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추하다, 추해. 남자가 혀를 차며 재떨이에 시가를 내려놓았다.
꽤 오랜 시간 아주 공을 들여서 사업을 준비해 놨더니, 성과를 코앞에 두고 왜 날벼락이 치는 것도 모자라 거기서 그치지 않고 통째로 다 빼앗기게 생겼다. 현자의 탑이 황제의 손에 먼지 한 톨 남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쓸려나가는가 싶더니, 아이라가 이딴 식으로 태세 전환을 할 줄이야. 과연 똑똑한 인간들이라고, 이런 쪽으로도 머리가 아주 기민하게 돌아가는 모양이다. 덕분에 남자는 완전히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가 되었다.
빠드득, 누군가 분에 못 이겨 이를 갈았다.
<파칸, 아예 판을 다 엎어버리죠.>
손해도 손해지만, 이딴 식으로 물 먹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아이라의 배신자들을 처리하는 일쯤이야 어렵지도 않습니다. 다 정리해 버리면 실험 자료들도 전부 이쪽에만 남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섣불리 우리를 건드릴 수도 없게 되지 않습니까.>
죽이고, 터트리고, 묻고, 그게 그들이 하는 일이었다. 말마따나 정말 어렵지는 않았다.
<이런 식으로 눈 뜨고 다 빼앗길 수는 없습니다.>
<어차피 이미 죄다 물밑 연구에 들어갔을 겁니다. 누가 선수를 치냐가 관건이니 죄다 불이라도 밟은 것처럼 움직일 겁니다. 뚜껑 열린 순간 이미 우리 손을 떠났어요.>
냉담한 목소리가 말했다.
<아니, 선수는 우리가 치죠. 어차피 저쪽 현자의 탑은 황제의 손에 갈려 나갔고, 그쪽 자료는 전부 황제의 손에 들어갔을 텐데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럼 남은 자료는 전부 우리에게 있으니 아직 늦지 않았어요. 정부쪽에서도 그걸 아는 이상 쉽사리 우리를 쳐버리려 들지는 않을 겁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양키들이 좋아하는 말이지 않습니까.>
톡톡- 손끝으로 의자를 두드리던 누군가가 말했다.
<확실한 줄을 잡는 게 나을 텐데. 황제에게 선을 대보는 건 어떻습니까?>
<그 황제에게? 인소더블을 가져놓고도 모셔만 놓고 있는 황제가 계약주 양산에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필요하게 될 텐데.>
<괜히 엮였다가 행여나 암살에 대해 알게 되면 긁어 부스럼이 아니라 다 망하는 건데요. SCU의 그 시체 만지는 놈이 암군의 계약자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오즈에서 몇 죽어나간 것을 제외하면 아직까지는 아무 일이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다.
<쓸데없는 도박을 할 필요 없겠죠. 그 동네에 나라가 이리스티리움만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그 제국이어야 했던 것도 현자의 탑 때문이었지 않습니까. 그 황제는 아쉬울 게 없는 인간이에요. 자료는 이제 충분하니 힘 한 톨이라도 아쉬운 소국이 낫습니다.>
<말 참 쉽네. 아이라가 이미 발을 쏙 뺐는데, 그들 없이 우리끼리 무슨 수로?>
<불법적으로 진행하던 실험을 정부에서 주도해 공식 연구로 들어가면 밀려나는 연구원들도 생기겠지. 기껏 이제까지 연구해 왔는데 불법 실험이라는 덤터기만 쓰고 성과는 다 빼앗기게 생긴 이들. 억울하고, 불만 많고, 더 출세하고 싶고, 복수하고 싶고, 구슬리기는 딱 좋은 종자들 아닌가.>
<동변상련 꼴이 되겠군. 보기 좋겠는데.>
불법 실험이라는 덤터기는 뒤집어쓰고, 성과는 다른 놈들에게. 누군가 이죽거렸다.
<정부 쪽에서 먼저 성공하면 우리는 부스러기나 받아먹는 개가 되는 건가.>
<부스러기나마 손에 쥐어야 덜 억울할 텐데. 그렇지 않고서는 그 개마저 못 되고 총대나 메게 생겼으니.>
그럼 정말 억울하지 않겠냐는 말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분위기는 엎치락뒤치락, 앞뒤로 시소를 타고 있었으나 그도 머지않았다.
계약 양도.
그건 인정이나 감정, 뭐 그런 말랑말랑하고 보이지도 않은 것들에 고개 숙여 잘못된 일이라며 없었던 것으로 하기에는 너무 혹할 만한 것이었다.
계약자가 된 특기자들은 오즈에 소환되어서 마력을 담아오고, 그 마력은 그들의 세계에서 온갖 에너지 자원으로 활용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걸어 다니는, 심지어 아주 환경 친화적인 발전소가 되는 것과 다름없는데, 그 발전소가 될 확률이 로또보다도 더 빌어먹을 확률이다.
파장인지 뭔지가 맞는 소환주가 존재해야 하며, 그 소환주가 계약주가 될 의사가 있어야 하고, 의사가 있다 해도 더해서 계약주가 될 마력이 받쳐줘야 한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듯 계약자들은 이 까다로운 확률을 모두 거쳐 탄생한 이들이었다. 그런데 한 명이라도 계약을 파기하거나, 죽거나 하여 계약이 깨지면 다시는 계약을 맺을 수 없으니 아주 피눈물이 날 손실인 것이다.
그러나 계약 손실은 애석하게도 전 세계적으로 매년 꽤 많이 발생했다. 계약자가 발생하는 확률보다도, 더 많이. 이유는 다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오즈가 더 많이 위험해 그만두고 싶다거나, 다른 세계로 불려가 손끝으로 부려지는 기분이 들어 싫다거나, 계약주가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반대로 계약자가 죽거나.
계약 손실은 모든 나라가 어떻게 해서든 줄여보려고 골머리를 쌓는 일이었다. 변심은 설득하고 협박하고 애원이라도 해보지, 불의의 사고는 막을 수도 없다.
그러나 계약을 다른 이에게 양도해서 이 손실을 메울 수 있다면, 계약자는 물론이요 모두가 행복해지는 결말이 아닌가 말이다. 어느 날 기적적인 확률로 독일처럼 인소더블 계약자가 나타나기를 마냥 꿈꾸기는 게 아니라, 운영하기에 따라 안정적인 마력 수급으로 나라가 안전하고 풍족해질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누구든 바라마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니 계약주와 계약자의 유대관계가 어쩌고저쩌고 왈가왈부해대도 결국 이 계약 양도 실험은 국가가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는 연구가 될 게 뻔하다.
미국에서야 SCU의 주도로 계약 양도 실험은 범죄수사물이 되었지만 한국에서는 눈물 짜내고 가슴 절절한 신파극이 되어 있었다. 다 늙은 노인이 나와 선의였다며, 나라를 위한 일이었다며 눈물을 줄줄 흘리고, 그 실험의 불의의 피해자는 무려 12살밖에 안 된 고아다. 계약자와 계약주의 유대 관계. 영화나 여타 매체를 통해 다들 한 번쯤은 감정 이입해 본 사뭇 애틋하고 끈끈한,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물건처럼 사고팔고 넘겨주는 실험을 누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한 번쯤은 책임을 무는 시늉이라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게 계약뿐만이 아니라 마약도, 무기도, 사람도, 여자도 아이도 다 팔아먹는 거대 마피아라면 얘기는 아주 쉬워지는 것이다. 마력 산업은 원래도 지하 세계에서 침을 뚝뚝 흘리며 눈독을 들이던 분야였다. 카지노처럼 운영비나 장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마약을 밀매하는 것처럼 은밀한 루트를 탈 필요도 없으며 사람을 잡아다 파는 것처럼 수고로울 것도 없다. 계약자는 가만히 놔두기만 하면 황금알을 쑹덩쑹덩 낳는 거위인 셈이다!
유대가 생기지 않으며, 서로 명확한 목적만을 가지고 편법으로 계약을 성립시키기 때문에 상상할 수 없는 사고가 나기 일쑤고, 서로를 죽이기도 해 나라에서 금지시킨 유도 계약도 지하 세계에서 시작됐다. 유도 계약은 훗날 계약주나 계약자가 될지도 모르는 잠재적 가능성까지 다 잡아먹는, 내일 따윈 필요 없고 오늘만 살겠다는 편법이었으나, 지하 세계에서 막대한 돈을 버는 수단을 눈앞에 두고 그딴 걱정을 할 리가 없다.
거기에 계약 양도까지 성공하면, 나라를 평안하고 풍족하게 하는 게 아니라 이 깡패들만 입에 기름칠을 하고 배만 두둑이 불리는 것이다. 엄청난 지하 산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한껏 떠들어대며 열심히 밟아 놓는 모습을 보여주고 나면, 이제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정부에서 계약자들 간의 계약을 주도하는 것도 정의롭고 숭고하게 이미지 메이킹 할 수 있을 테니까.
계약을 양도한다- 사고판다, 그 발상에서부터 실질적인 실험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성공을 코앞에 두고 홀랑 모든 걸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고기방패로 쓰고 버려질 신세가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사실이든 아니든 어쨌든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딴 건 중요하지 않고,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무덤에서도 벌떡 일어날 일이었다.
<그 애. 가져 와.>
내내 책상 위의 서류만 노려보고 있던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타인의 특기까지도 일부 훔쳐낼 수 있는 독특한 특기를 가지고 있던 그 애. 그 애의 힘이 있어서 그래도 실험이 꽤 성과를 보였다. 계약주가 죽어서 다시는 오즈에 갈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특기자가 아니게 된 것은 아니니 실험은 여기서도 할 수 있었다.
12살짜리에, 고아인데다 보호자랍시고 자청해서 나선 인간도 속이 뻔하다. 가장 써먹기 편한 인간이며, 그 애는 여느 계약자들이 그렇듯 계약주를 퍽 좋아했다고 하니 잘 달래면 알아서 따라올 것이다. 오즈에 다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면 아주 혹할 것이다.
<그리고->
뭔가 더 말하려던 남자가 돌연 눈을 크게 떴다. 무언가에 크게 놀란 것처럼 숨을 들이키더니 이내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진다. 시선이 그의 앞에 앉은 이들 중 하나를 비껴 그 뒤를 향해 있었다. 앞에 앉은 이가 의아하게 뒤를 돌아보려다 흠칫 얼어붙고 말았다.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쫙 내달려 머리끝이 주뼛 선다. 등 뒤로 식은땀이 쭉 흐른다. 뒷덜미로 이를 드러낸 맹수의 숨결이 닿은 것 같은 위협적인 살기가 그를 휘감았다. 이빨이 목을 꿰뚫어버리는 대신, 두 손이 그의 어깨를 짚었다.
“그리고?”
남자의 앞에 앉아 있던 이들이 퉁기듯 일어섰다. 의자들이 쿠당탕!! 넘어졌다. 꼼짝도 못하고 의자에 앉은 채 굳어버린 이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고서, 누군가 서 있었다. 지퍼를 끝까지 올린 검은 바람막이 하나만 걸친 게 집 앞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은 가벼운 차림새였다. 눈이 소복이 쌓인 바깥과는 계절감이 전혀 맞지 않는다. 벽난로의 불빛이 날름거리며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아주 젊은 남자였다. 키가 컸으며, 검은 머리칼이 차분히 이마를 덮고 있다. 그 아래, 무심하게 내리깐 검은 눈동자에는 푸르스름한 안광이 어려 있다. 불빛이 선이 얇은 서늘한 얼굴 위로 붉게 맴돈다. 바다를 통째로 갈라 하늘의 자리의 놓아두고서도, 무심히 올려다보던 그 얼굴이다.
전율과 동시에 뱃속 깊은 곳에 도사리는 뱀이 고개를 든 것 같은 뭉근한 두려움을 느끼게 했던 얼굴. 이름만 남아버린 독일의 우르슬라, 실존 인물인지조차 의심되는 미국의 해밀턴 블랙과 달리 전 세계에 ‘인소더블’의 힘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준- 단 셋뿐인 인소더블 중에서도 유일하게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인소더블.
이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