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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51화 (151/250)

151화

<어, 어떻게->

물이 꽉 들어찬 것처럼 묵직한 위압감이 방을 가득 채웠다. 질식할 것처럼 의자 손잡이를 새하얗게 쥔 채 얼어붙어 있던 중년의 남자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내리깐 눈은 여전히 이도하가 어깨를 짚은 이에게 꽂혀 있다. 이도하가 손을 미끄러트렸다. 작살에 꽂힌 듯 꼼짝도 못 하는 이의 팔을 타고 내려가, 소매를 잡고 걷어 올린다. 손등 아래쪽, 손목에 반듯하게 적힌 검은 글자가 드러났다. 주변으로도 다른 문신들이 있었으나, 이건 달랐다. 유독 또렷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계약자네.”

이도하의 손끝이 닿은 제 계약명을 보며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던 사내는, 바로 옆에서 절 바라보고 있는 검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사내가 숨을 들이켰다. 계약명을 쥐듯, 이도하의 손끝이 남자의 손목을 파고들었다. 북- 무언가 뜯어지는 소리가 났다.

<으아아아아악!!!!>

비명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사내가 바닥으로 꼬꾸라졌다. 손목을 감싼 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바르작거렸다. 이도하가 손에 쥔 것을 바닥으로 툭 내던졌다. 뜯어진 살갗이 고깃덩어리처럼 철퍽 떨어졌다. 뜯겨진 살갗 위의 계약명이 흐리게 번지더니, 이내 물에 씻겨나가듯 사라졌다!

<아, 안 돼! 안 돼! 악!!!>

“시끄러워.”

손을 턴 이도하가 시큰둥하게 사내의 다리를 밟았다. 계단 위로 올라서는 것과 다름없는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우드득! 뼈가 으스러졌다. 아악!!! 차마 손목을 잡지도 못하고 덜덜 떨던 사내가 다시 새된 비명을 질렀다. 이도하가 지그시 발을 틀었다. 푸르스름한 안광이 도는 눈동자가 무심하게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이도하를 보며, 사내가 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 청소. 미뤄 놨었거든.”

으스러진 사내의 다리에 발을 올린 채로, 이도하가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 모를 말을 했다. 목소리는 산뜻했으며, 심지어 대충 듣기에도 다정하기까지 하다. 벌떡 일어나 분분히 몸을 피했을 뿐 섣불리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서로 눈빛만 교환하고 있던 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의자에서 일어나지조차 못한 중년의 사내의 뺨을 타고 흐른 땀방울이 똑, 책상 위로 떨어진 순간, 노이즈가 낀 듯 그의 신형이 깜빡했다. 헉! 남자가 숨을 들이켰다. 어느새 이도하의 눈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레도 좀 잡고, 버릴 건 버리고 해야지.”

쾅-!! 남자가 앉아 있던 의자가 폭탄이라도 맞은 것 마냥 터져나갔다. 이어 값비싼 검은 빛의 흑단나무 책상도 터지고, 책상 앞으로 놓여있던 의자들이 줄줄이 다 터져나갔다. 뾰족하게 찢어진 나무 파편이 총알처럼 사방으로 쏘아졌다.

“아, 뭐. 내가 특별히 더럽거나 해서 그런 건 아니고 우리 집 주택이라서. 보여준 적 있잖아?”

이도하의 주위로 나무 파편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피 냄새가 물씬 풍긴다. 한 바탕 폭발이 휩쓸고 난 자리에는 파편들이 폐허처럼 널브러져 있다. 여기저기에 쓰러진 형체들이 신음을 흘린다.

폭발의 여파로 아예 튕겨나가 버린 중년의 남자는 벽난로 근처에 엎어져 있었다. 성큼 다가간 이도하가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들더니, 그대로 반대편 벽으로 던져 버렸다. 키도, 덩치도 이도하의 두 배는 될 법한 남자가 인형처럼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컥-!! 피를 토해낸 남자가 꿈틀거렸다. 아으으- 남자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을 토했다. 고개를 들던 남자는 푸르스름하게 빛이 도는 눈을 다시 마주했다.

“거기 우리 아버지가 지은 곳이라서 이사 안 해. 그대로야.”

몸만 이곳에 있을 뿐, 정신은 다른 곳에 있는 듯 여상하게 말하는 주제에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남자를 옭아맨다. 남자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왔다. 개중엔 특기자도, 비특기자도 있었으며 눈 하나 깜짝 않은 채 사람을 조각내고 내장을 도려내는 망나니도, 명령 하나만 내리면 수천만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권력자도 보았지만 이건 달랐다. 이건….

“마피아도 별거 없네.”

중얼거리듯 말하며, 이도하가 수류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난장판이 된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레드 마피아, 러시아 마피아- 저택의 규모나 이 방 안을 꾸며놓은 행색은 무슨 영화처럼 묵직한데. 이도하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도약을 시도하려다 실패한 중년의 사내가 그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벌벌 떨고 있었다.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 공포에 질려 이제 아픔 같은 건 잠깐 잊어버린 것 같다.

“웅장한 모습 정도는 보여줄 줄 알았더니.”

저를 보고 놀라지도 않는다든가, 놀라기는커녕 담배라도 내민다든가, 역으로 거래를 제안한다든가, 위협을 한다든다, 마지막까지 엿 먹이려고 한다든가 어쨌든 뭐가 좀 달라야 할 게 아닌가. 어차피 깡패라지만 그래도 동네 양아치들과는 달리 나름 대접받는 깡패들일 텐데. 정계에다가 선 대놓고 무기 팔고, 카지노 세워서 돈 빨아먹고, 사람 잡아다 인신매매 하고… 아쉬운 특기자들 꼬셔서 유도 계약하게 만들고, 마력 빼돌리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계약도 팔아먹을 생각이었으니. 그 정도 규모로 해쳐먹고 배불리는 새끼들이면 그래도 정말 영화처럼 위엄이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말이다.

콰직- 바닥에 널브러진 파편들을 밟고 이도하가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도하가 다가오는 것이라도 막아보려는 것처럼 양손을 들었던 남자가 덜덜 떨리는 손을 빌듯 마주 댄다. 순간 이도하가 멈춰 섰다. 남자가 눈에 희망이 맴돌았다. 그래, 그들을 이런 식으로 다 괴멸시켜 버리는 건 무모하고 미친 짓이다. 필요한 게 있을 것이고- 순간적인 공포에 빠져 아무것도 생각하지 못했던 남자가 그래도 이도하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때였다.

슬쩍 고개를 돌린 이도하가, 씩 웃었다. 무심하던 얼굴에 벽난로의 불꽃이 단순에 달려든 것처럼 온화함이 번진다. 석고상 같던 얼굴이 풀어지고, 유독 서늘한 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진다. 어깨까지 작게 흔들며 이도하가 소리 없이 웃는다. 그가 말했다.

“와, 방금 좀 아저씨 같았다.”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이도하가 다시 남자를 돌아보았다. 푸르스름한 눈동자에 불꽃이 피어나듯 푸른빛이 확 번졌다. 이도하의 발밑이 물결치듯 일그러졌다. 그가 딛고 선 곳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파장이 확- 뻗어나가는 것과 동시에 줄줄이 네모난 조각들로 깨어진다.

“변태 같았다고, 이 양반아.”

여전히 웃으며, 이도하가 파편을 밟고 다가왔다. 단단히 밟는 자리마다 동심원의 물결이 치듯 바닥이 조그만 모자이크로 깨어져 크게 퍼졌다.

“이걸 물어봐야 하나. 그냥 같다고 하자, 상상하기 무서우니까.”

웃음을 터트린 이도하가 남자의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확 끼치는 비릿한 피 냄새에 조금 미간을 구기며 이도하가 손가락 끝으로 남자의 머리를 두드렸다.

“할 말 많지? 말해. 글쎄, 그거야 당신 마음먹기 나름 아닌가. 나야 당신이 마력 끊으면 그냥 물몸 되잖아?”

웃음기가 남은 얼굴이 까딱 고개를 기울이며 서늘하게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도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시선과는 달리 어조가 몹시 부드럽다. 이어폰이라도 끼고 있으면 통화를 하는가보다, 할 텐데 그것도 아니니 몹시 혼란스러웠다. 러시아어를 모를 이도하가 제게 하는 설득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남자는 희망을 가진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이도하가 다시 웃었다. 시선은 여전히 남자에게 꽂힌 채였다. 툴툴거리는 것 같아도 사뭇 다정한 어조로, 부드럽게 눈가가 휘어있으나, 싸늘한 눈빛으로.

“허락은 무슨. 뭘 하려고. 얼른 잠이나 자. 보고 싶으니까.”

이도하의 손끝이 톡, 톡 남자의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잠깐, 그의 눈빛에 온기가 감돈다.

“…잘 자, 시오한.”

그리고 거짓말처럼, 그 모든 것이 사라졌다.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이 무미건조했다. 무심하게 바라보는 눈길이, 마치 손끝으로 개미를 건드리고 있는 것처럼 건성이다.

“말하라고.”

<자, 잘못->

툭, 이도하의 손끝에 조금 힘이 실렸다. 간신히 시선이나마 들고 있던 남자의 고개가 조금 더 꺾였다. 남자의 시선이 이도하의 신발 끝으로 떨어졌다. 앞코가 조금 닳은 평범한 운동화였다. 다리에 약간 붙는 청바지에 어울리는 캐주얼한 신발이, 눈앞에 있는 이가 고작 20대 초반에 불과한 청년이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칼날의 예기처럼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사라지자 치욕감과 모멸감이 조금씩 고개를 든다. 손끝이 새하얗게 되도록 꽉 주먹을 쥐며, 남자가 이를 악물었다.

“쓸데없는 헛소리 하지 말고 필요한 말만 해.”

남자는 이도하의 한국어를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깟 동양의 자그만 나라의 언어 따위를 그가 알 리가 없었다. 한국어는 물론이고, 타국의 언어 따위를 남자가 알아야 할 일이 없었다. 많은 것을 겪었고 넘어왔지만, 이런 수모도, 처음이었다. 까득-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렸다. 까딱, 눈썹을 올린 이도하가 손을 폈다.

쾅-!!!

<크악-!!>

쩌쩍- 갈라진 나무 바닥이 그 위로 처박힌 남자의 머리를 찔렸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흐른다. 반사적으로 남자의 눈에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남자의 머리를 바닥에 짓누른 이도하가 무심히 말했다.

“괜찮아, 말 안 해도 돼. 그냥 다 뽑아갈 수도 있어. 내 기분이 좀 더러워질 뿐이지.”

뿌드득- 무언가 뿌리째 뽑히는 소리가 났다. 사색이 된 남자가 버둥거렸다. 이도하는 체구도 크지 않았다. 키는 컸지만, 덩치가 있는 편은 아니었다. 균형이 잘 잡혀 있을 뿐 오히려 마른 편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사자가 밟고 선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유리 위를 긁는 것처럼 생체기 하나 낼 수 없었다. 콰득-! 남자의 입에서 치아가 뽑혀 나왔다. 피가 튀었다.

<끄아아아악!!>

이도하가 옅은 숨을 내쉬었다. 지루해하는 것처럼, 길고 무료한 한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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