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탕-!! 떨어져 내린 서류 더미에 심플한 책상이 펄쩍 뛰어오르다시피 했다. 실제로 바퀴도 없는 책상이 옆으로 조금 움직였다. 그에 그치지 않고 이도하는 그 위로 박스를 홀랑 뒤집었다. 안에 들어있던 것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조그만 것들이 찍 미끄러져 바닥으로 죄다 떨어진다. 놀라지도 않고, 그저 좀 황당한 기색으로 이도하를 쳐다보고 있던 주승현이 허리를 숙여 발치에 닿은 것을 주워 올렸다. 조그만 USB다. 이게 웬 거냐, 하고 물으려던 주승현이 허리를 피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이라의 집행 이사. 다음 대 총재로 가장 유력시되는 후보 중 하나. 이도하의 말마따나 꽤 높으신 분인 주승현은 사무실도 꽤 넓었다. 손님맞이용 소파와 탁자도 따로 있었고, 한편에는 자그만 주방도 있었으며 커피 머신도 있고, 나무와 다를 바 없이 크게 자란 커다란 화분에다가 햇빛이 가득 쏟아지는 통유리도 있다. 아무튼 유치원생 하나 데려다 놓으면 한 시간 정도는 떼쓰지 않고 재밌게 놀 수 있을 크기였다. 그런데 그 넓은 방이 단숨에 아주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커다란 통유리 아래로 수십 대의 컴퓨터 본체들이 내다 버린 것처럼 뒤엉켜 있는 데다가 아마 서류나 자료가 아닐까 싶은 종이 무더기들이 위에서 그냥 냅다 쏟아부은 것처럼 혼잡하게 퍼져 있었다. 게다가 양까지 어마어마해 보기만 해도 아주 질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고물상을 잘못 찾아온 모양이에요.”
잠깐 말문을 잃었던 주승현이 난감하게 말했다. 그런가, 하는 표정으로 주위를 한 번 둘러본 이도하가 산뜩하게 대답했다.
“잘 찾아왔는데요. 책상이 소박하시네, 이사님.”
웬 깡패 두목은 윤기 자르르 흐르는 원목 책상 좋은 거 쓰던데. 불에 잘 타는 거. 하기야, 책상이 싸늘하고 깔끔해서 정떨어지게 생긴 게 닮긴 했다며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물어봐야 할까요, 이게 뭔가.”
“눈 있고 손 있으면 직접 보면 되지. 분류고 뭐고 그냥 싹 다 털어왔으니까 알아서 걸러내든가 하시죠. 좀 많긴 한데, 원래 켕기는 거 있는 놈들이 그렇잖아요. 그래도 최연소 입사 타이틀 달고 있는 천잰데 그 정도야 껌이겠지. 안 그럽니까?”
“최연소 타이틀은 김윤혜 연구원한테 뺏겼는데요.”
“내 알 바 아니고요. 밥상 이만큼 차려줬으면 알아서 떠먹으세요.”
이도하가 까딱, 주승현의 손에 들린 USB를 턱짓했다.
“어차피-”
“어차피 실패할 실험이든 뭐든 그냥 지금 눈 뜨고는 못 봐주겠으니까. 어렵지 않다며, 막는 거.”
주승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게다가 장담하는 게 참 못 미덥기도 하고… 뭘 믿고 저러나, 싶잖아요. 똑똑한 인간들이니 또 무슨 기발한 수를 쓸지 모르는데.”
가늠하는 듯 웃는 듯하는 그 묘한 얼굴에 이도하가 비슷하게 마주 웃었다.
“내가 그때는 좀 제정신이 아니라서 일단 닥치고 들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그게 보통 개소리가 아니잖아요? 높으신 분은 어차피 또 쌀 거니까 똥 안 치우나 싶고. 아 이게 아닌가.”
방은 꽤 깨끗한 것 같은데. 이도하가 툭툭, 옷을 털며 주변을 획 둘러보았다. 건들거리는 자세가 금방 껌이라도 뱉을 것 같다. 옷에서 재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다시 주승현을 돌아본 이도하가 잘 모르겠다는 듯 말했다.
“지가 치울 일이 없어서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건가.”
“어딜 갔다 온 거예요?”
“진짜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거고.”
쾅!!! 책상이 다시 한 번 펄쩍 뛰어올랐다.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린 것은 거대한 곰의 머리였다. 잘린 부분을 마무리한 원목 판은 어디론가 날아가고 없고 너덜너덜해진 채였다. 불탄 냄새가 확 올라왔다.
“기념품.”
주승현이 약간 기가 막힌 얼굴로 눈썹만 까딱 올렸다. 이도하가 느긋하게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기대었다. 빙그레 웃는다.
“날 퍽이나 걱정하는 척 했으니까, 한 번 보여주시죠, 이사님. 행동하는 거.”
“다 죽였어요?
주승현이 물었다.
“글쎄요. 확인을 안 해서. 알아야 하나. 궁금하면 해외 뉴스 한 번 틀어 봐요. 대형 화재라고 나올 수도 있겠네.”
“계속 이러려고요?”
“왜요. 아, 걱정돼서?”
기자 회견하더니 다 때려치우겠다고 하고 독일로 훌쩍 나른다든가, 독일에 가서는 특별 수사국 요원들과 한바탕한다든가. 알겠다는 듯, 이도하가 눈을 접으며 웃는다. 사뭇 다정한 웃음이었다.
“누가 알겠어요, 공식적으로는 행방불명, 비공식적으로는 독일에 간 이도하가 생뚱맞게 러시아까지 가서 깡패 조져놨을 거라고는. 뭘 좀 알고 있는 인간들 말고는.”
모두 나라를 위해서였다는 그 계약 양도 실험에 레드 마피아의 ‘투자’가 들어가 있었다는 것, 그리고 레드 마피아가 인소더블의 계약주인 이리스티리움의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었다는 것. 뭐 그런 관계를 대충 짐작하거나 알고 있는 인간들이라면, 그래도 그 차가운 동토를 나름 주름잡고 있던 거대 세력을 하루아침에 모조리 뜯어놔 버린 게 인소더블일 수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아는 인간들이야… 경고라고 알아보겠지. 똑똑한 사람들일 테니. 안 그래요?”
모르면 좀 곤란하고. 이도하가 말했다.
“이사님 걱정처럼 엉뚱한 생각하면 안 되니까.”
눈높이가 같아진 시선이 허공에 부딪쳤다. 이사이기 전에 연구원이었던 사람이라 원래 습관이 그런 건지, 주승현의 시선은 꼭 상대방을 관찰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가늠하듯, 파헤치듯 하는 시선을 까만 눈동자로 마주 보며 이도하가 말했다.
“게다가 증거도 없잖아요? 백날 수사해 봤자 내가 그랬다는 흔적은 안 나올 테고, 그깟 뒷구멍 돈줄 좀 줄었다고 러시아가 짐작 따위로 인소더블 서운하게 하겠어요? 소리 소문 없이 장막도 넘고… 총 든 깡패들 다 처리해 준 인소더블인데.”
이도하가 몸을 바로 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행동이나, 옷차림이나, 가볍게 집 앞 산책이나 나갔다가 잠깐 들른 모습 같았다. 이도하가 까딱, 책상 위를 턱짓했다.
“이것들이야, 높으신 분이 힘 좀 썼다고 하면 납득하겠지. 내부 감사 열심히 돌렸다고 해요. 배신감 좀 느낄 테니 와 대단하다, 역시 집행 이사, 하면서 박수 쳐 주지 않겠어요?”
원래 뭐든 돌아섰을 때 더 무섭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나라를 위했다 어쩐다 하며 무릎 꿇고 눈물까지 줄줄 흘렸던 이태학이 그 불법 실험 자금을 러시아의 마피아한테, 자국도 아닌 외국의 깡패한테 투자 받았던 거라고 하면 뒤통수가 어지간히 얼얼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계약 양도라니… 그런 획기적이고 기똥찬 생각을, 하며 다들 좋아하고 있었던 참인데 의도가 너무 불순해 아무래도 이건 물 건너갈 것 같다, 하는 시늉이라도 하면 참 화가 많이 날 것이다.
“세상이 거지같이 생겨 먹어서 그렇게 안 되면 뭐… 그렇게 만들어 보세요.”
보육원 시설 원장도 하고, 다 늙은 이태학도 하는 언론 플레이, 대단하신 주승현 집행 이사님이 못 할까.
“아이라는 청렴한 연구시설 어쩌고저쩌고. 타이틀 괜찮네.”
이죽거리며 이도하가 돌아섰다.
“이도하군, 잠은 좀 잔 거예요?”
주승현이 물었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대답 대신 돌아왔다. 주승현은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걸어가네, 하고 중얼거렸다. 시선 아래쪽에 툭 튀어나온 곰의 주둥이가 걸려 있다. 주승현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넓고 깔끔한 그녀의 사무실은 여러 의미로 완전히 폭탄을 맞은 꼴이다.
“이러면 진짜 안 할 수가 없는데… 밤새야겠네.”
***
등 뒤로 문을 닫은 이도하는 잠시 그대로 멀거니 서 있다가, 곧 눈을 감으며 그가 문에 뒷머리를 툭 기대었다. 눈꺼풀 아래가 뻑뻑하고 뻐근했다. 주승현이 어떻게 나올지는 이제부터 보면 될 일이고, 지금 해야 하는 일은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할 것 같았다. 여러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 이도하가 후, 숨을 한 번 털어내고는 훌쩍 걸음을 옮겼다.
“시오한, 어디라고?”
집행 이사실은 사치스럽게도 한 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데다가 엘리베이터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복도 앞쪽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던 비서실 직원이 홱 지나가는 이도하를 보고는 어, 어?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옥상.
이도하가 미간을 구겼다. 엄밀히 말해서 옥상은 아니지만 그들 사이에 옥상이라고 하면 통하는 곳이 있다. 그런데 그게 보통 높은 곳이 아니다. 난간도 없는 데다가 거의 황궁 꼭대기라 아래가 아주 까마득했다. 아차, 하면 이미 저승으로 건너가고 끝날 높이다. 시오한이 검으로야 당할 상대가 없겠지만 거의 기적에 가까운 그 검술도 추락에는 장사 없을 게 틀림없다. 이도하는 상상만 해도 끔찍해 소름이 다 돋았다.
“혼자?”
-음, 그대가 없으니… 다른 이를 데려와야 했을까?
이도하가 잠시 입을 뻐끔거렸다. 군나르나 일리온이라면… 그는 잠시 시오한의 안전과 제 욕심 사이에서 갈등한 이도하가 솔직히 말했다.
“물론 그건 안 되지만, 안 가면 되잖아.”
-곧 들어갈게. 그대가 보고 싶어서 왔어.
“……”
이러면 참 할 말이 없다. 그래도 그쪽도 훤한 대낮이라고 하니. 팅- 그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이도하는 투명해서 화창한 바깥이 그대로 비치는 구름다리를 지나 본관으로 향했다. 아이라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는 연구동만 한두 개가 아니었는데, 집행 이사실이 위치한 연구동에는 와 본 적도 없는 이도하는 당연히 출입 자격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일리온, 그 사람은 어쩌다 당신 시종장이 됐어? 암군이었잖아?”
-계약자가 죽어서.
황제 직속 무력 집단인 암군과 형군은 전원이 계약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소문은 유명하지만, 실은 그보다 조금 더 했다. 계약주로서의 능력은 암군과 형군의 기본 조건이었다. 더 이상 계약주가 아니라면 물러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