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그럴 거면 대체 엘하시온이 힘들게 우르슬라를 소환한 이유가 뭐였을까. 이도하는 잠시 의문이 들었다가 이 의문이 꽤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도하가 힘없이 비죽 웃었다. 흔히 계약주들이 모두 힘을 목적으로 계약자를 소환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엘하시온이 무엇을 기원하여 우르슬라를 소환했는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
“우르슬라의 동생이 엘하시온과 같은 18살 때 죽었다는 건 알겠죠, 유명한 사실이니까. 자살했다는 건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동생이 자살했지만, 우르슬라는 그 시간은 되돌리지 않았다. 연구원으로서, 그녀는 세상의 섭리를 그런 식으로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르슬라는 평생을 그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았다. 어쩌면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 동생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막지 ‘않았다는’ 죄책감. 그건 그녀의 치부였고, 그 단단하고 곧은 여자의 가장 연약한 부분이었다.
“아, 정말 이용하기 딱 좋은 감정이죠. 죄책감. 늘 선한 사람들이 지는 이유이기도 하고.”
주승현이 말했다.
“동생도 죽도록 내버려 두더니, 계약주조차 죽일 거냐, 이대로 계약주가 죽으면 어떻게 하냐. 네가 정말 견딜 수 있겠냐. 아무것도 안 할 거냐. 계약주도 죽고, 나라도 버리는 꼴이 아니고 뭐냐….”
개미 떼가 몰려들 듯, 그들은 그 죄책감을 좀먹으며 그녀를 갉아냈다.
“차라리, 그 시간 속에 살아라.”
모든 걸 잃어버린 채 아무도 널 바라지 않을 현실로 돌아오지 말고. 그렇게 슬픔은 그녀만의 것으로 두고, 모두가 침묵하기로 했다. 그게 나라를 위해서 옳은 선택이었으니까. 당시 독일은 이미 우르슬라의 마력으로 모든 정책과 법안을 바꾼 뒤였다. 아이라의 총재는 물론이고 각국 아리아의 고위 인사들도 이 일을 다 함께 묻어두기로 했다. 언제 그들의 일이 될지 모르는 일을 굳이 감정 이입해 참견하고 들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똑똑한 인간들이라더니. 마력에 눈이 멀어서 그렇게 했다가 시간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생각해 보지 않은 모양이지.”
이도하가 말했다. 주승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시간이 왜요?”
이도하가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계의 오류는 세계 안에서 인식할 수 없다. 2001년, 16살의 이도하. 6살의 이도하. 그 뒤엉키고 쪼개진 시간에 대해서 말을 하는 건 소용없는 일이었다.
“우르슬라가 이대로 계속 실패할 거라고 누가 장담하지? 천 년 전의 과거인데, 우르슬라가 계약주를 되살리는 데 성공하면 지금의 이 시간이 어떻게 될지 정말 아무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고?”
주승현은 가늠하듯 가만히 이도하를 보았다.
“우르슬라가 계약주를 살리려고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뭐?”
“신기하네요. 아무도 그렇게는 생각해 보지 않은 것 같은데… 도하군은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봐요.”
그 말에 이도하가 얼굴을 찌푸렸다.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
“그 여자는 바꾸려고 하고 있었어.”
이도하가 으르렁거렸다. 주머니 속에서 이어폰을 만지작거리던 손에 꽉- 힘이 들어간다. 손톱이 파고들어 간 손바닥이 아파올 정도로.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바라본 적이… 그래요, 이도하군은 없겠네요.”
“…….”
“그럴 때가 있답니다. 안 되는 걸 알지만, 그래도 해야만 할 때가. 물론 시도는 여러 번 했을 테지만, 우르슬라는 이대로 실패만 거듭할 거예요.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요. 그게, 이미 천 년 전에 정해진 인과니까.”
여러 번. 고작 그 정도로 억겁이라고 할 만큼 쌓인 시간을 설명하니 참 초라하다. 주승현이 대답했다.
“천 년 전에 이미 벌어진 일이에요. 우르슬라는 천 년이고 이천 년이고 과거를 얼마든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거기에 쌓인 수많은 인과를 뒤엎을 만한 능력은 없어요. 인소더블이라고 해도 그게 우르슬라의 한계고. 애초에 우르슬라의 특기가 ‘시간’이 아니라 ‘태엽’인 이유를 모르겠어요?”
정해진 궤도를 밟아 감겼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올 뿐인 태엽. 이도하가 고개를 돌려 주승현을 보았다. 까만 눈동자가 피하지 않고 마주 본다. 그녀가 말했다.
“우르슬라는 이대로 시간을 되풀이하며 그 시간에 갇혀있을 뿐이에요. 계약주가 살아있는 시간에.”
“그럼 다 그 여자가 자초한 일이네.”
이도하가 사납게 말했다. 누가 죄책감을 자극했든 말든, 시간을 다시 되돌아가는 건 결국 그녀의 선택이었으며, 수백, 수천만 번을 반복하며 그 시간 속에 스스로를 가둔 건 역시 그녀 본인이다. 미쳐 버리면서도 끝까지 놓지 못한 것 역시. 그 여자는 결국 끝까지 무엇 하나 제대로 결정하지 못한 것뿐이다. 절 붙잡고 늘어지는 나라도, 제가 놓을 수 없었던 계약주도.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이도하가 필요한 건 그 사실 하나였다. 주승현은 가만히 그런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만… 도하군은 어때요?”
“그 여자가 그렇게 불쌍하고 가엽거든 당신이 직접 가서 죽여주기라도 하지 그래.”
“내 말은, 도하군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싶어서.”
“…뭐?”
“아이라의 고위급 인사쯤 되면 오즈의 동향에 대해 지속적으로 보고 받아요. 정부 인사들도 마찬가지죠. 이리스티리움의 황제라면 당연히 가장 요주의 인물이에요. 스스로의 위신도 그렇거니와… 인소더블인 이도하군의 계약주이기도 하니. 근래에 건강이 썩 좋지 않다고 하는 것 같던데.”
“이사님!!”
심장이 졸아드는 기분으로 조마조마하게 둘 사이를 지켜보고 있던 김윤혜가 비명처럼 주승현을 불렀다. 이를 악물었는지, 주승현을 보는 이도하의 턱이 움푹 들어가 있다. 금방이라도 섬광이 돋을 것처럼 눈동자에 기이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고, 살갗이 저릿저릿하며 솜털이 주뼛 서는 섬뜩함이 삽시간에 주변을 에워쌌다. 공기 한 올 한 올이 모두 얇은 칼날이 되어 당장이라도 그들을 저며 놓을 것 같았다.
집행이사고 뭐고, 김윤혜는 이제 이 여자의 머리를 쳐서 기절이라도 시키고 싶어졌다. 목숨이 열두 개인 것처럼 구는 것은 바로 주승현이었다. 김윤혜는 그녀가 이쯤에서라도 입을 닥치길 간절히 바랐으나, 주승현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오르페노스 황제, 목숨을 노리는 이들이 꽤 많지 않아요?”
김윤혜가 질끈 눈을 감았다. 주승현의 피를 분수처럼 뿌리며 목이 뎅겅 잘리거나, 사지가 갈가리 찢어져 버린다든가, 가루가 되어버린다든가, 하여간 상상할 수 있는 엄청나게 잔인한 일이 그대로 일어나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조금도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 어마어마한 분노가 여전히 주변을 꽉 채우고 있었으나, 주승현은 목이 잘리지도, 몸이 찢어지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니 조심하라고 말하는 거예요, 이도하군. 나는 계약자가 아니지만… 나라면 그렇게 했을 거거든요. 우르슬라처럼.”
주승현이 말했다.
“미쳐버려도 좋으니,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있는 시간에 머물고 싶은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
“…….”
“감히 누가 이도하군을 건드리겠냐 생각해야 맞겠지만, 지금도 봐요. 저들은 뭘 건드리고 있는지도 몰라요. 게다가 인소더블은 소환에 관해서라면 꽤 아이러니한 부분이 있잖아요?”
한계가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그 때문에 인소더블은 소환만으로도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하는 것. 강대하다고 할 만하지만, 정작 그 힘을 제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리어 거꾸로 무력해지는 꼴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꽤 구미가 당길 법한 선례도 있겠다… 탐욕에 눈이 멀면 뭔들 못하겠어요.”
까닥, 주승현이 건조하게 티비를 눈짓했다. 소리를 죽여 놓은 화면에는 ‘계약 양도’라는 이 아이라의 내부 불법 실험이 향후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나와 토의를 하고 있었다.
“우르슬라를 가여워하건 말건, 그건 이도하군에게 달린 일이죠. 말했듯이, 나는 조심하라고 말하고 싶은 거예요. 서로를 과소평가하면 남는 건 모두가 잃기만 한 참극뿐일 테니.”
주승현이 의자 등받이에 걸쳐놓은 재킷을 챙겼다. 이제 가려는 모양새였다. 그 순간에조차 가라앉지 않고 살벌하게 날 선 공기에 김윤혜는 살갗이 따끔따끔할 정도였는데, 주승현은 정말 이도하가 절 죽이든 말든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말했다.
“이도하군을 걱정한다는 말이 이제 좀 믿을 만할까요? 그냥 놔두라는 말도.”
“그래, 꽤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기는 하네.”
이도하가 빈정거렸다. 사자가 으르렁거리는 듯 갈라지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대로 갈 것 가던 주승현은 그런 이도하를 보며 잠시 서 있었다. 곧 그녀가 말했다.
“…말해 두겠는데, 나도 이도하군이 그렇게 살 수 있기를 바랐어요. 평범하게, 아무 일 없이. 이런 일 따위는 하나도 모르는 채로. 진심이에요. 안 믿겠지만, 김윤혜 연구원을 걱정한 것도, 도운 것도 전부.”
이도하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두어 발자국 물러선 발뒤꿈치가 금세 창문에 닿아 멈추었다. 그는 차가운 창문에 뒷머리를 툭 기대었다. 들끓던 분노도, 적대감도, 다 허무하게 흩어져 버린 것 같은 얼굴이 이제 무미건조하게 주승현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지, 왜?”
“…저들이 도하군을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니까.”
주승현이 대답했다. 마치 정말로 이도하를 안타까워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도하가 냉소했다. 문득 처음 그가 계약자가 되었을 때 김윤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뭐랬더라. 평범한 일상에 안녕, 뭐 그렇게 송별회나 하라는 식의 농담이었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 떠오르니 이도하는 도무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참 고맙네.”
“…….”
“아주 고마워 죽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