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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45화 (145/250)

145화

거칠게 뺨을 닦아낸 이도하가 손바닥으로 눈을 누르고서 숨을 골랐다. 콜록, 콜록- 주승현이 목을 붙잡고 기침했다. 옷을 털어내자 살얼음이 잔뜩 떨어진다.

“그래도 돼요. 이도하군 말마따나, 세상이 어떻게 생겨 먹었든 사실 꼭 알 필요 없지. 이도하군이 알았든 몰랐든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벌어졌을 일이에요. 우르슬라?”

주승현이 가볍게 웃었다.

“그녀는 벌써 십수 년 동안 그러고 있었어요. 이도하군이 모르는 동안에도 쭉. 계속 그러고 있는다고 뭐 달라질 것도 없어요. 말했듯이, 세상은 여태 그런 모양이었으니까.”

목을 고른 주승현이 천천히 말했다.

“계약 양도 실험, 어차피 황제는 현자의 탑에서 이루어지는 그 불법 실험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어요. 이도하군이 아니었더라도 그 실험은 이뤄지지 못했을 거라는 말이에요.”

지하 도박장에서 현자의 탑으로 흘러 들어가던 불법 자금, 그 자금이 현자의 탑으로 흘러 들어가는 데 일조한 발라리온 출신의 연구원들. 이리스티리움의 황제- 시오한은 현자의 탑이 불법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는 걸 짐작했고, 이미 직접 암군을 움직여 그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 실패도, 진압도 모두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도하가 중간에 끼어듦으로써 조금 더 빠르고 격렬하게 판이 뒤집어졌으며, 황제의 분노까지 돋우었을 뿐.

이도하가, 신은호와 마주치게 했을 뿐.

“모리온은 이미 죽을 날이 정해진 사람이었으니, 은호 그 아이는 어차피 계약주를 잃었을 거예요. 모리온이 없이는 그 애도 없고, 그 애 없이는 실험도 진행될 수가 없어요. 그대로 끝났겠죠. 지금이라고 다를 것 없어요. 저렇게 요란을 떨어대도 어차피 저건 실패한 실험이니. 다, 그냥 그대로 흘러갔을 거예요.”

이도하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레 제 발에 저린 시설의 원장이 언론에 신은호를 내어놓지도 않았을 것이고, 아이가 세상에 알려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도하도, 아무도 모르는 채로도 아이는 어차피 가장 사랑했던 사람을 잃었을 것이다.

“달라진 거라면 뭐… 지금은 그래도 세상에 그 애를 걱정하는 사람이 한두 명은 있으려나. 이도하군이 있으니 최소한 한 명은 있겠네요.”

옷을 털고 일어나며, 주승현이 말했다. 아닌가. 그녀가 대수롭잖게 중얼거렸다.

“별로 큰 차이는 아니죠? 그러니까 다 잊어도 돼요. 그냥 둬도 되고. 이도하군과는 상관없이 벌어진 일들이니 도하군 탓도 아니고, 이도하군이 뭘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에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쉬운 세상에서 살면 돼요. 평범한 24살 대학생으로.”

“…….”

“그래도 돼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김윤혜가 기가 막혀 말했다. 헛웃음만 지은 이도하가 눈을 떴다. 완전히 검은색으로 가라앉은 눈동자가 차갑게 주승현을 응시했다. 이미 그렇게는 될 수 없다는 걸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또 이도하가 정말 마음만 먹는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뭘 하든, 하지 않든, 그건 다 이도하군 선택이에요. 말했듯이, 난 도하군을 걱정한 것뿐이거든요.”

“걱정?”

이도하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요즘은 이용해 먹는 걸 걱정이라고 하는 모양이네.”

주승현이 으쓱 어깨를 추켜올렸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건 인정해요. 하지만 말했던 것처럼, 도하군이 아니었더라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내가 도하군 말처럼 대가리는 아니라도 꽤 높으신 분인데, 굳이 인소더블인 이도하군을 화나게 하면서까지 뭐 하러? 걱정이라는 말이 좀 허무맹랑하면… 그래요.”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경고로 생각해요. 그게 나랑 좀 더 어울리는 것 같으면.”

“…….”

“식자우환이라고 하지만, 아는 게 힘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좀 더 들어볼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된 마당에 내가 더 떠든다고 해서 나쁠 게 있어요? 어차피 이도하군이 마음만 먹으면 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거 아닌가.”

목을 매만지며, 주승현이 말했다.

“우르슬라 말이에요.”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고,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김윤혜는 여전히 이도하의 팔을 잡은 채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정적은 더 짙어지고, 이대로 정말 주승현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이도하가 돌아섰다. 어디 한 번 지껄여 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주승현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김윤혜에게 물었다. 케이크 먹을래요? 난 먹을 건데. 그러더니 정말로 케이크를 꺼내 잘라낸다. 김윤혜가 황망한 헛바람만 들이켰다.

창가에 기대선 이도하는 소리 없이 숨을 골랐다. 한강이 훤하게 보이는 창밖은 해가 화창하며 도로에는 차가 가득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흔한 보통의 날이었다. 그런데 그게 몹시도 기이하게 느껴졌다. 밴드가 잔뜩 붙은 팔이며 다리며 전부 욱신거린다. 이도하는 피가 배어 나온 밴드를 거스러미 긁듯 만지작거리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우르슬라는 뭐랄까… 저들이 함께 묻은 공공연한 비밀 같은 거예요.”

주승현은 이제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커피머신이 작동하는 소리가 조용하게 울렸다.

“아이라의 총재는 물론이고 각국 아이라의 고위 인사들, 국가 원수들도 다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우르슬라를 그렇게 감쪽같이 세상으로부터 숨길 수 있었겠어요. 눈감아주는 사람이 있지 않고서야.”

커피 마실래요? 주승현이 그를 향해 물었고, 이도하는 돌아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대신 열심히 커피를 뽑아내고 있던 커피머신이 모래가 되어 폭삭 주저앉았다. 졸졸 내려오던 커피가 바닥으로 죄다 흘렀다. 아닌가 보네. 주승현이 커피잔을 옆으로 치웠다.

“인소더블인 우르슬라가 계약자가 되었을 때 독일에서는 퍽 기대가 많았죠. 마력이 아니더라도, 우르슬라는 연구원이기도 했으니까. 보통 계약자들은 마력을 매개하기 위해 아이라에 협조적이기는 하지만, 연구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불편한 감정을 갖잖아요? 도하군도 알 거예요.”

이도하는 무심코 김윤혜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도하의 담당 연구원인 김윤혜는 가시방석에 앉은 사람처럼 불편해 보였다. 시선을 내린 그녀가 앞에 놓인 케이크를 뭉개며 괴롭혔다.

황제가- 계약주가 그렇게 잘생겼다던데 어때요? 감정적으로는 어떻게 느껴져요? 막 애정이 샘솟아요? 마력 소모는 어때요?

호기심이고 일상의 대화 같았던 그들 사이의 그 모든 질문들이 사실은 연구의 일환임을 김윤혜도, 이도하도 알고 있었다. 둘은 이미 너무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서로를 봐 왔기 때문에 익숙해져 있을 뿐. 주승현의 말처럼, ‘불편하다’ 정도로 슬쩍 덮어놓을 수 있는 정도.

그런 와중에 본인이 연구원이면서도, 또 인소더블인 우르슬라가 계약자가 되었으니 그녀는 마치 계약과 관련된 모든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열쇠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세상일이 뭐 다 그렇듯… 생각대로 풀리지가 않죠. 우르슬라가 연구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기 시작했으니까.”

“어째서?”

“엘하시온, 우르슬라의 계약주가 천 년 전 사람이라는 건 이미 봤을 테고….”

주승현이 말했다.

“본인이 천 년 전의 시간에 간섭하는 게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천 년 전의 오즈는 오즈에서도 이름조차 잊혀 전설로만 남아 있는데, 마땅히 잊혀 그렇게 가라앉은 역사를 이런 식으로 시간을 비껴가 파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아이라에서는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지만, 우르슬라는 그 천 년의 시간차를 몸소 느끼고 있었을 테니 그저 말뿐인 설득에 설득되겠어요? 그녀 본인이 연구원이라는 사실이 도리어 아이라에는 독으로 작용한 셈이죠.”

“그럼 우르슬라가 계약한 초기에 공개됐었던 자료들은….”

김윤혜가 물었고, 커피를 마시며 주승현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다 구라예요. 그럴듯하게 만들어 낸다고 연구원들이 애먼 힘을 썼지.”

그리고 우르슬라는 소환도 거부하려고 했다. 차마 그러지 못했던 건 주위의 압력 때문이었다. 인소더블은 소환만으로도 어지간한 계약자가 엄청난 힘을 썼던 것보다도 많은 마력을 매개할 수 있으니, 나라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그녀의 가족은 물론 친구들까지 그러지 말라며 그녀를 붙잡았다.

우르슬라는 연구에 협조하지는 않아도 계약자로서 오즈에 소환되었고, 마력을 매개했다. 우르슬라와 독일, 아이라, 그들은 그쯤에서 합의를 보게 된 것 같았다.

“누군가 엘하시온을 죽이려고 한다. 계약주가 죽을지도 모른다. 우르슬라가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그건 명백히 실수였다. 그녀는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나뿐인 인소더블, 소환에 동의하여 마력을 매개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는 이 인소더블의 계약주가 죽는다면 이제 그 마력조차도 바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사실을 정부에서 알면 어떻게 나올지 우르슬라가 몰랐을 리 없었다.

“아마 본인도 불안감에 못 이겨서 그랬을 거예요. 같은 인소더블이라고 해도 우르슬라는 도하군과는 달라요. 물리력을 행사하는 특기가 아니고, 당시 계약주인 엘하시온은 어려서 이미 소환만으로도 버거웠다고 해요. 우르슬라가 힘을 행사할 만한 마력을 제공할 수는 없었죠. 인소더블이라고 해도 오즈에 가면 그녀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던 거예요. 계약주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꼈으면서도 막을 방법이 없으니,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 않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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