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이도하가 파르르 떨리는 손을 그의 뺨으로 가져갔다. 손끝이 상아를 깎아놓은 것 같은 볼을 부드럽고 말랑하게 쿡, 파고든다. 황금색 눈동자가 그 손가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이도하를 보았다.
“…시오한?”
그가 반짝 웃었다.
“응, 화이람.”
이도하가 입을 벌렸다. 맙소사.
“…이도하 아니야?”
“뭐야? 누구야?”
“사람이야?”
순간적으로 눈앞이 까맣게 꺼졌다가 돌아옴과 동시에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하나씩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찰칵, 띵- 또로롱, 하는 갖가지 다양한 셔터 소리들이 속속들이 그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이도하는 홧김에 황급히 바람막이를 벗어 그들의 머리 위로 덮으며 답삭 엎드렸다. 코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유려한 눈매가 길게 휘었다.
“와, 설렌다.”
시오한이 태연하게 말했다. 이도하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시오한, 그러니까 당신이, 네가 지금, 여기가-”
“그대의 세계인 것 같지?”
“…설마 내가…?”
“아마?”
이도하는 말문을 잃고 말았다. 하나만은 분명했다. 사고 쳤구나. 아주 거하게 쳤구나. 하얗게 질려 입술만 뻐끔거리는 이도하를 시오한은 그저 즐겁게 바라보았다. 이도하는 딱 환장할 것 같았으나, 정작 시오한은 이 순간만큼은 그를 걱정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몹시 흥미롭고 즐거워 보였다. 울컥 울분이 치솟고 만 이도하가 와락 시오한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이 양반아?!”
“아야, 아파, 화이람.”
시오한이 우는 소리를 했고, 이도하가 흠칫 놀라 그를 놓았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도하를 초조해서 환장하게 만든 지경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와중에 이도하가 황급히 그를 살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던 그의 검만큼이나 아주 깨끗했다. 울상을 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시오한이 그린 듯이 웃었다. 그가 이도하의 입가에 쪽, 입을 맞추었다.
“보고 싶었어, 화이람.”
“아니, 나도 그렇긴 한데.”
이게 아닌데. 아니, 근데, 아니만 반복하던 이도하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주변이 점점 더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뭐가 됐든, 어떻게 됐든 이미 저인 걸 다 들킨 마당에 이깟 바람막이 하나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 타조가 머리를 박고 있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이도하는 어서 이 자리를 떠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둥글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
“…….”
형군 군단장, 오팔 샤테어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하게 사라진 허공을 가만히 응시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 봐도 똑같았다. 그의 황제가 허공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분홍기가 도는 하얀 머리칼이 그의 마음만큼이나 허망하게 휘날렸다.
[궁!]
방첩대 일원인 나사디아 튤리파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다. 그녀가 빠드득 이를 갈더니 재차 외쳤다.
[빌어먹을, 궁! 당장 이리 튀어오라고!]
피가 번진 깨진 성벽 위로 푸른 소환진이 펼쳐졌다. 불티 같은 푸른 불꽃들이 점점이 모여들어 형체를 이룬 것은 총을 들고 있는 남자였다. FBI가 커다랗게 쓰여 있는 방탄복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자마자 투덜거렸다.
“젠장, 내시, 나도 일이라는 게-”
나사디아 튤리파는 두말하지 않았다. 계약자인 궁과 키가 엇비슷한 그녀는 덥석 그의 멱살을 잡아 성벽 바로 앞에 선 제 앞으로 끌고 왔다. 까마득한 아래를 보며 히익- 기겁을 한 궁이 제 계약주를 붙잡았다. 나사디아 튤리파가 으르렁댔다.
“폐하께서 사라지셨어.”
“뭐?”
“여기서 떨어졌는데, 사라지셨다고!!”
그래서 떨어졌다는 게 문제란 말이냐, 사라진 게 문제란 말이냐. 이 높이면 차라리 사라지는 게 목숨을 보전하는 길이 아닌가. 속으로만 잠깐 생각하며 궁이 주변을 훑었다. 피가 낭자한 바닥과 깨지고 부서진 성벽을 본 그는 단숨에 상황을 짐작했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오팔 샤테어의 계약자와 눈인사를 나누고, 그의 눈이 섬광으로 물들었다. 진득한 피 냄새에 인상을 구겼던 궁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떠도는 사냥개’, 특기의 흔적을 냄새로 맡는 그는 이곳에 뒤섞인 여러 가지 특기의 흔적을 찾아냈으나, 그중에 헷갈릴 수 없는 게 있었다.
“이거….”
“누구야.”
“…그 인소더블인데?”
“인소더블?”
오팔 샤테어가 되물었다.
“폐하의 계약자 말이야.”
“…….”
나사디아 튤리파와 오팔 샤테어가 눈빛을 교환했다. 암군과 형군, 황제의 직속 무력부대로서 그들은 황제를 지척에서 봐 왔고, 그런 이유로 고작 이런 성벽에서 떨어진 일로 그들의 황제가 제 계약자를 소환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전 이곳에서 있었던 습격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황제는 외모도 외모지만 가끔 그가 정말 인간이 맞는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하는 이였다. 암군도 암군이지만 그들이 아니었다고 해도 황제는 무사했을 게 틀림없다. 그런데 여기서 그 계약자의 흔적이 나타났다고?
왜?
물론 황제가 난데없이 허공에서 사라진 이유가 다른 무엇도 아닌 그의 계약자 때문이라면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 오팔 샤테어가 제 계약자에게 말했다.
“서련. 확인 좀 해주겠어?”
“음.”
그의 계약자- 서련이 대답을 미루며 볼을 긁적였다. 나 한국어 못 하는데… 중얼거리는 서련을 향해 오팔 샤테어가 눈을 접었다.
“부탁해.”
“…알겠어.”
푸른빛으로 흩어지며 그가 사라지자, 나사디아 튤리파도 제 계약자를 돌아보았다. 빤히 절 보는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한 궁이 손에 들린 총을 들어보였다.
“한국 되게 멀어, 난 바쁘다고.”
“그래, 바쁘다며? 가.”
“서럽다, 서러워.”
툴툴거리며, 궁이 몸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흘긋, 까마득한 성벽 아래로 향했다. 착각하려야 착각할 수가 없는 인소더블의 독특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가 가늘어진 눈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분명 그 인소더블의 흔적이 맞는데, 소환되었을 때 특유의 향은 느껴지지 않는다. 도리어 다른 향이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익숙해서, 그가 오히려 잘 맡지 못하는 향, 그의 세계가 풍기는 향이었다.
아마 착각이겠지. 궁의 눈에서 섬광이 꺼졌다. 그럴 리가 있나. 아마 갑작스레 원래 무뎌진 향기가 문득 다시 나곤 하는, 그런 일일 것이다. 제가 방금 전 소환되었으니 코끝에 향이 남아 있다고 보는 게 더 맞을 것이다. 세상이 꽤 난리인데 인소더블은 도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지. 고개를 갸웃한 그가 이내 사라졌다.
암군만 남은 성벽 위에서, 그들은 서로 멀거니 시선을 마주했다. 아이고, 나사디아 튤리파가 혀를 찼다.
“이제 어떡합니까?”
“…….”
음, 고민하는 그의 새하얀 머리가 아기 새의 솜털처럼 팔락거렸다. 황제가 사라진 이유가 그의 계약자 때문이라고 하면 분명 다행이기는 했다. 앞으로 일어날 예상 가능한 수많은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그는 형군이고, 그가 하는 일은 황제가 명령하는 이를 신나게 때려잡는 일이었다. 정치나 외교 쪽은 그의 분야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해본 끝에 그는 이 일을 더 적합한 사람에게 떠넘기기로 했다.
“일리온 시타 백작이 지금 어디 있지?”
은빛 정복의 긴 소매에 휘감겨 있던 손이 매끄럽게 뻗어 나왔다. 긴 손가락 끝이 둥근 고래 인형의 등을 한 번 쓸어보고는, 조심스럽게 토닥거렸다.
“안녕.”
드디어 만나보는구나. 시오한은 침대 구석에 쿡 박힌 빛바랜 고래 인형을 향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작고 동글동글한 눈동자가 마치 이 낯선 사람을 영문을 모르고 땡그랗게 바라보는 것 같아 귀엽기 짝이 없다.
“무슨 인형한테 인사를 하고 있어.”
쪼그린 채 열심히 옷장을 뒤지고 있던 이도하가 새 옷을 내밀었다. 시오한이 받으려는 찰나에 멈칫, 손을 뺀 이도하가 참 복잡 미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시오한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생글생글 웃기만 하고 있었는데, 먼지가 좀 쌓인 제 방에 정복 차림의 시오한이 서 있는 이 굉장한 위화감을 이도하는 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은 없고 급한 와중에 도약을 하려고 보니 집 밖에는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다. 중학생 때부터 쓰던 책상에, 마찬가지로 중학생 때 키가 확 크는 바람에 한 번 바꾼 더블 사이즈의 침대, 전공서와 공책 및 책과 장식품 몇 개가 놓인 책장. 그 속에 시오한만 혼자 장르가 다르다. 혼자 어디서 떼어서 합성해 붙여놓은 것 같다.
“시오한, 다시 생각하자.”
“무엇을?”
“이거 진짜 아니야, 큰일 나면 어떡해?”
“그대가 이리 곁에 있는데 어떻게 큰일이 나겠어.”
큰일은 이미 저기서 다 끝났지. 말하며 시오한이 이도하의 침대에 풀썩 앉았다.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이도하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로마 제국에서 단종의 핏줄로 태어난 이순신이 제 침대에…. 언젠가 김윤혜가 했던 비유를 떠올리며 이도하가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건 말건, 그저 즐거운 시오한은 이도하에게 두 팔을 뻗었다.
“안아줘, 화이람.”
“어?”
이도하가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낯선 세계에 와 있으려니 무섭고 불안한걸.”
“…표정 관리라도 좀 하고 말을 하자.”
신나 죽겠다는 얼굴로 그리 말하면 믿어주는 시늉도 하기 힘들다. 투덜거리면서도 이도하는 순순히 그에게 다가갔다. 빙그레 웃으며 시오한이 그의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이도하가 시오한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됐든 이렇게 닿아 있으니 좀 안심이 되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