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진짜 큰일인데, 이거….”
“하지만 날 돌려보내는 방법도 모르잖아?”
“…모르지. 근데 내가 알고 하는 게 별로 없잖아 원래. 지금도….”
조금 망연해진 이도하가 절 올려다보는 시오한의 얼굴을 콱 눌러보았다. 웃는 낯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시오한의 얼굴이 그대로 찐빵처럼 찌그러졌다. 얼굴에 살도 별로 없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이렇게 밀면 밀려 올라가는 게 있긴 했다. 그의 얼굴을 조물거리면서도 이도하는 영 실감이 안 나고 믿기지가 않았다.
“진짜 당신이네.”
“나지.”
이곳의 특기자들이 계약을 통해 오즈로 넘어가는 일이야 물론 흥미로운 일이긴 하지만, 좀 특별할 뿐인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 데 반해 그쪽 세계에서 이쪽으로 넘어온다는 건 정말 아무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어째선지 누구도 그런 게 가능하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것 같았다. 하늘이 파란 것처럼 그저 그게 맞다고 여겼다.
“손가락 발가락 다 달린 거 맞아? 어디 이상한데 없어?”
“없습니다.”
시오한이 얌전히 대답했다. 이도하가 눈을 뒤집어보고, 턱을 아래로 당겨 입도 벌려보고, 머리카락 사이도 한 번 들여다보고, 머리도 이리 돌렸다 저리 돌렸다 하는 동안 시오한은 고분고분 그의 손에서 놀아나는 중이었다. 손가락이 다섯 개에 손톱까지 모두 멀쩡하게 붙은 것까지 모두 확인하고서야 이도하는 다시 복잡하고 떨떠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이번만큼은 평소 그가 그래왔던 것처럼 그냥 그런가보다, 할 수 없었다.
“화이람, 난 그대처럼 엄청난 능력을 갖고 있지도 않아.”
이도하의 배에 얼굴을 묻은 시오한이 말했다. 배꼽 근처로 따뜻한 입김이 닿아 간질거렸다. 이도하가 조금 몸을 뒤척였으나, 시오한의 팔이 단단하게 그를 끌어안고 있었다.
“당신이 특기자는 아니지만 마력이 인소더블 수준이기는 하잖아.”
시오한이 나지막이 웃었다.
“그럴 리가. 화내지 마, 화이람. 이제야 말하지만 그대를 소환한 건 내게도 무리였어.”
“뭐?”
움찔, 몸을 떼어내려는 이도하를 더 끌어당겨 얼굴을 비빈 시오한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피를 담아 맹약으로 그대를 불러내지 않았어도, 그대가 처음부터 소환에 응했어도, 아무리 나라도 내 마력이 그대를 감당할 수준은 아니었지.”
시오한이 아니었더라도, 그게 누구든 이도하는 오즈에서 소환해 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소환될 수 없었어야 맞았다.
“그럼….”
“그러니 그대는 기적이 맞아, 화이람.”
도리어 피를 쏟아낸 맹약이 아니었더라면 계약은 성립되지 못했을 것이다. 피가 부족한 것이야 수혈이라도 해 보자고 생각해냈지, 마력은 어찌할 방법도 없었을 테니. 이도하는 문득 지하 감옥에서 저를 소환했던 그 사형수가 떠올랐다. 분수에 맞지 않는 무리한 소환으로 마력이 모두 고갈되어 늙어 비틀어진 채 죽었던 모습. 시오한이 처음부터 살 생각 없이 저를 소환했다는 걸 이제 알지만, 그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단 것을 생각하자 이도하는 아주 끔찍했다.
꽉, 저를 감싸 안는 손길을 느낀 시오한이 쿡쿡 웃었다. 그가 이도하에 배에 턱을 대고 고개를 들었다.
“그대는 내게 늘 기적이었지. 그러니 이번에도 걱정하지 말아.”
“…너무 낙관적인 거 아냐?”
“사실 나는 이대로 내일 세계가 망한다고 해도 좋을 것 같거든.”
눈을 접어 웃으며, 시오한이 말했다. 형광등에 비쳐 화려하게 반짝이는 속눈썹 사이로 황금색 눈동자가 올려다본다. 이도하는 약간 눈앞이 아찔했다. 내일 망한다고 해도 좋다는 그 말에 그것도 괜찮지, 하고 대답할 것 같다. 어느 대단한 철학자도 사과나무나 심겠다는데… 물론 그 철학자야 제가 세상을 망하게 하는 게 아니었으니 괜찮았겠지만. 그래도 뭐든 좀 방법을 강구해 봐야 하지 않나, 생각하는 이도하에게 시오한이 쐐기를 박았다.
“정 그렇다면 내일부터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겨우 반나절이야, 화이람.”
그가 손을 뻗어 이도하의 뒷목을 당겼다. 에라, 모르겠다. 그는 정말 모든 걸 내일의 저에게 맡기기로 했다. 사실 시오한이 제 침대에 앉아 있는 광경이 몹시 느낌이 이상해서 아까부터 약간 미칠 것 같은 지경이었다. 잘해라, 내일의 이도하. 이도하가 고개를 숙였다. 나지막한 웃음이 입술로 전해졌다.
황금색 머리칼이 옅은 푸른색 이불 위로 펼쳐졌다. 이도하가 무릎으로 침대를 타고 올랐다. 시오한의 엄지가 부드럽게 뺨을 매만졌다.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불꽃이 번지는 것처럼 뜨겁다. 이도하는 욕심껏 입을 맞추면서, 왜 미국 영화 따위를 보면 잠깐이라도 헤어졌던 남녀가 그렇게 키스를 해대는지 알 것 같았다. 입술을 비비고 혀를 대는 이 행위가 그 어떤 것보다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를 안심시켰다. 그동안 모기만 한 구멍으로 숨을 쉬고 있었던 것처럼 숨통이 트였다. 잠시라도 시오한에게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
젖은 소리를 내며 잠시 입술이 떨어졌다. 시오한이 혀를 내밀어 그의 입술을 핥았다. 가쁘게 숨을 내쉬던 이도하는 문득 동그랗고 까만 눈과 시선이 마주치고 말았다. 원래도 구석에 있긴 했지만 시오한에게 밀려 더 구석으로 찌부가 된 고래 인형이었다. 분명 인형인데, 이 순진무구한 눈과 마주치자 이도하는 저도 모르게 옷을 조금 추스르게 되었다. 얇은 니트가 어느새 가슴께까지 말려 올라가 있었다. 시오한이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가, 고래 인형과 눈이 마주치고 만 이도하를 발견했다.
“…이런.”
시오한이 나른하게 말했다.
“약간 죄책감이 드는걸.”
“하지 마, 하지 마.”
시오한의 입을 틀어막은 이도하가 픽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시오한이 아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도하가 어느새 발치에 떨어져 있던 옷을 주워 내밀었다. 고래 인형을 베개처럼 베고 만지작거리며 시오한이 눈만 깜빡였다.
재단사가 황제에게 어울리는 옷을 만들겠다며 영혼을 갈아 넣은 것처럼 정복은 시오한에게 매우 잘 어울렸지만, 어쨌든 품이 너무 넓고 치렁치렁해 편리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 멋들어진 왕좌와 비슷했다. 아무래도 옷을 갈아입어야 하지 않을까, 하기에 기껏 새 옷을 찾아줬더니 저러고 있다. 눈썹을 올리는 이도하에게 시오한이 말했다.
“나 옷 벗을 줄 몰라, 화이람.”
“……?”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이도하는 어처구니가 없는데, 고래의 조막만 한 지느러미를 잡고 팔락팔락 장난을 치며 시오한이 태연히 말했다.
“내 손으로 벗어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지금 벗겨 달라고?”
“음, 그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해 주면 참 좋기는 하겠다, 하는 얼굴로 수줍게 웃는다. 이도하도 활짝 웃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얼른 입으세요, 폐하.”
얼굴 위로 찰싹 떨어진 옷을 잡아내리며 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모르는데. 약간 서글프게 중얼거리는 걸 들은 이도하는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물론 그는 황제고, 그래서 문이든 사람이든 뭐든 슥삭 베어버리지만 혼자서 목도리 하나 제대로 못할 만큼 손이 많이 가기는 한다. 그래도 옷 하나 못 벗는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된다.
그런데 시오한은 몸을 일으키더니 정말 주섬주섬 옷과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풍성한 황제의 정복은 정말 어찌어찌 벗겨지기는커녕 엉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아니, 그게 아니라 위에 끈부터 풀어야지, 시오한- 아, 이리 내 봐.”
그리고 시오한은 얌전히 앉아 이도하가 팔을 들라며 들고, 고개를 숙이라면 숙이며 아주 자연스럽게 챙김을 받게 되었다. 이도하는 황제의 위엄이란 게 얼마나 효용이라고는 없이 거추장스럽고 번거롭기만 한 과정을 거쳐 탄생하는지 여실히 깨달으며 정복을 푸는 데 집중했다. 그는 아름다운 금실로 멋지게 묶인 매듭 하나를 끙끙거리며 간신히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 겹겹이 페스츄리 같은 정복을 겨우 한 겹 두 겹 풀어낸 뒤였다. 은실로 화려한 수가 놓인 새하얀 비단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이도하는 새하얀 가슴을 마주했다.
“……”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아주 적나라하게 울렸다. 이도하가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흠칫 고개를 든 그가 가느다랗게 웃고 있는 시오한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뭔가 입을 떼려는 찰나, 이도하가 덥석 그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와. 진짜… 진짜.”
감탄하며, 이도하가 고개를 저었다. 새하얗게 드러난 가슴 위에 갈아입을 옷을 올려놓으며 이도하가 방을 나섰다. 왜인지 손도 탈탈 털고 있었다.
“와, 진짜 요물….”
달칵,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나서는 그의 뒤로 문이 닫혔다. 웃음을 흘리며, 시오한이 태연히 다시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조용히 숨만 쉬었다. 공기 한 줌, 손에 닿는 촉각, 모든 것을 하나하나 음미하는 사람처럼 미동이 없었다. 잠시 후에야 그가 느릿하게 눈을 떴다. 배부른 사자처럼 무방비하게 늘어진 채, 그가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기습 같은 건 별일 아니었다. 늘 있는 일인 동시에 위협도 못 될 수준이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 한 세상에 그를 다치게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화이람이- 그가 절 걱정하는 것은 정말 불필요한 사실, 정말 불필요한 일인 것이다. 저를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하며 안절부절못하는 것이 지독하게 달콤해서 엄살을 조금 부렸을 뿐인데.
“오늘 밤은 혼자서 자야겠구나, 작은 고래야.”
이도하의 손때가 묻은 인형의 지느러미를 만지작거리며 작게 속삭인 시오한이 느긋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