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미국에서는 SCU 팀의 주도로 FBI가 그쪽 아이라 수색에 들어갔어요. 이도하군도 알았겠다, 그러니 저렇게 덜컥 겁을 먹고 먼저 선수를 쳤지. 미국 쪽도 상황이 썩 좋지는 않지만… 좀 더 지켜볼 필요는 있어요. 그러니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당분간은 좀 쉬는 게 좋을 거예요.”
주승현이 돌아섰다. 이도하의 시선이 그 뒷모습에 꽂혔다. 새까만 눈동자가 김윤혜를 따라간다. 표정 하나 없이 건조한 그를 김윤혜가 몹시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주승현은 복도를 따라 사라졌다. 자박자박 발걸음 소리 끝에는 찰칵, 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김윤혜는 머리가 아주 복잡한 와중에도 주승현이 멀쩡히 살아나가는 것을 지켜보다 홱 고개를 돌렸다. 이도하는 어디에 시선을 주고 있는지도 모르게 우두커니 서 있었다.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같다.
“…….”
이런 적이 별로 없었는데,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김윤혜는 입술만 몇 번 뻐끔거렸다. 집 안은 아주 조용했다. 거실에는 이도하가 누웠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는 요와 이불이 흐트러져 있었고, 부엌 바닥에는 커피 가루와 내려지다 만 커피가 흘러 진득하게 굳었다. 씁쓸한 커피 냄새가 허공에 맴돌고 있었다.
“…몇 시야?”
이도하가 물었다. 커피 자국만 노려보고 있던 김윤혜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4시요. 좀 넘었어요.”
“안에 침대 있어?”
이도하가 안쪽 방을 가리켰다. 김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좀 잔다.”
“이도하씨!”
“왜.”
방 문고리를 잡은 이도하가 김윤혜를 돌아보았다. 조금 망설인 김윤혜가 말했다.
“…미안해요.”
김윤혜가 이 집으로 주승현을 따라온 것은 딱히 그녀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집행 이사씩이나 되는 주승현이 저를 어떻게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내내 비비고 있을 것도 아니고 잠시뿐이라면, 주승현이 제게 무슨 목적이 있건 저도 그녀를 이용하는 셈 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몹시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윤혜씨가 왜.”
이도하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김윤혜도 이성적으로는 방금 일어난 일이 그녀의 탓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절 탓할 리가 없다는 것도. 그냥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불 꺼진 방 안으로 들어가던 이도하가 멈칫 멈춰 섰다.
“…신은호, 그 애 있잖아.”
“네?”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
“…아뇨, 몰라요.”
김윤혜가 짧게 대답했다. 모르는 이유 몇 마디를 더 해봐야 지금 이도하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일 것이었다. 부모도 없는 불쌍한 아이가 그 유명한 인소더블에게 폭행을 당했다, 아이가 상처를 받았다, 신은호가 지내던 시설 원장의 폭로로 한동안 이도하를 잡아먹기라도 할 것처럼 떠들썩하던 사람들은 이제 아이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 같았다. 어차피 증거도 뭣도 없이, 고작 12살 난 아이가 계약자라는 사실에 더 맛깔난 양념 역할이나 하던 흔한 여론 몰이였다.
지진이 나건 태풍이 오건 앞으론 니들이 알아서 해라, 하고 이도하가 기자회견장에서 독일로 사라졌을 때 이미 신은호의 존재는 흐지부지 잊히고 있었다. 아이라의 내부 불법 실험이 꽤 솔깃한 것 같은 지금에 와서 더 이상 계약자도 아닌 12살 아이의 소식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김윤혜조차도 잊고 있었다.
“…그래.”
침실에 들어선 이도하가 등 뒤로 탁, 문을 닫았다. 거실은 창밖으로 해가 비추어 훤한 낮이었는데, 이 침실은 안방이라고 암막 커튼을 달아 놓았는지 아주 깜깜했다. 잠시 멀거니 서 있던 이도하가 터벅터벅 침대로 다가가 풀썩, 누웠다. 깜깜해서 눈을 감을 필요도 없었다. 커튼 밑으로 어슴푸레한 빛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밖에서 김윤혜가 주방을 치우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작게 들린다. 이도하는 멍하니 까만 천장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멀게 물소리가 들린다. 소리는 점점 커졌다. 김윤혜가 주방에서 물이라도 틀어놨나, 했던 이도하는 곧 그게 빗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눈을 감았다. 바닥이 흔들리는 것 같다. 거인의 발자국 소리 같은 진동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나는 것 같다. 점점 커진다. 이도하가 귀를 막았다. 그러나 어떤 소리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 위로, 우르슬라의 기억이 겹쳤다. 수천 번, 수만 번 반복돼 앞뒤도 알 수 없고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이 짓뭉개진 기억이 요란하게 번쩍이는 불빛처럼 망막을 어지럽힌다. 엉엉 울던 어린 울음소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이파리처럼 귓가를 맴돈다. 이도하가 몸을 웅크렸다. 악문 입술 사이로 억눌린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신은호, 그 애를 보니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세상은 원래 이런 모양이었어요, 이도하군.’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시오한.”
이도하가 그를 불렀다.
-응, 화이람.
즉각적인 목소리가 대답했다. 이도하가 번쩍 눈을 떴다. 그가 퉁기듯 몸을 일으켰다.
“…시오한?”
-응, 화이람. 나 여기 있어.
여느 때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답했다. 이도하의 얼굴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대답하리라 기대하고 부른 것은 아니었다. 시오한은 이미 이전의 무리한 소환으로 기력도 마력도 바닥나 있었다. 그가 좀 더 회복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더는 참을 수 없었다. 그냥 그가 필요했다.
“…뭐해? 안 자고.”
컴컴한 방 안에 이도하는 제 목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다. 많이 잠겼으나 이 정도면 그럭저럭 평범하게 들린다.
“침대에 누워서 밥 먹고 잠만 자랬잖아.”
-그렇게 했어. 하지만 그대가 부르기에.
“…누가 자고 있다가 그렇게 바로 대답하냐. 잠꼬대도 아니고.
-나는 늘 때를 잘 맞추잖아?
이도하가 눈을 감았다. 그는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숨만 골랐다. 제가 필요할 때 시오한이 늘 그곳에 있었던 건 그가 때를 잘 맞춰서가 아니었다. 그가 늘 저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화이람?
시오한이 이도하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약간의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이도하가 얼른 제 얼굴을 훔쳤다.
“잘 자란 말이야. 다른 생각하지 말고. 그냥 계속… 계속 자.”
내가 다시 네게 갈 수 있을 때까지.
“…아프지 마.”
-아프지 않아.
“넌 진짜 미련한 놈이야.”
-……
이도하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시오한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뒤에야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맞아. 그대에 관해서라면 내가 좀 미련해지는 편이지. 허나 그건 내가 미련한 탓이니, 그대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
-방구야.
지금 내가 뭘 들었지. 이도하가 잠시 귀를 의심했다.
“…누구야. 누가 당신한테 그딴 미친 농담을 가르쳐줬어?”
-아, 웃지 않네. 조금은 웃을 거라고 했는데.
“누구냐고.”
-소버스 경의 계약자. 곁에 두었더니 그대 얘기를 참새처럼 조잘거리던 걸.
아, 유세오 이 새끼. 이도하가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어지간하면 당분간은 오즈에 가 있으라고 했더니 이런 식으로 툭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온다. 어이가 없어서….”
시오한이 나지막이 웃는다.
-화이람, 밥은 먹었어?
이도하가 픽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말에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안 먹었어. 좀 있다 해 먹을 거야.”
원래부터도 식욕이랄 게 없어 배가 고파야만 뭘 대충 주워 먹는 이도하는 앞으로도 영원히 배가 고프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뭘 먹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이도하는 대충 둘러대었고, 그렇게 말하니 또 묘한 기분이 들어 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밥 좀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하는 엄마한테 선수를 치는 것 같은 모양새다. 그런데 시오한이 물었다. 걱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대가 직접?
이도하의 웃음이 조금 찌그러졌다. 그는 시오한에게 미역국이랍시고 황천으로 가는 지옥 늪 따위를 선보인 적이 있으니 이해 못 할 걱정은 아니었다. 이도하가 투덜거렸다.
“…야. 나도 라면 정도는 할 줄 알거든.”
-아, 라면.
시오한이 대답했다.
-김치는 있고? 밥도 같이 먹어.
이도하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시오한이 그를 따라 웃는 소리가 들린다.
“무슨 할아버지랑 얘기하는 것 같네. 방구니 뭐니 하는 그딴 이상한 농담 배우지 마. 당신 진짜 웃기니까.”
-다행이네.
이건 웃기라고 한 말은 아니지만, 어쨌든 웃었으면 다 됐다는 어투다.
-하지만 그대도 되도록 요리는 하지 말아.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했는지, 시오한이 결국 말했다. 웃음을 참은 이도하가 말했다.
“아주 하지 말라고는 안 하네.”
-하고 싶다면 해야지. 내가 먹을게.
“…아, 지금 내가 한 걸 내가 먹고 무슨 일 날까 봐 걱정하는 거야? 당신 그때 그거 먹고 탈 났었어?”
-그렇지는 않아.
“거짓말한다, 또.”
웃으며, 이도하가 눈을 문질러 닦았다. 축축하게 묻어나오는 것을 꽉 주먹 쥐어 손 안에 감춘 이도하가 말했다.
“…거짓말.”
-…정말 아프지 않았어, 화이람.
뭐가. 음식이? 아니면 죽음이? 이도하는 차마 묻지 못하고 이만 악문 채 숨을 삭였다.
-미안해.
시오한이 말했다.
“…당신이 왜?”
-모리온.
“…….”
-그대가… 그런 식으로 알게 하려던 건 아니었어. 그대는 아이를 염려했으니, 후에 그대가 사실을 알면… 마음 아파할 것 같기에.
이도하는 컴컴한 제 발끝 사이를 바라보며, 대답 없이 시오한의 말을 들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모리온은 결국 죽었을 것이고, 신은호는 그를 잃었을 것이다. 이별을 나눌 시간 따윈 없었을 것이고, 이유조차 몰랐을 것이다. 어느 순간 계약주의 죽음을 느끼고, 사라진 계약명을 보며 그때처럼 엉엉 울었을 것이다. 12살 최연소 계약자로 유명해진 아이가 금세 계약주를 잃어, 더는 계약자가 아니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며 후회했을 저를 이도하는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당장 제 앞에 놓인 것들이 너무 많아 아이를 ‘미뤄두어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을. 모리온은 어차피 감옥에 있으니, 일단 제 일부터 해결하고 그 뒤에 생각해도 된다고 여겼던 것을 후회했을 것이다. 제 탓이 아님을 알지만, 반쪽짜리 오지랖과 어설픈 동정의 끝은 그런 식이니까. 괜한 죄책감을 찌꺼기처럼 남기니까. 어쩌면 시오한을 원망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하여 그 아이가, 그대에게 후회로 남을까 봐. 그대를… 그대를 아프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 미안해, 화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