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
이도하가 꾹 제 눈을 눌렀다. 여러 번 호흡을 삼켜낸 그는 가느다란 숨을 소리 없이 흘려냈다. 꽤 괜찮은 것 같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군나르가 혼이 낫겠네.”
시오한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식으로 제가 모리온의 기억을 통째로 읽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딱, 이도하가 제 오지랖을 후회하지 않을 만큼만. 하잘것없는 동정이 연민으로 남을 만큼만. 그 정도에서 끝낼 수 있을 정도만 그에게 주었을 것이다.
암군의 사령관으로서 시오한을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서 보아 왔을 군나르 아스터가 그런 식으로 선을 넘은 실수를 한 것은, 이도하가 그만큼이나 예외의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는 황제 시오한 오르페노스는 남의 연민이나 동정 따위에 신경을 쓰는 이가 아니었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 그러니 당장 모리온의 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군나르 아스터는 제가 필터링을 하느니 차라리 이도하가 모든 걸 직접 보는 게 가장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제법 합리적인 판단이기는 했다. 이도하가 충동적인 짓을 했을 뿐.
-응, 혼났지.
혼이 났다- 키도 크고 한눈에 봐도 몸이 단단하며, 인상도 엄하고 딱딱한 군나르 아스터와는 끔찍하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어린아이에게나 쓸 법한 표현을 시오한이 태연히 받았다.
“손이라도 들었나.”
시오한이 옅게 웃었다.
-그건 너무 가혹한걸.
그 무뚝뚝하고 묵묵한, 군나르 아스터가 집무실 한쪽이나, 궁의 어디서든 무릎을 꿇고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니 본인은 물론, 그 모습을 봐야 할 궁인들에게도 여러모로 끔찍한 일일 것 같다.
-그는 황제의 편애를 받고 있거든. 혼내기가 쉽지 않아. 근신을 명했는데, 그대가 더 벌주고 싶다면 그렇게 해.
“…벌은 무슨, 한 번 꽉 안아줘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날 벌주려는 거야?
이도하가 힘없이 픽 웃었다. 그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발 사이로 무언가 소리 없이 후두둑 떨어졌다. 꽤 아무렇지 않게 잘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또 울고 있었다. 제 것이 아닌 양, 이도하가 대수롭잖게 뺨을 훔쳤다.
“내가 무슨 수로 당신을 벌세워. 이미 충분히 세웠으면 세웠지.”
그렇게 말한 이도하는 시오한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도 그렇게 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엄청 쪼그맣더니. 잘 컸더라.”
빗물에 흠뻑 젖은 서랍장 속에 웅크리고 있던 조그만 아이. 남색 눈동자에 남색 머리칼. 기억을 그렇게 순식간에 읽은 게 아니었더라면 이름을 듣고도 몰라봤을 게 틀림없다. 엉엉 울던 아이와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로 무뚝뚝하게 보는 군나르 아스터를 겹쳐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대에게 부끄럽지 않아 다행이야.
“당신이 나한테 부끄러울 일이 뭐가 있어.”
-그대가 살린 아이니까.
“…내가 살렸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 나 그 후에 쭉….”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이도하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사람 안 변한다고, 어렸을 적이나 지금이나 제가 하는 일이 똑같다. 쓸데없이 참견해서 오지랖을 부려놓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 제 손으로 기억을 다 묻어버리기 전에도, 펑펑 울며 집으로 돌아갔던 날 이후로 이도하는 제가 구한 그 조그만 아이에 대해 시오한에게 한 번을 물어본 적이 없었다. 저는 그냥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제 자신의 모습에 신나고 취해 있을 뿐이었다.
-그대가 구한 아이야, 화이람.
시오한이 다시 말했다. 이도하가 쓰게 웃었다.
“그건 그냥 치기였어, 시오한. 동정도 뭣도 아니고 정의로운 척, 멋있는 척, 여기저기에 힘자랑이 해대고 싶고 그냥 영웅 행세를 하고 싶었던 거지. 그러다가 세상을 통째로 작살낼 뻔했는데, 그 애 하나 잠깐 안아준 걸로 사람 하나 구했다고 정신 승리하기에는… 양심이 너무 아프다.”
-그대의 잘못이 아니야. 이 세계가 나약해 그대를 감당하지 못 했을 뿐이지.
우리 애가 착한데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아니, 그게 아닌가. 어쨌든 좀 쳤을 뿐인데 그러게 왜 그렇게 약해 다쳤냐며 탓을 하는 꼴이다. 무려 세계를 탓하는 뻔뻔함에 이도하가 실소를 머금었다. 아주 뜨거운 것에 닿은 것처럼 심장이 죄어왔다.
“…당신이 그렇게 말해주면 정말 믿고 싶어지거든.”
정말 제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저는 정말로 그저 돕고 싶었을 뿐이라고. 누구도 해치고 싶었던 게, 다치게 하려던 게 아닌데, 하고. 그러나 어렸다는 것을 들이대며 그렇게 될 줄 몰랐다고, 의도는 좋았지 않냐기에는 아무래도 피해 규모가 좀 남다르지 않나. 의도는 그러려던 게 아니었으니 안아주며 화해해라, 하는 건 학교 졸업하면서 끝나는 짓이고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대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화이람.
시오한이 다시 말했다. 다디달아서 무슨 짓을 저질러도 다 받아주고 용서해 줄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만 괜찮다고 하면 정말로 다 괜찮고,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은 마음.
-날 믿어, 화이람. 그대는 아주 상냥하고 다정한 아이였어.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재미없는 아이를 매번 찾아와주고, 많은 것을 알려주었지. 좋은 일을 잔뜩 하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굴렀었어.
그의 머리와 입을 거치니 이도하가 기억하는 제 모습과는 아주 달랐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표현의 표상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필터링이었다. 실드 잘하네. 말하려던 이도하가 멈추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어린 그대는 아주 착하고 다정할 거야 . 그대는 무엇도 해치지 않았을 거고, 옳은 일만 하고 싶었을 거야.’
‘…정말 피의 실드다.’
달빛이 스며든 얼굴이 떠오른다. 높은 바람이 부는 성벽 위에서, 가느다란 황금빛 머리칼이 손등을 스치며 흔들리고 있었다. 떨떠름해하는 절 보며 시오한은 아이를 어르듯 웃었었다.
아. 이도하가 입을 벌렸다. 짧은 탄식이 애써 꽉 눌러놓은 틈으로 새어 나왔다. 그때도 이미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날 보면서도. 그가 제 가슴을 움켜쥐었다. 답답한 것을 토해내고 싶은 것처럼 기침을 하는 듯, 웃었다. 커튼 틈 사이로 가느다란 빛이 스며든 컴컴한 어둠 속에서 어깨가 흔들렸다.
“난 당신을 끌고 다니면서 사고나 잔뜩 쳐댔는데. 그 정원 어딘가에 있던 당신 할아버지 동상, 목을 날린 게 나잖아.”
뭘 했더라. 제 학교에는 밤이 되면 살아 움직이는 동상이 있다는 으스스한 얘기를 해주다가 무심코 그랬던가, 아니면 실감나게 시오한을 놀래켜 주려고 그랬던가. 아무튼 정복 황제 아칼테케의 동상은 정말로 돌덩이 칼을 휘두르며 그들을 정복하려 들었고, 이도하는 신이 나서 시오한을 끌고 악의 머리를 무찌르듯 힘차게 동상의 머리를 날려 먹었다.
-그리고 아예 무너뜨린 건 나지.
땅에 떨어져 머리 한쪽이 부서진 제 조부의 동상을 보며 당시에는 꽤 난감하고 곤란한 표정을 했던 시오한이 태연히 말했다. 그 표정을 보고서야 조금 눈치를 보며 다시 붙여 놓을게, 했던 어린 이도하에게 시오한은 그대로 두라며 말렸었다. 괜찮아, 하더니 아예 동상을 통째로 밀어 넘어뜨려 버렸었다. 머리가 잘린 것보다 알 수 없는 불의의 기이한 사고로 동상이 다 무너진 게 나을 거야, 하며.
“내가 당신을 완전히 물들여놨어.”
-뭘 좀 아는 태자로 만들어준 거야.
시오한이 태연히 말했다. 참 이도하 저가 했을 법한 대사였다. 이도하가 나직이 웃었다. 그런 주제에 저는 참 말끔히도 잊어버렸다.
“시오한.”
-응, 화이람.
화이람- 그렇게 부르는 목소리가 잔물결처럼 퍼져 심장을 두드리는 것 같다. 백 번이든 천 번이든 더 불러줄 기세다. 백 번째에도, 천 번째에도 변함없이. 화이람, 화이람, 그렇게 부르던 목소리들이 메아리처럼 연이어 떠올랐다. 하기야, 아무것도 몰랐을 때에도 그랬다. 그는 늘, 같은 곳에서 절 부르고 있었다. 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도하가 돌아올 때까지. 그를 돌아볼 때까지.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그랬는데.
“…미안해.”
이도하가 말했다. 어차피 깜깜한 방이었지만 그는 또 제 눈물이 떨어지는 꼴을 보지 않으려 눈을 감았다.
“미안해, 시오한.”
널 잊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제 잘못을 모두 묻어버리고 싶었을 뿐. 그 말은 이도하가 삼켜낸 울음과 함께 삼켜졌다.
이도하 저가 감당해야 할 일들이었다. 죽어 나동그라진 그 수많은 시체들이 잊히지 않아 밤잠을 설쳐야 했던 것도, 비명 소리와 울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참아야 했던 것도, 문득문득 몸과 손에 닿았던, 채 식지 않은 시체들의 느낌에 몸서리쳐야 했던 것도, 조그만 천둥소리 따위에도 심장이 두근거려 움직일 수 없어야 했던 것도, 당장이라도 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흔들릴 것 같아 시도 때도 없이 닥치는 공포와 불안감을 견뎌내야 했던 것도, 전부 이도하 저였다. 시오한이 아니라.
그런데 고작 절 붙잡고 있느라고.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을 텐데, 절 잊는 건.
-오해하지 마, 화이람.
시오한이 말했다.
-감내해야 했던 시간이 아니었으니.
웃음기가 조금 어린 목소리가 말했다.
-세상에 빛나는 건 모두 그대가 가르쳐준걸. 그대가 내게 준 기억들도 그러했기 때문에… 그대를 그린 시간들 역시 마찬가지였어. 힘들지 않았어, 화이람. 도리어 나는 그 기억들을 야금야금 뜯어먹으며 산 것과 같지. 내가 그래야만 했을 뿐이야. 그러니 화이람, 내게 미안해하지 말아. 사과는 내가 해야 옳으니.
“하지 마.”
-그대가 안온한 삶을 원했던 걸 알아.
시오한이 말했다. 다른 세계라고 하나 두 세계는 계약주와 계약자로 이어져 있었다. 궁은 특히나 계약주들이 가장 많은 곳 중 하나이니 소식쯤은 얼마든지 들을 수 있었다. 시오한은 이도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저쪽 세계에 아이만한 능력을 가진 이의 활약상은 들려오지 않았으니 짐작할 수 있을 만한 일이었다.
시오한의 기억 속에서, 아이는 그에게 많이도 재잘댔었다. 시오한은 응, 그래, 쯤의 맞장구 같은 대답밖에 할 줄 모르는 재미없는 상대였지만 그래도 아이는 신나 하며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아이는 빨리 크고 싶어 했다. 함께 보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무너지는 세계에서 눈물을 떨어트리며 아이는 그 모든 것들을 함께 떨어트렸을 것이다. 시오한은 아이가 더 이상 저를 보고 싶지 않아 했을 것을 이해했다. 평범한 삶을 바랐을 것을 알았다.
-그대를 다시 이런 세상에 불러들여서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