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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55화 (154/250)

155화

이도하는 그를 위해 문을 열어주느라고 지문을 빌려준 보안 직원과 셀카를 한 번 찍어주고, 성큼성큼 복도를 걷는 이도하를 보며 놀란 웬 연구원 하나가 떨어트릴 뻔한 핸드폰을 잡아주는 작은 친절을 베푼 뒤 엘리베이터를 한 번 더 타고 본관 5층으로 향했다. 암군의 계약자였으니 당연히 위험한 일이 있었겠거니, 하는데 시오한이 말하는 이유가 의외다.

“불치병?”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이어폰을 찾으며 이도하가 물었다. 원래는 그가 그냥 하는 말과 시오한에게 하는 말을 구분하려고 끼고 다니기 시작한 것이지만 이제는 필요 없었다. 그래도 슬슬 사람이 꽤 많은 곳에 갈 텐데, 그렇지 않아도 다들 절 쳐다봐 대니 혼자 주절거리기보다는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 없네. 쯧, 혀를 찬 이도하가 손을 대충 손을 휘둘렀다. 어느새 그의 손에 이어폰이 들려 있었다.

-그랬던 모양이야. 이곳에 와서도 계약자들의 힘으로 치료를 해 보려고 수소문을 했던 것 같지만 여의치가 않아서… 일리온은 암군에서 물러나며 보고를 올렸을 뿐이고, 자세히는 묻지 않았지.

“…그럴 수도 있겠네.”

계약자가 병으로 죽는 경우. 이도하가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특기자들은 제법 있지만,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특기자들은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정확히는 없는 걸로, 알려져 있다.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아마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그대는 건강해야 해- 이런 비슷한 말 한마디쯤은 할 것 같았던 시오한은 의외로 별말이 없었는데, 그 이유를 짐작해 보니 이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 일인지 몰라 이도하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사이 엘리베이터는 5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는 틈새로 시끄러운 농담과 웃음소리들이 새어 들어온다. 쫙- 문이 양쪽으로 갈라지자 냉큼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던 사람들이 우뚝 굳었다. 헉, 억, 힉, 갖가지 별 희한한 소리들이 다 튀어나온다. 커피를 마시고 있던 사무직원 하나가 이도하와 눈이 마주치고 켁, 목이 졸린 소리를 냈다. 사레가 들렸는지 곧 죽을 것처럼 콜록콜록 기침을 하기 시작한다. 이도하는 그 중 몇몇의 사원증을 확인했다. 홍보팀.

“오늘 인터뷰 일정 있죠? 어디예요?”

“예?”

우연히 가장 앞쪽에 있던 남자 직원 하나가 손가락으로 제 턱을 가리켰다. 지금 나한테 물어본 거야? 남자가 얼떨떨하게 주변을 둘러보았고, 그의 동료들이 한 발짝씩 그에게서 잽싸게 떨어졌다. 아니든 앞으로 나서게 된 셈인 남자에게 이도하가 다시 물었다.

“기자들 출입 신청한 걸로 아는데.”

콜록콜록! 사레가 들린 남자는 거의 토할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이 얼른 그를 옆으로 밀어버렸다.

“아? 아, 저기 3회의실이요.”

“감사합니다.”

이도하? 이도하 아니야? 맞는데? 눈 밑에 그거! 맞아, 개잘생겼잖아! 등등의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이도하는 그 3회의실로 향했다. 점심시간을 맞아 북적거리는 로비를 가로질러 가는 동안 수군거림이 파도처럼 사람들을 휩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도하는 금세 홍보팀 직원이 말한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이도하가 문을 열었다. 문고리는 소리 없이 돌아갔고, 문도 그렇게 열렸다. 회의실이라고 해도 20인 정도를 수용할 공간이라 강의실에 더 가까운 생김새였다. 문을 등지고 앉아 노트북을 펼쳐놓은 이들은 듬성듬성했고, 중간중간에 여러 대의 카메라가 세워져 있었다. 조용한 가운데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삭막하게 자각거리고 있다. 그들을 마주 보고 앉아 막 대답을 하던 참이었던 것 같은 남자가 이도하를 발견했다. 남자가 크게 숨을 들이켰고, 그 행동에 기자들이 뭔가, 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헉!”

이도하를 발견한 기자들이 귀신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기겁을 하고 놀랐다. 누군가는 무릎으로 테이블을 쾅! 쳤다. 억, 하는 신음소리가 울렸다. 제 무릎만 쳐다보고 있던 아이가 어깨를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

문 옆에 조용히 기대선 이도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뭘 잘못 본 사람처럼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신은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주 순식간에, 눈은 새빨갛게 달아올랐고 눈물도 차올랐다. 입술을 꾹 물고 시선을 이도하에게서 떼지 못했다. 이도하를 향해 카메라라도 돌릴 기세였던 기자들이 재빠르게 아이의 반응을 캐치했다. 이도하를 본 신은호의 드라마틱한 표정 변화로도 이미 드라마 열 편쯤은 써 내려간 것 같았다.

“계속하시죠.”

기자들에게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이도하가 말했다. 질문 하나 정도 던져볼까 싶어 간을 보고 있던 기자들은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이도하는 이 만만하고 좀 흥미로운 12살과는 달랐다. 그들은 이도하가 이 자리에 왔다는 소식 하나만이라도 가장 먼저 건진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어, 그러니까. 저기.”

잠깐 사이에 안색이 몹시 좋지 않아진 남자- 김대훈 원장은 방금 전까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새하얗게 잊어먹고 더듬거렸다. 그럼에도 타닥거리는 키보드 소리가 여기저기서 아주 맹렬했다. 기자들은 이미 김대훈 원장을 쳐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김대훈 원장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거무죽죽하게 가라앉았다. 얼마나 진행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이 인터뷰가 끝난 것은 누가 봐도 자명했다.

“은호야.”

이도하가 목소리가 넓게 퍼졌다. 신은호가 꾹 입술을 물었다. 어떻게든 참으려 한 모양이지만 결국 눈물이 뚝 떨어졌다. 기자들이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신은호와 이도하를 번갈아 보았고, 김대훈 원장이 입을 뻐끔거리는 순간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할래?”

이도하가 말했다. 키보드 소리가 사그라들더니 사위가 조용해졌다. 모두가 이도하나 신은호나 둘 중 하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신은호는 대답 없이 입만 꾹 다물고 있었으니, 누군가는 성질 급한 이도하가 곧 아이를 번쩍 안거나 해서 어디론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도하는 기다렸고, 숨 막히는 침묵도 계속 이어졌다. 마치 아이가 싫다고 하면, 알겠다고 수긍하고 그대로 갈 것 같았다.

“은호야.”

김대운 원장이 입을 여는 순간, 드르륵- 의자가 바닥을 긁었다. 일어난 신은호가 기자들을 지나쳐 이도하에게로 다가가는가 싶더니, 먼저 문을 열었다. 시선들이 죄다 아이를 따라갔고, 그중에 이도하의 것도 있었다. 이도하가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자 신은호가 먼저 그를 돌아보았다.

“안 와요?”

“…가.”

둘은 비어 있는 옆 회의실로 들어갔다. 방금 전의 회의실보다도 더 넓었다. 다행히 기자들은 이곳까지 따라오진 않았다. 이도하에게 등을 보인 신은호가 슥슥 얼굴을 쓸었다.

“뭔데요.”

“…할 말, 했냐?”

신은호가 홱 돌아섰다. 눈시울이 아까보다도 더 붉었다.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무슨 말이요?”

“방금 전에, 기자들 앞에서. 너 하고 싶은 말 했냐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요?”

“그건 네가 알아야지.”

“몰라요!”

신은호가 버럭 소리쳤다. 기껏 닦은 것이 무색하게 닭똥 같은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와락 달려온 신은호가 이도하를 밀쳤다. 신은호는 또래보다도 키가 작아 이도하의 가슴께에나 간신히 왔다. 힘껏 밀쳐도, 이도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아냐고!!”

“네가 알아야지 그럼 누가 알아.”

“시발, 모른다고!!!”

새빨갛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신은호가 이도하를 마구 쳤다. 작은 것도 주먹이라고 제법 아팠다. 이도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네가 해야 돼. 다음엔 해.”

“안 해!”

버럭 소리친 신은호는 이내 우아앙-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도하의 옷자락을 붙잡은 채였다. 이도하는 가만히 선 제 시선에는 머리 꼭대기도 걸리지 않는 신은호를 내버려 둔 채 텅 빈 것 같은 회의실을 보며 잠깐 망설이다, 손을 움직였다. 조그만 머리통이 그의 한 손에 다 들어왔다.

“꼬맹아, 내가 너 도와줄 수 있는 거 별로 없어. 나도 어른 아니고 아직 애라서, 모르는 거 천지야. 근데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건 있지 않냐.”

신은호가 뭐라 웅얼거린다. 엉엉 우느라 그런 건지, 뭘 말하려고 하긴 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무시한 이도하가 말을 이었다.

“너네 원장님, 진짜 좋은 사람 아니잖아.”

슥 내려간 이도하의 시선이 옷 위로 신은호를 훑었다. 이제 상처는 없다. 남은 멍 자국도 없었다. 그렇겠지, 아이의 보호자를 자청하며 무려 인소더블에게 맞서는 초라하지만 정의로운 약자 행세는 다 했는데 행여나 애 몸에서 생채기라도 발견되면 안 되니까. 하는 꼬라지를 봐서는 이도하가 한 거다,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일이 너무 커질 테고 그건 원장도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가 사라졌다고, 아프고 무서웠던 기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신은호도 알고 있었다. 김대훈 원장은 서글서글하고 수수하게 굴어 모두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신은호에게도 좋은 사람이어야 했던 것뿐이다. 수틀리고 화가 나면 때려놓고도 이건 네가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다, 하니 그저 그래야 했던 것뿐이었다.

“다르잖아, 모리온이랑은.”

울음소리가 더 커졌다. 그러더니 또 이도하를 마구 흔든다. 밀어내는 건지, 당기는 건지,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아마 저도 모를 것이다. 이도하가 다시 한 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 도움 필요 없어, 너 부자야. 좀 아껴 쓰면 대학 졸업할 때까지 알바 안 해도 돼. …아마.”

그 정도 되려나. 가늠해 보느라 이도하가 슬쩍 미간을 구겼다. 인소더블인 제게 시오한이 썼을 마력과 비교해서는 안 될 것 같다. 모리온은 계약주가 된 것만도 기적에 가까웠다. 아마 안 될 것 같은데… 그럼 몰래 좀 얹어주면 되겠지. 생각한 이도하가 더 말했다.

“그거만 내가 도와줄게. 네가 이때까지 모리온한테 받은 거, 그건 다 돌려받아야 할 거 아니야. 너 인마, 똑똑하니까 잘할 거야.”

더 브릿지의 그 든든하고 막강한 변호사 군단들도 내일 없이 구는 이도하의 뒷수습을 하는 것보다는 이 조그만 애의 권리를 찾아주는 쪽이 더 공부한 보람이 있을 것이다. 신은호가 또 뭐라 웅얼거렸다. 이번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으나, 아마 욕 같다. 거짓말쟁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것 같은데. 이도하가 픽 바람 빠지듯 잠깐 웃었다.

“이것 봐라. 이렇게 싸가지도 없고 하니까.”

모리온도 그걸 바랐을 거고, 뭐고 어쩌고 하는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네 계약주가 그렇게 되어 참 안됐다, 하는 얘기도 이도하가 할 말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게 전부였다.

“…거야.”

“뭐?”

“다시 갈 거라고. 다시 갈 거야.”

“…….”

이도하의 얼굴이 조금 가라앉았다.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어, 그는 가만히 이 어린아이의 조그만 머리꼭지를 바라보았다. 차라리, 그때처럼 널 가만두지 않겠다느니, 죽여 버리느니 하며 바락바락 떼를 쓰고 화를 냈다면 이런 기분은 들지 않았을 것 같았다. 이도하에게서 떨어진 신은호가 크게 숨을 들이켜며 그를 바라보았다.

“갈 거야,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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