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이도하는 무너진 벽의 잔해들을 넘어 방을 나섰다. 바닥이든, 깨진 벽돌 위든 그가 디디는 곳마다 바닥이 모자이크 조각으로 잘게 깨어져 파동처럼 둥글게 뻗어나간다. 쐐애애액!!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쇄도했다. 이도하가 허리를 젖혔다. 쾅!!! 방금 전까지 그의 얼굴이 있던 자리를 꿰뚫고 지나간 무언가가 벽에 처박혀 쨍그랑! 폭발했다. 어울리지 않은 파열음에 이도하가 미간을 좁혔다. 천장으로 번져나가는 불길에 붉게 비추어진 것은 사기 파편이었다. 둥그런 손잡이 파편이 남아 있다.
“컵?”
쐐애애액-!! 다시 소리가 쇄도했다. 전투기라도 날아오는 소리 같았다.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쾅!! 허공을 꿰뚫고 쏜살같이 날아오던 것이 도중에 쾅! 터져 나갔다. 쐐애액-!! 소리가 연이어진다. 쾅! 쾅! 허공에 불꽃놀이처럼 모조리 터져 산산이 비산하는 파편을 사이를 뚫고 인영이 낮게 몸을 숙인 채로 달려들어 이도하를 덮쳤다. 뒤엉킨 두 인영이 바닥을 굴렀다.
콱! 군용 대검이 이도하의 목을 스쳐 바닥에 틀어박혔다. 덥수룩하게 긴 짙은 금발이 이도하를 향해 쏠렸다. 두껍게 자란 수염이 남자의 입매를 가렸다. 일반적인 벽안에 비해 기이한 푸른 빛- 섬광에 물든 눈동자가 일그러져 있다는 건 알겠다. 두꺼운 손이 이도하의 머리를 내리누르고 있었다.
“마피아는 죄다 까까머리인 줄 알았더니.”
남자의 손가락 사이로 이도하가 비죽 입 꼬리를 틀어 올리더니,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까만 눈동자 위로 불꽃이 일어나듯 섬광이 일었다. 남자의 눈에 순간적인 공포가 어렸다.
“기분 나쁘게.”
우직! 남자가 대검을 뽑아냈다. 주변의 공기가 빨려 들어가듯 칼날 주변으로 휘감겼다. 칼날의 테두리가 흐릿해지며 가열된 것처럼 일렁거린다. 이도하의 신형이 사라졌다. 쐐애액! 공기를 찢어내며 총알처럼 쏘아진 대검이 이도하가 있던 자리에 틀어박혔다. 동시에 남자가 컥,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느새 그의 등 뒤에 올라탄 이도하가 덥수룩한 금발을 감아쥐고 고삐처럼 당겼다. 이도하가 손을 들며 새파란 눈으로 남자를 훑었다. 바닥에서 뽑혀 나온 검이 이도하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대로 그가 남자의 허벅지에 대검을 쑤셔 박았다.
<끄아아악!!>
“문신 더럽게 많네.”
옷을 투과한 시선에, 대검으로 정확하게 쪼개진 남자의 계약명이 흐려져 사라지는 게 보인다. 이도하가 몸을 일으켰다. 푸른 시선이 제 허벅지를 붙잡은 남자의 손목으로 향했다. 옷을 뚫고, 피부 너머 힘을 잔뜩 주느라 팽팽하게 당겨진 선홍색 근육을 본다. 근육이 움칠 떠는 순간, 뭉텅 잘려나갔다.
<아아악!!>
계약자가 아니게 되었다고 해서, 특기자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 이도하가 제 손으로 얼굴을 훔쳐냈다. 탕-!!! 이도하의 고개가 꺾였다. 그는 제 발끝으로 도르륵 굴러가는 찌그러진 탄환을 바라보았다.
틈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드드드드-!! 지진이 난 것 같은 총알소리가 쉴 새 없이 퍼부어졌다. 대중없이 마구 쏘아대는 것에 벽이 뜯어지고 폭발하고 바닥이 깨져 나가며 사방으로 파편이 비산했다. 그 파편들을 딛고 달려든 것처럼 꺾인 얇은 빛줄기가 순간적으로 번쩍하고 나타난 순간, 쾅!!! 불꽃이 폭발했다. 그 속에서는 아무것도 온전히 남아날 수 없을 것처럼 거대한 폭발이 이도하의 신형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우우우웅- 이명이 울렸다. 공기가 진동하며 허공이 흐릿하게 번진다. 쐐애애액!!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방금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고막 위로 손톱을 긁어내리는 것 같은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 번 폭발한 후 조금 사그라들기는커녕 불길과 합쳐져 더 새빨갛게 타오른 불길이 뚫고 총알이 쏘아져나갔다. 컥-! 꼬꾸라지는 누군가를 관통하고도 짓쳐 나가 쾅! 벽을 박살낸다.
허공에 붉게 남은 궤적이 잔영으로 번져 사라지기도 전에, 불길 속에서 수십 개의 총알이 줄기줄기 쏘아져나가기 시작했다. 별똥별이 궤적을 수놓듯 어둠 속에 붉은 궤적이 수없이 그어졌다. 쾅-! 콰강!! 벽이 무너져 내리고 천장이 우르르 쏟아져 내린다. 싸늘한 바깥 공기가 확 밀려들었다.
불길이 몸을 부풀리더니 공기를 잡아먹듯 위로 솟구쳐 올랐다. 우르르- 뒤쪽에서 또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울부짖듯 울린다. 화약 연기 사이로 어른어른 그림자가 비쳤다. 이도하였다. 그는 머리를 털어내며 바닥에 쓰러진 인영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누군가의 손끝에 아직 걸려 있는 기다란 자동소총을 주워 올렸다. 깡패들이 자동소총을 갈겨대고, 뭐 이런 되먹지 못한 나라가 다 있냐.
그가 엎어진 남자의 등허리를 밟았다. 치이익- 달아오르는 소리가 났다. 이미 정신을 잃었으면서도 남자에게선 억눌린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인두로 지진 것처럼 눌러 붙은 자리에 계약명 따위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이도하가 입술을 비틀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짜증난 표정이었다. 뭔가 잔뜩 억누른 것 같은 얼굴로 남자를 짓밟고 서 있던 그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넘실대는 불길 사이로 새까만 밤하늘이 보인다. 꽉, 쥐어진 손끝이 새하얗게 변했다.
덜덜덜 저택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불꽃이 기이하게 일렁거리다 새하얗게 변한다. 입술을 깨문 이도하가 질끈 눈을 감더니 머리를 흔들었다. 진동이 멈추었다. 발밑에서 쉴 새 없이 파동처럼 흔들리던 조그만 모자이크 조각이 일순 사라지더니, 쫙 뻗어 나가 사라졌다. 그가 눈을 떴다.
비특기자가 마흔다섯, 남은 특기자가 열일곱. 그중 계약자가 셋. 또 그중에… 이도하의 모습이 사라졌다.
크게 뜬 연갈색 눈동자가 이도하를 바라본다. 이도하가 자동소총을 휘둘렀다. 긴 총신이 얼굴을 후려치는 대신 캉-! 쇳소리를 내며 허공에 막혔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친 것 같았다. 이도하가 두어 발자국 물러서며 총을 내던졌다. 까만 눈동자에 섬광이 번뜩임과 동시에, 쾅!! 그 자리에 거대한 샹들리에가 곤두박질쳤다.
화려한 파열음이 산산이 부서지고 불길을 반사하며 허공에 떠오른 반짝이는 유리 파편들 틈으로, 쪼개진 거울 뒤에 선 것 같은 남자의 모습이 일부 드러났다. 캘리포니아 지진이 닥쳤던 날, 천 년 전의 소환진이 남은 지하 감옥으로 이도하가 잘못 소환되었던 날, 그곳에 있었던 마피아 중 하나. 제 계약주를 살해한 계약자.
“류드렌.”
이제는 사라진 이름을 부르며, 잔뜩 떠오른 유리 파편들 틈으로 이도하가 달려들었다. 보이지 않게 유리된 공간이 소리 없이 와장창 깨어졌다. 멱살을 틀어쥔 이도하가 그를 당기며 대뜸 머리를 들이받았다. 콱!! 류드렌의 코에서 피가 터졌다. 허공에 반짝이는 유리 파편들 틈으로, 잠깐 시선이 마주쳤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절 바라보는 눈을 보며 이도하가 말했다.
“야, 발은 괜찮냐?”
류드렌의 눈에 푸른빛이 일렁이는 순간, 이도하가 그의 발등을 짓밟았다. 콱- 이도하의 뒷머리를 잡아채며 류드렌의 눈에 섬광이 번뜩였다. 파삭-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뿐이었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류드렌이 재빨리 몸을 밀어붙였다. 키는 비슷했지만 몸집은 어찌나 큰지 이도하보다 무게가 두 배는 더 나갈 것 같았다. 바로 뒤가 긴 계단이었다. 쾅! 바닥으로 엎어진 두 사람이 계단을 굴렀다.
가장 아래까지 떨어지자마자 류드렌이 이도하를 타고 올랐다. 두꺼운 손이 이도하의 목을 졸랐다. 그러나 그는 금세 그게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대리석 기둥을 쥔 것처럼 조금도 졸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를 악문 그의 눈에 한 번 더 섬광이 번뜩였다. 파삭- 또 설탕 부서지는 것 같은 소리만 났다.
“아, 이거?”
이도하의 눈에 조그만 푸른 불씨가 튀었다. 류드렌의 가슴- 심장 위의 옷이 사라졌다. 살점도 얇게 도려낸 듯 사라졌다. 원래부터 그 부분은 없었던 것처럼 아주 깔끔하고 네모나게. 잠시 상황파악이 안 되는 듯 훤히 붉은 살점이 드러난 그곳은 울컥, 피를 쏟아냈다. 헉, 류드렌이 허겁지겁 제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도하가 홱 몸을 뒤집으며 얼굴을 후려쳤다. 애써 막은 손 너머로 튄 피가 이도하의 얼굴 위로 흩뿌려졌다.
<으아아아-!!>
널브러진 류드렌이 괴성을 내지르며 이도하의 팔을 잡고 밀어붙였다. 쾅-! 소파 등받이에 부딪친 이도하의 몸이 소파 위로 넘어갔다. 그 위로 덮치는 류드렌을 이도하가 걷어찼다. 와중에도 이도하를 붙잡아드는 손길에 그가 아래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퍽-!! 두꺼운 주먹이 이도하의 얼굴을 갈겼다. 제 힘에 못 이겨 휘청거리는 류드렌의 목에 팔을 감아 이도하가 몸을 돌렸다. 허벅지를 밟고 업히듯 올라타자 남자가 앞으로 꼬꾸라진다. 이도하가 그 뒷머리에 무릎을 박아 넣었다. 콰득-! 부러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우웅-!! 파동이 그들을 덮쳤다.
시야가 점멸했다. 순간적으로 이도하의 고개가 확 꼬꾸라졌다. 이도하가 비틀, 바닥을 짚었다. 머리가 띵하고 무겁다. 탕-!! 아직 사방에는 여러 인원들이 있었는지 다시 총소리가 퍼부어졌다. 총알이 사방을 부수고 터트려대며 난사된다. 거대한 사자 동상이 허공에 나타나더니 이도하를 향해 뚝 떨어졌다. 이도하가 몸을 굴렸다. 쾅-!! 사자 동상이 폭발하듯 박살내며 대리석 바닥을 깨부수고 처박혔다. 근소한 차이로 압사를 피한 류드렌이 바닥을 기었다.
웅-! 파동이 한 번 더 일었다. 다시 눈앞이 까매진다. 이도하가 꽉 주먹을 쥐었다. 우우웅- 이명이 다시 울렸다. 콰르르릉-!! 거대한 무언가가 천장을 부수고 처박혔다.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땅이 흔들렸다. 이미 다 부서져 가는 저택 전체가 흔들렸다. 더 버티지 못한 천장 전체가 우르르 무너져 내리고 하늘이 완전히 드러났다. 저택 한 가운데 꽂힌 것은 무려 거대한 장갑차였다!
“깡패가 자동소총에, 장갑차에, 시발 나라 꼬라지하고는….”
머리를 털며 비틀, 일어난 이도하가 피가 터진 입가를 쓸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장갑차로 끝이 아니었다. 쾅-!! 이번엔 샛노란 스포츠카가 허공에서 뚝 떨어져 와장창! 저택을 산산조각 냈다. 쾅-! 콰강-!! 저택의 차고 어디엔가 보관되어 있던 값비싼 차들이 허공에 나타나더니 그대로 후두두둑 저택을 박살내며 죄다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창이 꽂히듯 사방으로 처박혀 쾅-! 폭발한다. 여기저기서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흡사 전쟁이라도 터진 것 같은 굉음이었다.
이도하가 머리를 감싸 쥐고 옴짝달싹도 못한 채 웅크리고 있는 류드렌에게 다가갔다. 눈앞에 다가온 스니커즈에 류드렌이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엇나간 얼굴로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린 이도하가 고개를 숙였다.
<말도…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이도하가 빈손을 어딘가로 뻗었다. 피 묻은 대검 손잡이가 그의 손아귀에 잡혔다. 류드렌의 종아리를 밟은 이도하가 그것을 그의 발에 꽂아 넣었다. 아아악-! 아마 그렇게 비명을 질렀을 테지만 폭발하는 소리에 묻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우르르- 또 어딘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도하가 허리를 폈다.
“어, 내가 할 줄 아는 게 그거야.”
툭툭, 바지를 털어낸 이도하가 몸을 돌렸다. 다음 순간에, 이미 그는 싸늘하게 눈송이가 떨어져 내리는 바깥에 서 있었다. 활활 타오르는 저택이 까만 밤하늘까지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크던 불에다가 연료가 가득한 차까지 죄다 집어 던져버렸더니 아주 미친 듯이 타오른다. 이도하는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터진 입가와 어느샌가 유리에 베여 피가 배어 나오고 있던 얇은 상처가 스르륵 사라졌다.
저택은 이미 형체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터트려버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이도하는 복잡한 얼굴로 한동안 묵묵히 서 있다가, 대충 팔로 얼굴을 닦아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던 눈송이가 눈 위에 남은 발자국 위로 녹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