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149화 (149/250)

149화

“…시오한.”

이도하가 신음처럼 그를 불렀다. 그런 게 아니야. 지금 생각하면 이도하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던 제가 지금처럼 무관심한 성격이 된 데에, 그때의 대재앙이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어떤 식으로든 제가 지금의 제가 되었을 것 역시 알았다. 어린 이도하가 착각했던, 그저 착한 일만 할 수 있는 멋진 세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주승현의 말은 그런 점에서는 틀린 게 없었다.

그저 네가 없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대의 세계가 아닌걸, 화이람. 그대를 거부하는 세계에 그대는 어떤 의무도, 책임도 질 필요가 없어. 그러니 잊는 게 맞아, 화이람. 세계가 그대를 지워버리려 했듯이. 그대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그저 모두… 내가 그대를 잊지 못한 탓이야.

다정한 목소리가 말했다. 세계가 무너진 것도, 저를 포함한 죽음도, 망각도, 기다린 세월도, 그 어느 것도 네 탓이 아니라고.

-그대가 곁에 있는 세상을 알았기에, 그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서.

맹약 이후 시오한에게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맹약을 시도했을 때 확신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시오한의 기억을 읽은 지금 이도하는 이제 알았다.

시오한은 확신이 있었다고 했지만, 그 확신은 ‘기적’을 염원했던 그가 ‘이도하’를 소환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었다. 이도하가 저를 살려낼 거란 확신이 아니었다. 이도하를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도 그는 계약에 대한 마음조차 없었다. 시오한은 정말로, 마지막까지 이도하를 한 번만 더 보려고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야금야금 뜯고 곱씹은 기억이 바래고 흐릿해져 더는 남지 않아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건 명백한 자살이었다.

-그대는 여전히 상냥하고 다정해, 화이람. 그러니 내게 이리 붙잡히고 만 거지.

제게 속하지 않는 이질을 씻어내기 위해 스스로 무너지려 한 다른 세계 때문에 괴로워하고, 울고. 원치 않는 소환을 밀어붙인 소환주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제 목숨을 걸고. 무심한 척 하지만, 결국 어린 날 그렇게 작은 햇살처럼 웃으며 ‘할 수 있기’ 때문에 뭐든 하려고 했던, 그리하여 바랐던 것이 옳은 일에 불과했던 그 아이는 여전히 그대로라고. 어쩌면 저는 그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제 목숨을 인질로 잡고서.

“당신, 그거 콩깍지가 너무 심하게 낀 거야. 나 그렇게 착해빠진 놈 아니야.”

이도하가 말했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 끝이 가늘게 흩어졌다. 기어코 울음기가 묻어나와 이도하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대에게 멋대로 용서받았어, 화이람.

‘내가 당신을 잊는다면, 꼭 다시 불러, 시오한.’

‘응.’

‘내가 좀 옹고집이거든. 나이 들어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또 그렇게 계속 불러주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부르라는 말은 허락과도 같았다. 이도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건 시오한에게 용서였다.

-몇 번이고 또 나를 잊어도 돼. 그대가 나를 기억하는 데서 오는 사소한 기쁨보다도… 그대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 난 괜찮아. 그러니 감히 바라건대, 화이람….

시오한이 말했다. 윽- 대답하지 못한 채, 이도하가 울음을 토해냈다.

-…한 번만 더, 날 용서해 줘.

화이람. 잔잔한 목소리가 이도하를 불렀다.

-나를… 다시 그대가 없는 세상에 두지 마.

“…말했잖아, 시오한.”

이도하가 말했다.

“당신이어야 한다고, 말했잖아.”

기억을 찾기 전에도.

‘당신의 계약주가 바라는 게 그저 당신뿐이라면, 부럽네요. 이도하씨.’

이제 이도하는 알았다. 그 어느 때보다 더 심장이 아프도록 알았다. 오직 시오한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누가 그렇게 목숨을 걸 수 있었으며, 목숨을 걸어놓고도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을 수 있었을까. 밥 먹자. 같이 걷자. 술이나 한 잔 할까. 달구경 하자- 누가 애써 인소더블을 소환해 놓고도, 그 평범한 시간들을 제가 치른 비싼 대가보다 더 값어치 있게 여겼을까.

시오한, 그가 아니었더라면 세상에 어느 누가.

‘달이 참 예쁘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저조차도, 그냥 다 싫고 귀찮다며 모든 것에 눈을 감아버리려 했던 저조차도 그렇게 만들어 놓고서는.

“사랑한다고.”

이도하가 말했다.

“사랑해, 시오한.”

울며, 이도하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어떻게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어.”

대답은 없었다. 웃음소리만 들려왔다. 큰일 났다. 이도하가 제 옷깃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보고 싶다. 그가 어떤 얼굴로 웃고 있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저도 모르게 또다시 세계를 짓밟고 넘어가 버릴지도 모를 정도로. 몇 번을 닦아내다 앞섶을 끌어당겨 아예 얼굴을 묻어버린 이도하가 말했다.

“무슨 감히고, 무슨 용서야. 용서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누가 누굴 용서한다고. 멍청아.”

-응.

“응은 또 무슨 응이야.”

-사랑해, 화이람.

“…다시 불러 줘.”

-화이람.

“또.”

-사랑해.

이도하가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기다릴게. 기다릴 테니까… 날 불러, 시오한.”

-보고 싶다.

“…무리하지 마.”

-글쎄….

참을 수 있는 때까지 참아보겠지만,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는 투였다. 마력이 조금이라도 찰 때마다 그를 불렀던 이력이 있는 만큼 과연 이쪽으로는 조금도 믿음이 가지 않기는 한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이도하도 그러지 마라, 하고 말리지 않았다.

“시오한.”

이도하가 그를 불렀다.

-응, 화이람.

“두 번은 없어.”

제게 말하듯, 이도하가 힘을 실어 말했다.

“절대로. 다시는 안 잊어.”

컴컴한 어둠 속에서, 옷깃 사이로 얼핏 드러난 이도하의 눈동자가 푸르스름한 빛을 띠었다. 주승현은 우르슬라가 시간을 아무리 되돌려도 현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녀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며, 지금처럼 그대로 같은 시간을 되풀이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이유가 없었다. 애초에 주승현은 뒤엉킨 시간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내가 방법을 찾을게.”

뒤엉킨 시간을 이대로 둬도 되는지, 아니면 무언가 해야 하는지. 우르슬라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대로 쭉, 지금만큼이라도 같을 수 있다는 약속.

-응. 그대를 믿어.

시오한이 단출하게 대답했다. 앞뒤 정황을 제대로 모를 텐데도, 그 말뿐이다. 이도하의 입가에 잠깐이나마 미소가 어렸다 사라졌다.

인소더블. 최초의 인소더블인 스페인의 어느 특기자 이후로 다들 별생각 없이 흔하게 붙여진 호칭. ‘무한한’, ‘이해할 수 없는’. ‘측정할 수 없는’. 다들 흔하게 불러대며 유일하게 ‘등급’이랄 만한 것이 나눠진 인소더블이 일반적인 특기자와 어떻게 다른지 떠들어 대지만 그들은 전혀 모른다. 생쥐와 기린이 바라보는 곳이 같을 수는 없다.

천 년 전으로 시간을 돌려 돌아갈 수는 있지만, 그동안 쌓인 인과는 바꾸지 못한다. 언뜻 듣기에는 그럴 듯한 것이다. 일이 년도 아니고, 백 단위도 아니고 천 년이니 과연 그럴 만하다,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도하는 천 년 전의 시간을 엿보고, 우르슬라가 억겁이라고 할 만큼 되돌린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다른 이유가 있다.

주승현은 우르슬라의 계약주가 왜 죽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우르슬라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위협이 무엇이었는지는. 마치 그런 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처럼.

천 년 전.

맹약도, 우르슬라도, 시간도, 전부 천 년 전의 그 시간에 묶여 있다. 우르슬라의 계약주, 엘하시온이 살았던 시대. 어쩌면 최초의 소환이, 최초의 맹약이 이루어졌을지 모르는 시대. 마녀 사냥과 악마 숭배가 횡행하고, 불사를 꿈꾸던 왕이 아들과 딸마저 죽여 버린 이름 없는 왕국. 고양이가 흥미를 보이길 바라는 것처럼 저들은 이도하의 앞으로 툭툭 단서를 던져놓았다. 깨작깨작, 이도하가 따라오는 대로 하나씩 먹이를 던져주면서,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이끌고 있다.

이도하가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냉랭한 눈으로 잠시 바라보았다. 손가락 끝에서 미끄러진 이어폰이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들여다봐야겠다.

천 년 전, 그 이름 없는 왕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

제법 버티고 있던 낙엽은 거의 다 떨어지고 겨울이 오고 있었다. 공기가 부쩍 싸늘해져 제대로 외투를 받쳐 입지 않으면 추위에 한껏 웅크리게 되는 계절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일 년 중 절반이 겨울인 곳이었다. 늘 싸늘하고 추워 겨울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이미 눈이 한 겹쯤 소복하게 쌓인 도시는 무미건조하고 차갑다. 정문에서 차로도 몇 분은 더 들어와야 하는 이 거대한 저택 역시 눈 내리는 밤의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타닥타닥, 벽난로가 타오르는 방에는 고풍스러운 카펫이 깔려 있었다. 벽난로 위로는 거대한 곰의 머리가 입을 쩍 벌리고 있었으며, 벽은 무감한 잿빛이었다. 일렁거리는 벽난로의 불꽃이 아주 컴컴한 어둠만 간신히 몰아냈다. 흑단 나무로 만든 책상 위에 놓인 조그만 램프만이 그 위에 펼쳐진 여러 장의 사진과 서류들을 어렴풋이 비추었다.

<죽 쒀서 개나 주게 생겼군.>

푹신한 가죽 의자에 등을 기댄 중년의 남자가 가늘게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던 시가를 가져가 입에 물며 중얼거렸다. 백금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는 흐트러져 있었고, 가운에 슬리퍼로 편안한 차림새였으나 남자의 심기는 영 그렇지 못한 듯했다. 남자의 앞에는 여러 명이 앉아 있었으나, 그중 누구도 할 말이 없는 듯 한숨만 삼켰다. 남자의 심기를 가라앉힐 말도, 상황을 타개할 긍정적인 말도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가는 시가 연기 사이로 남자의 시선이 책상 위에 흐트러진 사진들에 닿았다. 사진 속에는 새하얀 머리를 흐트러트린 남자가 하얀 가운 차림으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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