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이사님-”
“게다가 증거도 없잖아요? 도하군은 엄밀히 말해서 독일에 그냥 쳐들어가서 우르슬라를 만나고 온 거예요. 설령 그쪽 인사를 만났다고 한들 독일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할 것 같나요? 독일은 지금 아무것도 공개할 의무가 없어요. 범법자는 도하군이지. 별것 아닌 걸로 상황이 어떻게 뒤집어질 수 있는지 이만하면 제대로 보지 않았어요?”
“…김윤혜씨, 넌 뭘 믿고 여기 와 있었어?”
허리를 펴고 절 내려다보는 주승현을 바라보며, 이도하가 김윤혜에게 물었다. 그게 정말 김윤혜게 질문을 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김윤혜 본인도, 주승현도 알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주승현이 재미있다는 듯 턱을 들었다.
“이도하군, 적이 누구인지 잘 판단해요.”
“적?”
이도하가 눈가를 일그러트렸다.
“그 적 대가리가 지금 여기 있는 것 같은데.”
“오, 아이라 전체를 적으로 돌리려고요? 하기야, 이도하군에게는 뭐 대단한 일도 아니긴 하겠네요.”
“아, 당신은 몰랐다? 그러기엔 지껄이는 꼴이 우르슬라 일까지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에.”
“도하군이 말했던 것처럼, 내가 대가리는 아니라도 좀 높으신 분이라서요.”
“…….”
“아차.”
말실수를 했다는 듯, 그녀가 깊이 웃었다. 이도하가 일어섰다. 둘둘 걷어 올린 바지에다가 팔이며 다리에 오색찬란한 밴드가 잔뜩 붙어 있는 이도하는 행색이 꽤 우습다고 할 만했으나, 그 주위로 아지랑이처럼 왜곡되는 대기는 전혀 우습지 않았다. 김윤혜가 불안한 얼굴로 물러섰다.
“뭐 하자는 거야.”
새까만 눈동자에 푸른빛이 감돌았다. 주승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그녀가 고개를 기울였다.
“우르슬라를 가여워하는 중이죠. 높으신 분이라고 해서 저런 내부 실험에 다 연루되어 있지도, 동참하지도 않는다는 걸 몸소 보여주는 중이고. 이도하군을 걱정하고 있는 중이기도 해요.”
“당신이?”
이도하가 냉소했다. 공기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숨을 내뱉으면 입김이 뿜어져 나왔고, 금세 서리라도 내릴 것 같았다. 공기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김윤혜는 당혹스럽게 그런 이도하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도하를 오래 봐 왔지만 이런 식으로 그의 특기가 감정적으로 흔들리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누구보다 이도하의 특기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이도하의 특기가 무서웠던 적 역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처음으로… 무서웠다. 이 집을 가득 삼켜가고 있는 특기가 아무것도 분간하지 않고 그녀마저 해칠 것 같았다.
“우르슬라의 일까지 다 알고 있다면서, 집행 이사씩이나 돼서 저딴 내부 실험에 동참하지는 않았는데 막지도 못했다? 못 막은 게 아니라 안 막은 거겠지. 그래 놓고 우르슬라는 또 가엽다고? 개소리도 좀 정도껏 해야 믿어보는 시늉이라도 할 거 아니야. 이제 와서 이딴 식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구는 이유가 뭐야.”
“왜 물어볼까… 도하군이 마음만 먹으면 누구 입이든 못 열겠어요. 안 그래요? 사실 입까지 열 필요도 없지.”
주승현이 이도하의 손을 쥐고 제 머리에 가져다 대었다.
“궁금하면 한 번 들여다봐요.”
“!!!”
순간 사색이 된 이도하가 주승현의 손을 뿌리쳤다. 주승현은 살얼음이 낀 손을 몇 번 움직여보았다. 손끝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식자우환이라고… 편리하긴 하지만, 들여다보는 게 별로 좋은 기분이 아니죠?”
별거 아니라는 듯, 그녀가 가볍게 손을 털었다. ‘우자의 눈’. 주승현의 특기는 일종의 투시로 세간에 알려져 있으나 그녀를 직접 본 지금 이도하는 그게 얼마나 단순하고 빈약한 단어에 불과한지 깨달았다. 이 여자의 ‘투시’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투시다. 타인의 생각까지도-
“이도하군 말이 맞아요. 막는 거, 그거 별로 어렵지 않지.”
주승현이 말했다.
“내부 감사 싹 돌려서 허가받지도 않은 불법 실험 증거 찾고, 비인도적으로 실험했다는 거 공개해서 밀어버리고, 그게 뭐 별건가요. 이도하군 말처럼 쉬운 일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 끝이 나겠어요?”
“뭐?”
“생각을 뿌리 뽑을 수 있겠어요? 발상이라는 거 말이에요. 그게 꼭 전염병 같은 거거든요. 한 번 떠오르면 어지간해서는 사라지지가 않아요. 계약자를 양성하고, 생산하려는 시도? 그런 건 이미 예전부터 아주 많았어요. 대충 별것 아닌 것으로 넘어가고, 덮고, 묵인하고… 이번 계약 양도 실험도 그중 하나일 뿐,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말이에요.”
그녀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신은호, 그 애를 보니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세상은 원래 이런 모양이었어요, 이도하군.”
까득- 이를 악문 이도하가 밀치듯 주승현의 목줄기를 틀어쥐었다. 그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우우웅- 이명이 울리며 공기가 진동하기 시작한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덜덜덜 공간이 흔들렸다. 김윤혜가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머그컵이 떨어져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진동에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 김윤혜가 귀를 틀어막았다. 그녀는 겁에 질려 이도하를 바라보았다. 섬광이 돋은 이도하의 눈동자가 칼날 같다.
저러다가 죽일지도 몰라- 김윤혜는 진심으로 생각이 들었다. 이도하가 누군가를 죽일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도하에게 그건 숨을 쉬는 것보다도 쉬운 일이기 때문에. 정말로 이도하가 마음먹는다면 아주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김윤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끔찍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저도 모르게 달려들었다.
“이도하씨!! 그러다 죽어요!”
“그러려고.”
“미쳤어요?!”
“우르슬라를 보고도 모르겠어요?”
목이 졸린 것은 남 일이라는 듯, 주승현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 순간 이도하는 깨달았다.
“당신이지?”
이도하가 물었다.
“윤혜한테 우르슬라의 스크랩을 흘린 게.”
“!!!”
이도하의 팔을 붙잡고 있던 김윤혜가 번뜩 주승현을 돌아보았다.
‘이도하씨, 내가 정말 이해가 안 가는 건요. 나는 그 스크랩을 도대체 어떻게 본 걸까요?’
독일이 기밀 처리한 자료들, 그런 자료가 있었다는 것조차 모두 까맣게 잊어버릴 정도로 흔적을 지워버린 우르슬라의 기록들. 집행 이사 정도의 지위라면 그렇게 깡그리 삭제된 기록들 중 하나에 접근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간에 수작을 부려서 그 사형수 새끼가 날 소환하도록 만든 것도, 그래서 그 망할 실험을 다 엎어버린 것도, 전부 당신이지.”
김윤혜가 지워진 우르슬라의 기록을 발견하도록 한 ‘우연’. 어쩌면 정말로 성공했을지도 모를 계약 양도 실험에 ‘하필이면’ 황제의 계약자인 이도하가 소환되도록 만들어, 관련자들을 싹 다 처형대로 밀어 넣은 ‘우연.’ 소환된 지하 감옥에서, 천 년 전의 소환진을 발견하게 만든 ‘우연.’ 그 소환진이 맹약과 연관되어 있던 ‘우연’.
그 모든 우연들 뒤에 서 있던 건 전부 이 여자였다.
주승현이 가늘게 눈을 접었다.
“이런,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어요?”
“어쩌라고.”
이도하가 으르렁거렸다.
“어쩌라고. 우르슬라, 우르슬라, 시발 그 망할 놈의 우르슬라 좀 제발 집어치워, 지겨워 죽겠으니까. 그래서 그 여자가 그렇게 미쳐버렸는데 그게 뭐? 계약 양도, 불법 실험, 신은호, 대체 나보고 뭘 어쩌라고?!”
우르슬라가 미쳐버린 이유. 그 여자가 깊은 오두막에서 먼지 쌓인 물건처럼 그렇게 처박혀버린 이유. 그래, 이도하는 그런 것 따위는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적 없었다. 계약주, 계약자- 그 지독한 관계 따위도, 그 관계에 얽매여 울고 웃는 인간들도. 이도하는 제 갈 길 하나도 찾기 힘들었다.
“세상이 얼마나 좆같이 생겨 먹었든 난 관심 없으니까 니들끼리 알아서 해.”
그저 어떻게 하면 이 비틀어진 시간을 제자리로 돌릴 수 있는지, 그냥 이대로도 괜찮은 건지. 그것만 알면 되었는데. 행여라도 만에 하나, 천에 하나라도 저가 다시 시오한을 잊을지도 모르는 일 따위는 절대로 없을 거라고. 지금 이 시간은 계속 이대로일 수 있다고, 이대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맹약이 도대체 뭔지, 왜 필요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렇게 해줄 거라고, 누군가 속시원히 말해줬으면 좋겠다. 모리온, 신은호, 우르슬라- 그런 사정들 따위 차라리 몰랐던 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그런 일 따위, 전부 그와는 관계없었던 다른 세상의 일이었던 때로.
이도하가 꽉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여자를 치워버리면, 죽여 버리면 그렇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냥 편하게 다 해결되는 것이다. 목이 졸린 주승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도하씨-!! 김윤혜가 그의 손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쓴다.
“그럼 다 잊어버려요.”
그때, 주승현이 속삭였다. 그런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이도하가 눈을 깜빡였다. 순간 눈꺼풀이 망막을 덮고 지나가는 그 찰나가 길게 늘어진다. 장막이 올라가듯 드러난 시야가 변했다. 초점을 잃어가는 검은색 눈동자가, 어느 순간 황금색이 되어 그를 본다. 검은 머리칼이 황금색으로 길게 물결쳤다.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헉- 이도하가 숨을 멈추었다.
이명이 뚝 끊겼다. 당장이라도 내키는 대로 전부 찢어버릴 것처럼 진동하던 공기도 싹둑 자라낸 듯 사라졌다. 불에 댄 듯 이도하가 화들짝 주승현을 놓았다. 주승현이 주르륵 무너졌고, 이도하가 주춤 물러섰다. 그가 멍하니 제 손을 바라보았다.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비틀거리는 그를 황급히 붙잡은 김윤혜가 무어라 외쳤으나,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이도하가 꽉 주먹을 쥐었다.
제가 감히- 감히 어떻게.
내가 너를 또 어떻게.
시오한.
“이도하씨!”
뚝, 손바닥에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후두둑, 연이어 떨어졌다. 이도하의 팔을 붙잡고 있던 김윤혜가 놀라 그를 보았다.
어떡하지, 시오한. 하나도, 하나도 괜찮지가 않다.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