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마음대로 해라. 간다.”
무슨 말을 하겠나. 저가, 이도하가. 그가 신은호의 가슴을 밀었다. 분명 빈손이었는데, 어느새 신은호의 품 안에는 조그만 박스가 안겨 있었다. 뜯지도 않은 새 핸드폰 박스였다.
“야, 이거 뭔데?!”
대충 제 핸드폰을 흔들어주며, 이도하가 회의실을 나섰다.
“그렇대.”
옥상에는 세차게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른 지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나는 머리칼이 마구 흩날린다. 좀 잘라야 되나… 손가락 사이로 머리칼을 펼쳐보며 이도하가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아이라의 연구동들을 둘러싼 숲을 지나 높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선 도시가 멀리 보인다. 날이 맑아 해가 아주 쨍했다. 눈이 부셔서 이도하는 어렴풋이 눈을 감았다. 난간에 기대니 지친 것 같지도 않은데 몸이 축 늘어졌다.
-아이잖아.
“…말려야 했나.”
고향, 어린 시절, 그런 것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고, 책임질 필요도 없이 마냥 철없고 행복하기만 해도 되는 때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에게는 그곳이 그럴 테였다. 부모 없는 고아, 독특한 특기를 가진 아이로 절 보는 시선은 모두 사라진 다른 세상. 그저 철없이 굴어도 되었던 곳. 착하고 어른스러울 필요 없었던 곳. 툴툴거리고 퉁명스러웠지만 계약으로 맺어진, 언제나 제 편일 보호자가 있었던 곳. 절 바라는 사람이 있었던 곳.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 제 삶에 행복했던 기억을 모두 두고 온 아이를 부추기는 것은 아주 쉬울 것이다. 아마 이제 모두가 그 애를 그렇게 부추길 텐데. 그래, 다시 가야지. 그래도 가 봐야지. 한 번 더 가 보고 싶지 않니, 하며. 저라도 말려야 했을까. 이도하는 따스한 햇볕을 받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사실은 누구라도 말려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을까. 그러다가 다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소용없겠지. 이도하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신경이 쓰여?
“그냥, 자꾸 생각이 나네. 문득문득. …좀 닮았잖아.”
둥그렇고 차가운 난간에 이마를 대며, 이도하가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시오한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화이람, 그럴 리가.
정말 그런 희한한 소리는 난생처음 듣는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널 사랑하지만 이건 정말 헛소리라는 어투다. 착잡하게 기분이 가라앉아 가고 있던 이도하는 황당한 동시에 조금 머쓱해지고 말았다. 아니 이 양반이?
“…아니 그게, 무슨 소린지 알잖아.”
-전혀 모르겠는걸.
“어이없네.”
이도하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시오한이 신은호를 마주친 것은 딱 한 번뿐이었다. 그것도 영 좋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이도하는 시오한의 이 시큰둥한 반응을 이해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시오한이 아이에게 신경을 쓸 이유는 전혀 없었다. 이도하가 아니었더라면 눈길조차 한 번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알지만, 이렇게 확인하니 이도하는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대는 아주 사랑스럽고 귀여웠….
“아, 그만. 그만. 조용히 해, 시오한. 쉿.”
-심통이 나네.
“이 사람아.”
-왜 귀여운 걸 귀엽다고 말 못 하게 하지.
난간에 이마를 기댄 채로, 이도하는 이제 끅끅 웃기 시작했다. 심통이라니, 왜 그런 단어를 쓰고 그러냐.
“제발 그만해 주라. 약간 괴롭다. 그리고 솔직히 말은 바로 하라고, 예쁘기야 당신이 더 예뻤거든.”
그건 정말 아무도 반박할 수 없을 거라고 이도하는 생각했다. 초상화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어린 시오한은 정말로 예뻤다. 흔히 아이들을 두고 천사로 비유하지만 시오한은 정말로 하늘이 잘못 떨어트린 천사 같았다. 허리까지 늘어뜨린 환한 금발은 민들레 풀씨처럼 부드러웠고, 조각낸 것처럼 선이 기가 막힌 지금과는 달리 젖살이 붙어 약간 통통했던 뺨이 몹시도 사랑스러웠다. 동그란 황금빛 눈동자가 웃으면,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었다. 잘 웃지 않아 그랬지.
-물론 나야 그랬지. 그대가 몹시 사랑스러웠다는 게 사실인 만큼.
누가 당신한테 이런 주접을 가르쳐줬냐고 하려던 이도하는 입을 다물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황손이었다가, 황태자가 되어 황제가 된 그의 앞에서 이렇게 예쁘니, 천사 같다느니 하며 뻔뻔하게 굴었던 게 달리 또 누가 있겠는가 말이다. 부끄러움이라고는 몰랐던 어린 저말고는.
“지금은 안 사랑스럽고?”
순간적으로 잠깐 솟은 장난기에 헛소리를 한 이도하는 곧장 후회했다. 이도하가 난간에 이마를 박는 사이 잠시 조용했던 시오한이 대답했다.
-기회를 준다면야….
“당신 초상화 말이야.”
이도하가 재빨리 말했다. 재앙으로 불타고 무너져 내렸던 이리스티리움의 대부분은 당시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계약주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사물을 누군가 기억하는 모습으로 되돌리고, 최초에 ‘완성’되었던 모습으로 복구하고, 깨지거나 사라진 부분을 다시 잇는 ‘복구’, ‘회복’이 가능한 특기자들이 대거 소환되었으니 그중 누구도 초상화 하나를 복구시키지 못했다는 건 뭔가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오류라던가. 그리고 그게 무엇이든 그 때 일어난 오류라고 하면, 짐작 가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복원이 안 된다고 했었잖아, 혹시 그게… 나 때문이야?”
-세계 탓이지.
조금 웃으면서도, 이도하가 눈썹을 구겼다. 그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복구나 회복 특기는 사물을 온전했던 모습으로 되돌리는 성질이 대부분이다. 만약 정말 그런 오류 같은 게 생긴 거라면… 혹시라도, 이미 죽은 시오한을 다시 되살리는 바람에 세계가 그를 ‘죽었다’ 인식했거나, 그런 거라면….
-화이람, 그건 그냥 그림일 뿐이야.
“…….”
-난 여기 있어.
“…응.”
이도하가 답했다. 천만다행이지. 이렇게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어서. 이도하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찬 공기가 폐부를 서늘하게 식혔다.
“시오한, 혹시….”
-내 어린 시절이 아쉬워서 그래?
“어?”
이도하는 한껏 머뭇거렸건만, 시오한이 딴소리를 했다. 제 초상화가 영영 사라졌건 말건, 그게 오류였건 말건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대가 원한다면 난 언제든 어린아이가 되어줄 수 있는데.
“뭔… 아.”
그렇네. 이도하는 깨달았다. 시오한을 잠깐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만드는 것쯤이야 별일 아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나 그런 것도 할 수 있지. 조금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잠시 8살 시오한의 모습을 떠올려 본 이도하가 입을 틀어막았다. 뭔 소리를 하나 했는데 이게 상상을 해 보니….
“…좀 혹하는데?”
-난 언제든 준비되어 있어, 화이람.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말했다. 8살의 시오한은 어리고 순수했다. 그는 많은 걸 알고 있었지만, 또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도 했다. 풀을 엮어 만든 조잡한 반지 하나도 몹시 진지하고 신중하게 관찰하고 즐거워했다. 풀로 반지를 엮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즐거운 것처럼. 8살의 시오한은 그랬는데… 8살 어린 천사 같은 시오한의 모습을 한 지금의 시오한이라. 이도하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내 마음의 준비부터 좀 하자, 그것도.”
-그런 게 필요하단 말이야?
“내가 8살 때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해 봐, 시오한.”
-…그대에게 칭찬받을 일이 뭐가 있을까.
“아, 상품으로 걸게?”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이도하가 난간 위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그래, 깊이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다가 아래로 쭉 빠져버릴 것 같았던 건 이미 경험해 보지 않았나. 타타타- 머리 위에서 헬기 소리가 들린다. 멀리서 헬기가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맴돌고 있었다. 독일 갑니다- 하고 사라져 버렸던 이도하가 아이라에 다시 나타났다는 소식이 지금쯤 발 빠르게 번졌을 테니, 저건 아마도 방송국 헬기일 테였다.
“뭘 상품씩이나. 얼른 내려가기나 해. 당신 아직도 그 옥상이지?”
-응, 날씨가 아주 좋아서.
“…여기도.”
멀리 내다보던 이도하가 눈을 감았다. 이어폰까지 꼽고 있으니 전혀 다른 세상이 아닌, 그냥 다른 외국 어딘가에 그가 있는 것 같다.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곳에.
이도하는 이곳과는 전혀 다른 성도의 전경이 널리 펼쳐져 있을 그 옥상 위에 앉은 시오한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정무를 더 미룰 수가 없어 어제부터 다시 대전회의를 주관했다 했으니, 지금쯤 시오한은 정복을 입고 있을 것이다. 새하얀 겨울 숲을 조그맣게 축소해 놓은 것 같은, 혹은 사슴 신의 뿔 같은 예의 그 화려한 왕관을 쓰고 있을 것이다. 아니, 시오한은 왕관을 쓰고 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내려놓았을 수도 있겠다. 이리스티리움은 완연한 여름에 접어들었으니 이렇게 싸늘한 바람보다는 훈훈한 바람이 화려한 금발을 연하게 흔들고 있을 것이다.
‘등을 맞댄 거울. 절대로 마주 볼 수 없는 세계.’
절대로 마주 볼 수 없는, 세계.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맹세. 반드시 지켜질 약속. 이도하가 그 말을 되뇌었다. 반드시, 지켜질 약속… 이도하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이, 바람으로 남긴 기록이 아니어야 하는데.
천 년 전의 일, 멸망해 이름조차 잊힌 왕국의 기억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들여다볼 수 있을까. 우르슬라의 기억을 한 번 더 들여다봤다가는 이도하 저조차도 미쳐버릴지 모를 노릇이고, 천 년 전의 오즈로 무턱대고 넘어갔다가는 아예 세계가 박살 나 버릴지도 모른다. 시오한의 마력을 이용하는 건 감히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신음하며 이도하가 난간 위로 늘어졌다. 머리를 굴린다고 원래 없이 살았던 창의력이 통 튀어나오지 않았다.
천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저들은 이도하 저가 그걸 알길 원한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 그걸 해결해 주길 원했든, 달리 다른 이유가 있든 저를 자꾸만 천 년 전으로 몰고 간 것에는 목적이 있을 게 분명했다. 햇볕이 쨍하게 내리쬐는 숲이 바람에 선선히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이도하는 생각에 잠겼다. 찔끔찔끔 흔적을 던져대면서 이도하가 따라오게 만들었었는데, 그다음은 뭐였을까. 어떻게 보여주려고 했을까. 지들과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천 년이나 지난 일을 가지고 이렇게 지랄들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