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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61화 (160/250)

161화

“거긴 분위기 어때?”

-아주 발칵 뒤집어졌죠, 당연히!

아이라에 휴가를 내고 주승현의 집에 피신해 있던 김윤혜가 다시 출근하기 시작한 지는 벌써 며칠 되었다. 이도하가 독일에 있는 동안에는 나쁠 것도 없겠다 싶어 그 집에 머물렀을 뿐, 지금에 와서는 더 그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태학 쪽은 이미 언론플레이도 실컷 했겠다, 설마 괜히 거기서 한술 더 떠 괜히 저까지 건드리며 기름을 붓겠냐, 하는 계산이었다. 정말 그렇게 되더라도 저도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는다, 하며 김윤혜는 꽤 악당 같은 얼굴을 해 보였으니 제 안전을 보장할 만한 뭔가를 해 둔 건 틀림없었다.

-난 진짜 몰라요, 이도하씨.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요. 이번만큼은 아이라도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예요. 그럴 수도 없다는 건 이도하씨도 알 거잖아요. 솔직히 이도하씨, 아무리 이도하씨라지만 이런 게 가능할 거라고는 나도, 나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김윤혜의 말끝이 조금 떨렸다. 이쪽 세계의 특기자들이 계약자가 되어 저쪽에 갔다 와 그곳의 일을 전해주는 것과 달리, 저쪽 세계의 누군가가 이쪽으로 아예 넘어온다는 게 계약자가 아닌 이들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짐작할 만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입으로 백날 이야기해 봐야 재미있는 이야깃거리고 무용담처럼 느껴질 뿐이었던 일이 실제로 눈앞에 벌어졌을 때 그 느낌이 다를 것은 자명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이라는 이번 일에서만큼은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계약 양도 실험은 아이라의 내부에서도 여러 쪽으로 갈라져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지만, 이건 그들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대통합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다른 이들도 넘어올 수 있는 건지, 특기의 힘인지 맹약의 힘인지, 이 일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샅샅이 규명해내려 할 것이다. 그게 그들의 일이며 의무이고 본분이기도 했다.

도망가고 싶다. 이도하가 암담하게 생각하는 그때 달칵, 방문이 열렸다. 그가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짠.”

시오한이 씩 웃으며 팔을 벌려 보였다. 입는 건 어째 할 만했냐, 하고 놀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던 이도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그를 보았다.

“옷이 편하네.”

시오한에게 준 건 그냥 평범한 검은색 트레이닝 복이었다. 바지가 제겐 딱 맞았었는데 시오한이 입으니 발목이 조금 드러났다. 약간 도톰한 맨투맨 스타일의 검은색 웃옷 위로 흘러내린 황금색 머리칼이 유난히 더 선명했다. 원래부터 키가 큰 사람이었지만 문짝만 한 키가 새삼 도드라졌고, 드러난 몸 선이며 발목과 맨발이… 특히 맨발이 이상하게 눈길을 끌었다.

아니 발이, 발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야했던가? 이도하가 멍하니 생각했다. 발을 보고 흥분하는 건 좀 변태 아닌가,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생각해 보니 시오한의 맨발을 보는 건 처음 같았다. 이리스티리움의 복식 자체도 그렇지만, 시오한은 특히나 유난히 품이 크고 하늘거리는 옷을 겹겹이 겹쳐 입곤 하니 이도하는 단 한 번도 그의 몸에 이렇게 주목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저 까만 맨투맨 아래에 아까 그 하얀 가슴이… 이도하가 혀를 콱 깨물었다. 화끈한 고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이도하씨? 내 말 듣고 있어요?

“머리 묶어줘, 화이람.”

“어… 우리 집에 머리끈 없는데.”

“응?”

-네?

김윤혜가 되물었고, 시오한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를 보았다. 그야 이도하는 외동이며 아버지는 물론이고 그의 어머니는 머리가 짧아 머리끈 같은 걸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인데, 시오한은 써야 할 무언가가 집에 없다는 걸 잠깐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곧 그렇구나, 하고 시오한이 다소 생소한 얼굴로 대답했다.

-와… 지금 옆에 있는 거죠? 와 씨 진짜 미쳤다.

“뭘 하고 있었어?”

“어, 잠깐 통화. 이게 왜, 당신이랑 나랑 그, 왜 그거처럼 통하는 거거든.”

자꾸만 아래로 미끄러지는 시선을 올리며 이도하가 저와 시오한 사이로 혼란스럽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말이 방지턱에 걸린 듯 턱턱 걸려 원활한 설명이 힘들었다. 게다가 흥미로운 얼굴을 한 시오한이 가까이 다가오니 별안간 숨이 턱 막히는 게 아닌가. 정신 차려라, 이도하. 갑자기 숨을 쉬는 게 몹시 의식되었다. 평온하게 내뱉고, 다시 내쉬는 게 원래 이렇게 번거로웠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아, 그대의 세상에서는 이렇게 되는 거구나.”

한 번 들어보려는 듯 시오한이 귀를 가져다 대었다. 핸드폰은 저쪽 세계로 넘어가는 순간 켜지지도 않는 벽돌로 전락했다. 그런 주제에 까딱 몸에서 떨어지면 사라지기 일쑤이니, 소환의 순간에 잘 놓아두고 갈 수도 없고 많은 계약자들에게 골치 아픈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다. 시오한도 보기야 많이 봤고 어떤 기능을 하는지 들어 알고 있지만, 그 애물단지 벽돌이 실제로 제 기능을 하는 모습을 보니 몹시 흥미로운 듯했다.

고개를 더 기울이며, 시오한이 감싸 안듯 이도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옆구리며 허리며 허벅지까지 몸의 한쪽이 완전히 착 달라붙었다. 게다가 제 발에 은근히 겹쳐진 이 따뜻한 감촉은 대체 뭐란 말인가. 정신 차려라, 이도하. 그가 스스로를 향해 다시 되뇌었다. 방금 전까지 혀까지 비비며 키스를 한 주제에 왜 갑자기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으니 이도하는 딱 환장할 것만 같았다.

“김윤혜씨 뭐랬어, 못 들었다.”

이도하가 애써 평범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 딴에는 방금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고 한 것인데, 방금 일어난 것처럼 목소리가 잠겼다. 망할, 그가 반대편으로 조금 고개를 돌렸다. 손 등에 시오한의 귀가 딱 붙어 있었다. 오돌토돌한 모양이 그대로 그려질 것 같았다.

-와… 진짜야. 진짜다. 대박… 개대박….

“뭐라 그랬냐니까.”

-…이럴 때 아닌 거 아는데 인사 한 번만 해달라고 하면 안 돼요?

“안 돼.”

-너무한다!

“안 그래도 정신없으니까 하나만 하자, 우리. 지금 뭐가 제일 문젠데?”

시오한의 몸이 작게 흔들렸다. 웃은 모양이었다. 이도하는 최대한 평범하게 숨 쉬려고 노력했다.

-모른다면서요. 황제를 어떻게 이곳에 데리고 왔는지, 어떻게 그게 가능했는지 이도하씨도 모른다면서요, 그게 제일 문제지!

“만날 그놈의 인소더블 타령하면서 이번에도 좀 그러면 안 돼? 우와 인소더블은 이런 것도 돼요! 하면 되잖아.”

-사람들이야 수상쩍어도 속는 시늉이나마 해 줄지 모르겠지만, 아이라에서 아, 그렇구나 하겠어요? 이도하씨. 이치, 법치, 이런 것들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넘어갑시다, 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요 지금. 특기자들이 소환되듯이 이도하씨가 황제를 소환한 건 아니라는데 내가 내 뇌를 건다.

김윤혜가 단언했다. 제 천재성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있는 김윤혜가 뇌를 걸겠다는 꽤 오싹한 소리를 서슴없이 할 만큼, 그 말은 사실에 아주 근접해 있었다. 소환은 무슨, 이도하는 그런 건 할 줄도 몰랐다. 그런 게 되는지조차 모른다. 이도하는 정말 ‘어쩌다 보니’ 그랬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으니 입이나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특기자와 계약자, 계약주, 이 소환 관계가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아직도 세상에 제대로 밝혀진 게 없었다. 제가 다른 세상에 갔다 왔다고 전하며 비공식적으로나마 오즈의 존재를 드러나게 한 건, 그나마 가장 첫 계약자로 알려진 미국의 어느 18살 여자아이였다. 그로부터 10년 뒤, 오즈가 정식으로 공인된 이후로 두 세계가 관계는 아직까지도 밝혀야 할 게 더 많은 꾸준한 연구 과제였다.

오랜 세월과 여러 번의 실험에 걸쳐 밝혀진 사실 중 가장 확실한 것 하나는, 두 세계가 서로를 철저하게 배척한다는 것이었다. 소환과 계약이라는 과정을 통해 임시로나마 그곳에서의 존재를 부여받는 계약자들 외에, 이곳의 사물들은 그 어떤 것도 오즈에 남아 있지 못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에 와서는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불편하겠네, 정도로 별일 아닌 듯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사실이기도 했다.

-소환은 일종의 창구라고 보는데, 그런 것도 없이 막무가내로, 이런 식으로 두 세계에 간섭이 일어났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알겠어요. 어떻게 그러려니 할 수 있어요?

“…….”

안다. 그 누구보다도, 이도하 제가 가장 잘 알았다. 이걸 알고 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울 만큼. 잊혀지고, 지워지고, 그래도 끝내 사라지지 않으면… 부수고, 밀고, 쓸어서라도 지워내려 한다. 밑에서 깃털로 살살 문지르는 것처럼 쿵쿵 뛰던 심장에 찬물을 싹 끼얹는 것 같다.

“어차피 시오한은 곧 돌아갈, 거야.”

이도하가 말했다. 그가 흘긋 눈을 돌렸다. 어깨에 걸쳐진 시오한의 손이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손목에 딱 달라붙는 검은색 소매가 시야에 어른거렸다. 가까워서 도리어 흐릿하게 보이는 그의 손 뒤로 거실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돌아가야지.

-이도하씨가 방법을 알고 있었으면 곧이 아니라 바로 돌아갔겠죠.

“…너 좀 싫다?

-뭐 원투데인가.

이렇게까지 예리할 필요가 있냐고. 약간 짜증을 내던 이도하는 퍼뜩 드는 생각에 방문을 홱 돌아보았다.

“시오한, 당신 옷은?”

“잘 두었지.”

시오한이 손가락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이도하가 성큼 걸어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

없었다. 아무것도. 방문에 서서 가려지는 부분도 없이 방이 훤히 다 보이는데, 시오한이 벗어두었을 정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옷을 혼자서 벗지도 못하는 시오한이 벗으면 이불과 흡사할 그 치렁치렁한 정복을 잘 개켜서 옷장에 넣어 두었을 리도 없으니, 이건 사라진 것이다.

이도하는 조금 흐트러진 이불과 시오한이 베고 장난을 치는 바람에 구석에 조금 더 낀 고래 인형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것 말고는 정말 아무 흔적도 없었다. 시오한의 긴 머리카락 하나 떨어져 있지 않다. 이곳의 그 어떤 것도 오즈에 흔적을 남기지 못하듯, 오즈에서도 아무것도 이곳으로 가지고 올 수 없는 것이야 이미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확인하니 가슴에 찬바람이 드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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