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152화 (152/250)

152화

<소환!! 소환되지 못하게 하려고! 오즈에 못 가게 하려고!!!>

남자가 다급히 외쳤다. 조용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남자가 헐떡거렸다. 정적이 이어지자 남자가 서둘러 외쳤다.

<사업이 많아! 오즈와 관련된 사업이 많은데, 황제의 계약자가 인소더블이면 방해가 될 일이 너무 많으니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죽이려고 한 거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성공하면 인소더블인 다, 당신은 다시는 오즈에 갈 수 없으니 가치를 따지면 감당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돼서- 인소더블을 직접 제거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인간인 황제를 제거하는 게 더 쉽고, 인소더블도 오즈에서는 마력 제한이 있으니 끄아악!!!>

“…좀 짜증나서. 실수. 또?”

이도하가 피가 튄 손을 털었다. 남자가 급히 입을 뻐끔거렸으나 꾸르륵- 목구멍에 피가 끓는 소리가 나며 피거품만 맺힌다. 이도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지만 컥컥 기침을 한 남자가 끓는 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죽으면 제국이 혼란스러워질 테고 그럼 전쟁을 일으키기도 쉬우니까!!>

“전쟁?”

처박힌 남자를 내려다보는 이도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잠깐 사이에 눈치가 귀신같이 빨라진 남자가 얼른 대답했다.

<계약주가 늘어나니까!!!>

“…기똥차네 진짜.”

이도하가 느리게 말했다. 시오한은 후사가 없다. 언젠가 말했던 대로 황후도 없고, 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 황실 어른도 없다. 그 너른 궁에 황족이라고는 그 하나뿐이다. 이리스티리움이 아무리 단단한 대국이라 해도 황제가 급작스럽게 암살을 당하면 나라는 혼란스러워질 테고, 틈을 비집고 들려 할 나라도 분명 있을 것이다.

없다 해도, 만들어 내겠지. 혼란은 힘을 필요로 하고, 기원도 늘어날 것이며, 더 많은 계약주가 탄생할 것이다. 계약자가 많아진다는 말은, 마력 수급이 더 많아진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들 어찌나 그리 똑똑하고 기발한지. 이도하가 비소를 머금었다. 그래, 과연 황제를 죽이면 그렇게 될 것이다.

‘신은호, 그 애를 보니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세상은 원래 이런 모양이었어요, 이도하군.’

정말 그런가 보다. 저만 몰랐을 뿐, 내도록 이 모양이었나 보다. 전쟁을 일으켜 계약주를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만든다는 발상을 이제 와서 번쩍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도계약, 계약 양도, 다 그렇게 이어진 것이다. 쭉 이래 왔던 것이다. 서로의 세계에는 간섭할 수도 없고, 간섭하지도 않는 걸로. 어차피 계약자의 모든 흔적은 오즈에서 지워지며, 이곳 세계에는 마력 외에 달리 넘어올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건 별로 어렵지 않은 걸로- 그런 건 다 그냥 눈 가리고 아웅이었을 뿐.

이도하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남자를 내려다보는 동안 남자는 침묵에 눌린 것처럼 더 가쁘게 숨을 헐떡인다. 콰직!! 남자의 다리가 기이한 각도로 비틀렸다.

<아아아- 으으읍!!!!>

콱! 남자의 이가 맞부딪히며 턱이 우그러들었다. 입술 사이로 피거품이 새어 나오고, 눈이 돌아간다. 이도하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손에 묻어있던 피와 땀이 먼지처럼 화해 떨어져 내렸다. 살려달라 빌고 싶은 건지, 이도하를 붙잡고 싶은 건지, 아니면 고통스러워 그저 버둥거리는 건지, 남자가 손을 휘젓는 모습을 바라보던 이도하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벽에 걸려 있던 곰의 머리가 진동하는가 싶더니, 쾅-!!!! 폭음이 울렸다. 벽이 터져나가고, 파편들이 방 안을 휩쓸었다. 탕탕-!!! 총성이 이어졌다. 깜깜해진 어둠 속에서 불빛이 번쩍였다. 쉴 새 없이 퍼붓는다. 미친 듯이 퍼붓던 총성이 어느 순간 우뚝 멈추었다. 짙게 퍼진 화약 연기가 긴장된 숨소리로 가늘게 흔들린다. 우웅, 옅은 이명이 울렸다. 파칸- 보스의 방에 이변이 일어난 것을 눈치채고 들이닥쳤던 조직원들은 어둠 속에서 불꽃이 피어나듯 새파랗게 번진 눈동자를 마주했다.

콰직-!! 깜깜한 어둠 속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숫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 쾅-!!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고, 그 순간 침묵이 깨어지며 고함소리가 울렸다. 끼이익- 칠판을 긁는 것 같은 얇은 쇳소리가 났다. 뇌가 진탕되고 단숨에 속이 뒤집힐 것 같은 소리였다. 동시에 창문 하나 없는 실내에 가벼운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바람도, 소리도 금세 뚝 멈추었다. 컥, 목 졸린 소리가 나더니, 부우욱!! 또 뭔가 뜯어지는 소리가 뒤를 잇는다. 으아아악! 비명소리가 터졌다. 홱! 날카로운 것이 허공을 가르다가 콱 우그러졌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온갖 소리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조용해졌다.

저벅저벅, 발소리에 탱그르르, 둥그런 쇳덩어리가 굴러가는 소리가 울렸다. 팍, 바닥에서 불꽃이 튀었다. 무너진 벽난로로부터 쏟아져 나온 잿더미 속이었다. 촛불처럼 아주 조그만 불빛이 사위를 밝혔다. 피가 진득하게 흐른 바닥, 무너진 벽의 잔재 위에 죽은 듯 널브러진 인영, 팔을 부여잡고 신음하는 형체를 어렴풋이 비춘다. 이도하가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발끝에 총알이 채여 굴러간다. 방금 탄창에서 그대로 꺼내 탄환만 분리한 것처럼 흠집 하나 없었다. 남자는 폭발한 벽의 잔재로부터도, 쏟아졌던 총알 세례로부터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였다.

이도하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난리통을 헤쳐 나온 것 같은 몰골이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머리에는 나뭇조각과 먼지가 달라붙어 있었으며, 가운은 반쯤 벗겨져 있다. 안에 입은 부드러운 실크 소재의 옷은 피와 땀으로 남자의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혈색이 제법 좋았던 얼굴은 눈물과 피, 침으로 범벅이 되어 있다. 괴이하게 비틀린 다리도, 손도, 덜덜 떨고 있다. 이도하를 바라보는 눈은 눈물이 고여 있다. 마피아고 뭐고, 이렇게 보니 그저 나이 좀 든 남자일 뿐이다.

“인소더블이 제 세상에서는 깽판 칠 줄 생각 못 했나 봐.”

참 사람들이 이상하지.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그렇게 입도 손도 아프도록 떠들어 대는 인소더블인데, 그들이 본 것처럼 쓰나미도 그냥 멈춰 세우고, 도시 하나 규모의 빌딩들을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두며, 세계 반대편에서 위험에 닥쳐도 힘들지 않게 구하러 갈 수 있는 힘이고, 그렇지 않으면 잘못이 되는 힘인데. 제 한 몸 희생해서 모든 이들을 도와야 하지만, 정작 이런 식으로는 굴지 못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혼자서도 나라 하나를 굴리는 마력으로야 소환이 되는 몸인데. 그들 말마따나, 그가 하고자 하면 누구든 막을 수가 없다는 힘인데. 왜 저가 마땅히 상식에 맞춰서 굴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안 그럴 이유가 없는데. 안 그래?”

벽에 비친 이도하의 그림자가 흔들렸다. 그의 뒤에서 미동도 없이 타오르던 조그만 불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가느다란 불꽃의 끄트머리가 둥그렇게 부풀어 오르는 순간- 봉우리가 터지듯 불꽃이 거대하게 치솟아 올랐다.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뜨거운 열기가 방 안을 잠식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거대한 뱀이 머리를 움직였다. 스치는 곳마다,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망연히, 불꽃을 뒤에 둔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대부분 안 죽을 거야. 목숨 정도는 붙어 있겠지.”

새까만 눈동자가 무심히 남자를 바라본다. 그가 말했다.

“그 목숨값 다 해 봐야… 내 황제를 건드린 대가가 되겠어?”

얼핏, 그가 한쪽 눈가를 찡그렸다. 별로 안 좋아할 것 같고… 중얼거리는 이도하의 뒤로 새빨간 화염이 저택을 불사르고 있다. 이도하가 조금 허리를 숙였다.

“버러지처럼 살으라고. 꽤 대단하고 부유했던 옛날이나 추억하면서, 길바닥에서 굴러.”

이를테면 표지판 같은 것이다. 감히 인소더블의 계약주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그 인소더블이, 제 세상에서도 어디까지 굴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능하면 자살 같은 건 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 봐. 그래도 여태 일궈놓은 게 있는데 다시 재기할 수도 있잖아.”

그가 사는 이 저택은 꽤 보안이 철저하게 되어 있었다. 이도하는 별로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희한한 특기를 가진 특기자들도 많았고, 최첨단으로 무장이 되어 있었으며, 보안 알람도 아주 철저했다. 깡패들의 저택이지만 공권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알람도 되어 있었다. 다 소용없었을 뿐. 무엇이 있든, 어디에 있든. 몇 번이고 그럴 것이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남자가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는 이도하가 제 말을 다 알아듣는지도 몰랐고, 이도하가 뭐라고 하는지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조는 무미건조해 고저도 없었다. 그는 당장 제가 이 저택을 태우기 시작하는 불길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건지, 이도하가 당장 저를 죽이려는 건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어찌 됐든, 이도하에게는 다 상관없었다. 허리를 피려던 그가 잠시 멈칫했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남자를 바라본다. 까맣게 가라앉았던 눈이 푸른빛으로 물들었다.

[<넌 못 죽어. 늙어 죽을 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쳐야 될 거야. 알아들어?>]

기이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남자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원래 푸른 눈동자에 기이한 푸른빛이 맴돌다 스며들 듯 사라졌다. 여전히 울면서,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푸르게 돋았던 섬광이 사라지고, 이도하가 다시 허리를 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멀어졌다. 남자는 불길이 타오르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우르릉, 무너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