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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57화 (156/250)

157화

“…모르겠네.”

쿵, 난간에 이마를 찧으며 이도하가 조금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천 년 전도 천 년 전이지만, 도대체 저들이, 주승현이 저를 통해 뭘 하려고 하는지를 통 모르겠다. 뭘 원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통 애매하고 거슬리는 태도로 굴지만 진짜 위협은 되지 않으니, 괜히 성질만 올라온다고 헛손질을 해대다가 애먼 초가삼간을 다 태워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위협이라고 하면… 오히려 다른 곳에서 찔러대고 있고.

-화이람, 무얼 걱정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

이도하가 다시 말했다. 그냥 다 부수고, 다 엎고, 그건 쉬웠다. 떼쟁이 어린애가 하는 것처럼 와장창 다 밀어버리며 내가 이렇게 세니까 너네 다 큰일 난다! 하는 거야 정말 별일 아니었다. 당장 어젯밤에도 하고 왔다.

“시오한, 나 어떻게 할까.”

-화이람.

다정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화이람, 화이람… 이도하가 눈을 감았다.

-그대가 무얼 잃고 싶지 않은지, 가장 바라지 않는 게 뭔지 생각해. 상대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집중하다 보면 도리어 그대가 지키고자 했던 건 잊어버리게 되고, 잃은 후에는 이미 늦기 마련이니. 그대를 생각해, 화이람. 다른 무엇이 아니라.

시오한이 말했다. 잃고 싶지 않은 것. 그건 굳이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내가 잃고 싶지 않은 건 당신이지, 시오한. 너야.”

-……

잠시 뒤에 옅은 웃음소리가 났다. 꼭, 아주 행복해하는 것 같은 웃음소리였다. 그가 느릿느릿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어, 화이람. 그대가 날 잃을 일은 없을 테니.

“모르는 거잖아, 그건.”

순간 울컥한 이도하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일리온, 암군이었던 그가 그렇게 시종장이 되어 있을 줄을 누가 알았나. 계약자가 그런 식으로, 병으로 죽을 줄 알았겠는가 말이다.

-그대가 이리 걱정하니, 앞으론 빗방울 하나까지도 조심해야지

“…….”

-벌레 하나, 불티 하나, 다 조심할게. 그대가 나를 필요로 하니까.

“시오한. 난 당신이, 네가-”

타타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눈치를 보던 헬기가 조금씩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지금쯤 이 옥상 위에 있는 이도하를 발견했을지도 몰랐다.

-황제인 내가 필요해, 화이람?

시오한이 단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할게.

“…그런 게 아니야.”

시오한은 그 아름다운 왕관을 쓰고, 용으로 된 권좌에 앉아 있지 않아도 조금도 빛이 바래지 않을 사람이었다. 어디에 앉아 있건, 어디에 있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홀로도 황제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진창으로 떨어져도 그는 오롯이 빛날 것이다. 그런 건 아무 상관없었다. 상관없지만….

“당신이, 아무것도 잃지 않기를 바라는 거라고.”

-화이람, 내가 잃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어.

한 박자 뒤에 그가 대답했다. 조금씩 접근하는 헬기에 바람이 강해졌다.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반짝- 어딘가에 반사된 것 같은 빛이 순간적으로 시야를 하얗게 가렸다. 이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오한, 어디야? 내려갔어?”

-음, 조금만 더 있다가?

느낌이 이상한데. 이도하가 재차 물었다.

“당신 뭐 해?”

-운동?

“뭐 하냐고.”

-화이람.

조금 난감해하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달래듯이. 또, 반 박자 늦게, 조금 어긋난 타이밍으로.

“시오한.”

-정말 별일 아니야.

“시오한!”

-흔한 손님이야, 화이람.

난간에 기대 있던 이도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대낮이라며. 여기처럼 훤한 낮이라며?

“날 불러-”

-화이람, 정말 괜찮아.

도리어 그를 달래며, 시오한이 대답했다. 지금 소환하면 분명 이도하는 특기를 쓸 테고, 그럼 마력도 소비된다. 이도하는 시오한이 이제야 좀 회복된 마력을 겨우 이런 일로 날려버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걸 알았다.

“시오한! 날 소환하라고!”

-쉬, 화이람.

시오한은 절대 그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도하가 난간을 걷어 차버렸다. 발길질 한 번에 아주 두꺼운 철근으로 엮인 난간이 바나나 조각처럼 후두둑 부러지며 바깥으로 끼이익 구부러졌다.

이도하는 안심해 보려고 아주 잠깐 노력했다. 그러나 이내 군나르가 근신 중이라는 사실이 불쑥 떠올랐고, 이 흔한 손님들이 늘 계약자였다는 사실도 불쑥 떠올랐으며, 시오한이 아주 까마득하게 높은 궁성 꼭대기에 앉아 있었다는 사실까지 연이어 떠오르자 안심은커녕 그냥 딱 미쳐버릴 것 같았다.

누구지? 까만 눈동자에 푸른 섬광이 일렁거렸다. 뽑히고 부러져 바깥으로 기울어진 철근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건물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으나 이도하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무섭도록 생각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이라도 찾아서 계약을 파기시켜버리면… 아니다, 계약자도 저곳에 있고, 계약주도 저곳에 있다. 이곳에서는 건드릴 방법이 없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넘어가는 건 어떨까. 아주 잠깐이면 될 텐데. 잠깐이면….

안 돼.

이도하가 차가워진 제 손끝을 감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핏기가 싹 빨려 나가는 느낌에 이도하가 숨을 골랐다. 그러나 속이 콱 막힌 것 같다. 못 한다. 꽉 주먹을 쥐며, 이도하가 머리를 흔들었다. 어떡해야 하지?

-해서, 화이람. 내가 뭘 해야 그대가 기회를 줄까?

“뭐?”

-그대의 세계에는 속에 넣었다 뺀다는 말도 있다며.

“…뭐, 뭐?”

이도하가 말을 더듬었다. 푸르스름하게 물든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어디다 넣었다 빼? 뭘?

-마음을 보여주려고 말이야. 아, 이게 아닌가. ‘속을 갈라 보여 준다’였나.

속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도하가 이마를 짚었다.

“진짜 속 뒤집는 소리 할래?”

-아쉽네.

잔잔한 웃음기가 묻은 소리가 말했다. 이도하가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치겠다, 진짜. 그가 초조하게 제 입매를 감쌌다. 목소리야 분명 태연하긴 하지만, 시오한은 피를 왈칵 토하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태연하게 헛소리를 했었으니 칼이 눈앞에 오락가락하는 상황에서 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볼 수만이라도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한 이도하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볼 수 있다. 그의 시야로, 본 적이 있다. 지하 감옥에서, 그리고 독일의 호텔에서. 처음에는 착각인 줄 알았고, 이후에는 꿈이었겠거니 했지만 그때 분명 시오한의 시야로 보고 있었다. 방금 전의 그 번쩍임도. 하지만 그게 어떻게 하는 줄을 모르는데. 이도하는 그냥 막무가내로 눈부터 질끈 감고 보았다. 할 줄 모르는 게 어디 있나, 그냥 하는 거지. 어차피 제가 하는 게 다 그렇다.

싸늘한 바람이 머리칼을 훑고 지나가고, 시끄러운 헬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두근두근- 초조하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귀에다 심장을 쑤셔 박은 양 요란하다. 이도하는 서늘하고 축축했던 지하 감옥을 떠올렸다. 검을 쥐고 있던 손아귀, 손아귀로 이어지는 팔의 근육, 어깨의 움직임, 쿵쿵- 약동하던 심장, 닿은 몸을 통해 고스란히 감각이 전해지던 그 느낌. 계약의 순간, 제게서 그에게로 흘러갔던 피, 마치, 제가 빨려 들어가는 듯했던 그 느낌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이 몸에 흐르는 피는 그대의 것이니.’

이도하가 눈을 떴다.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황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세계를 관통해, 그 눈의 주인이 바라보는 시야를 바라보았다.

바닥에 피가 흥건했다. 그에 비해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은 깨끗한 검날이 시야에 걸쳐져 있다. 꾸물꾸물 번지는 피를 피해 한 걸음 물러서며 고개를 든다. 하얀 머리칼에 묘하게 분홍기가 도는 짧은 머리칼을 가진 호리호리한 남자가 양손에 날이 짧은 단도를 들고 서 있었다. 낯이 익다.

남자가 옆에 선 이에게 뭔가 말한다. 검은 청바지에 후드 집업 차림, 계약자였다. 그가 좀 난감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주위에는 몇 사람이 더 있었다. 깨지고 부서지고, 뒤집어지고, 피가 흩뿌려진 전투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지만 제압된 이나, 시체는 없다. 그러나 어느 모로 봐도, 시오한의 말처럼 ‘별일이 아니었던’ 현장은 아닌 게 분명했다.

하얀 머리칼의 남자가 시오한을 돌아보았다가, 조금 놀란 얼굴을 한다. 그가 무언가 말했다. 시야가 깜빡하고, 매끈한 손이 다가온다. 시오한이 제 눈을 매만지고 있었다.

-화이람?

놀란 것 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두근두근, 심장 박동 소리가 겹쳐 들린다. 조금 어긋난 박자가 이내 하나로 합쳐졌다. 이도하는 저도 모르게 스스로가 제 눈에 손을 올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손을 내렸다. 이도하도 손을 내렸다.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다. 피가 흐른 성벽 위와 잔디가 깔린 아이라의 옥상이 겹쳐 보인다.

-화이람, 그대가 지금….

그 순간 시야가 급변했다. 황금색 머리칼이 휘몰아쳤다. 그 틈 사이로, 하얀 머리칼의 남자가 즉시 손을 뻗는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계약자의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피가 튀는 것과 동시에, 기습을 감행한 암살자가 버려진 인형처럼 풀썩 쓰러지며 푸른색 빛줄기에 휘감겨 사라지는 모습이 멀어진다. 곧바로 햇빛이 쨍하게 번진 푸른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옷자락이 떠오르듯 위로 펄럭인다. 이도하가 다시 눈을 깜빡였다. 그의 머리칼이 휘날리고 있었다. 부러진 난간 밖으로, 어느새 이도하는 제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낙하하고 있다. 시오한이, 떨어지고 있다!

안 돼-

이도하가 손을 뻗었다. 부서지고 깨진 하얀 성벽과 난간이 부서진 아이라의 모습이 교차된다. 하늘을 향해 뻗어진 손이 제 손인지, 시오한의 시야로 보는 그의 손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이도하는 그 손을 꽉 쥐었다. 따뜻한 것이 손에 닿았다. 마치, 세계를 넘어 그의 손을 쥔 것처럼. 그대로 끌어당겨 안으며, 이도하가 질끈 눈을 감았다.

“윽-!”

둔탁한 충격과 함께, 이도하는 풀썩 엎어졌다. 충격이 제법 있었지만 통증은 없었다. 주변이 시끌시끌하고 머리가 왱왱 울린다. 시끄럽게 탈탈 울리던 헬기 소리는 사라지고 없다. 시오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은 찰나에, 또렷한 목소리가 지척에서 그를 불렀다.

“…화이람?”

오직 그만이 부르는 이름으로. 이도하가 번쩍 눈을 떴다. 황금색 눈동자가 얼떨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에서, 위로. 그의 밑에 깔린 채로. 황금색 머리칼은 까만색 아스팔트 위로 흐트러져 있다. 은빛 정복이 화려하게 펼쳐져 반짝거린다.

이도하는 잠시 그 광경이 이해가 안 가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청바지, 야구잠바, 과잠, 운동화, 야상, 좀 더 두꺼운 점퍼, 검은머리, 검은머리, 금발, 갈색머리, 아무튼 염색한 머리, 대학생들. 어안이 벙벙한 눈과 카메라 렌즈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이도하가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유난히 더 찬란해 보이는 황금색 머리칼, 기적 같이 아름다운 얼굴이 멀뚱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이도하도 멀뚱히 그를 내려다보다, 간신히 입을 벌렸다.

“이게….”

“안녕, 화이람.”

그가, 시오한이, 그의 아래 깔려, 아스팔트 위에 누운 시오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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