오한이 이도하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음. 동그란 라운드 티 위로 가느다란 선이 드러나는 그의 턱과 목에 시선을 한 번 준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와 씨! 이도하가 소리 없이 숨을 내뱉으며 질끈 눈을 감았다. 진짜 미치겠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게 소리가 다 들릴 것 같다. 아이라가 어쩌고저쩌고 세계가 어쩌고저쩌고 따위는 다 모르겠고 지금 당장 저부터 큰일이 났다. 이도하는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다. 이제 어떻게 한담.

몰래 가슴을 몇 번 쓸어내린 이도하가 다시 시오한을 돌아보았다. 그는 즉시 화려한 황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계속 이도하가 돌아보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를 바라보고 있던 시오한이 눈웃음을 지었다. 발가락이 꼬불거릴 것 같고 또 난리가 났으나 어쨌든 겉으로는 평온하게 시오한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이도하가 문득 씩 웃었다.

“밥 먹자.”

시오한이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

나가서 장을 보고 싶다.

식탁에 앉아 전단지 한 뭉치를 구경하는 시오한을 앞에 두고 이도하는 심각한 충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요란한 글씨에 음식 사진이 커다랗게 쾅쾅 들어간 팔랑거리는 전단지가 시오한의 손끝에 들리니 무슨 외교 문서 같았다. 검은색 티 위로 흐른 황금색 머리칼이 형광등 빛에 반짝반짝한다.

트레이닝복이 아니라 제 청바지도 한 번 입혀보고 싶고, 코트… 코트도 입혀보고 싶다. 시오한은 다리가 길쭉하니 그렇게 입혀놓으면 아주 잘 어울릴 텐데. 사실 뭔들 안 어울리겠냐마는, 좀 더 근사하게 입히고 마트에 함께 갈 수 있는 것이다. 시오한과 마트에. 카트를 끄는 그를 볼 수 있고, 해산물 코너도 보여줄 수 있다. 전국시대에 돌입한 것처럼 별 희한한 맛이 다 쏟아져 나오는 과자를 보여줄 수도 있고.

“다 고르라고?”

“어, 일단 먹고 싶은 거, 뭐 궁금한 거 다 골라나 봐, 시오한. 다 시키자.”

“먹여서 잡아먹으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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