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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43화 (143/250)

143화

“주승현?”

이도하는 제가 뭘 잘못 봤나 싶었다. 하도 지금 머리가 얼얼하고 제정신이 아닌 지경인가 싶으니 이제는 생뚱맞은 헛것을 다 보나 싶어 한껏 인상을 구기는데, 그 생뚱맞은 헛것은 사라지기는커녕 태연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케이크 상자를 들어 보였다.

“이도하군이 와 있는 줄 알았으면 좀 덜 단 걸로 사 올 걸 그랬네요. 단 거 좋아해요? 초콜릿 케이큰데.”

마치 이도하가 옆집에서 잠깐 놀러 오기라도 한 것 같은 어투였다. 왜 거실에 멀쩡하게 있던 테이블 대신에 이도하가 누워있는지에 대한 의문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진짜 주승현이다. 이도하는 대답 대신 김윤혜를 바라보았다. 초콜릿 케이큰지 무슨 케이큰지 하여간 사 왔다는 걸 보면 김윤혜가 여기 있다는 걸 알고 왔다는 소리고, 김윤혜도 놀라는 기색이 없는 걸 보니 주승현이 올 걸 알고 있었다는 소리다. 이 여자가 여기서 왜 나오냐, 하는 눈빛에 김윤혜가 잠깐 눈을 굴리더니 말했다.

“피신?”

“뭐?”

“도하군, 김윤혜 연구원이 좀 무모한 거 알아요? 그대로 두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겠다 싶어서 내가 데려왔어요.”

식탁 위에 케이크 상자를 내려놓고, 재킷을 벗어 의자 위에 걸쳐놓으며 주승현이 말했다. 제집처럼 아주 자연스럽다. 이도하의 시선을 받은 그녀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딘지도 모르고 있었어요? 여기 내 집이에요. 사는 데는 아니고 그냥 괜찮아서 사둔 집이라 물건도 다 새 거랍니다. 편하게 있어요.”

씩 웃으며, 주승현이 이미 그 집 거실에 요와 베개에 이불까지 잘 덮고 누워 있던 이도하에게 말했다. 이도하는 저도 모르게 제가 덮은 이불을 한 번 보고는 김윤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된 거다, 하는 식으로 김윤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렇게 된 걸로 모든 게 평화로울 리 없었다. 김윤혜가 얼굴을 구겼다. 그렇지 않아도 화가 나는 와중에 제가 왜 주승현의 집에 무려 피신을 와 있는지 설명하려니 참 난감하고, 짜증 나고, 하여간 아주 그냥 다 좆같다는 얼굴이었다. 김윤혜가 말했다.

“내가 저번에 보내준 파일 기억해요? 그거 보내서 나서 나 완전 다 털렸어요. 핸드폰, 컴퓨터, 이메일.”

아이라 한국 지부 연구 소장 이태학. 아이라의 핵심 간부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남자가 아이라의 불법 실험에 관여했다는 문서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도하는 김윤혜가 ‘피신’이라고 말한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김윤혜는 그 불법 실험에 아이라가 관여했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그 마당에 핵심 인사의 증거 파일까지 가지고 있으니 이건 정말 ‘피신’을 했어야 마땅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걸 왜 주승현이? 고개를 든 이도하는 주승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빛이 매서운 반면 표정과 말투가 부드러워 별로 티가 나지 않았는데, 이도하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웃는다.

“똑똑한 인간들이 참 나쁜 짓도 똑똑하게 하죠. 모여서 작당을 하면 무서운 것도 없어지고. 개미 떼를 우습게 보면 안 돼요.”

이도하가 얼핏 티비에서 보았던 모습과 아주 똑같았다. 그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꽤 예전인 것만은 분명하고, 대충 서른도 훌쩍 넘었을 텐데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꽤 난감해질 수 있거든요.”

주승현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도하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것만큼 키가 큰 이 여자는 소리 없이 걷는 게 마치 표범이 걷는 것 같았다. 소파에서 리모컨을 찾아 든 그녀가 티비를 켰다. 채널을 바꿀 것도 없이 뉴스 화면이 곧바로 나타났다. 무려 특보였다.

번쩍이는 플래시 불빛 속에서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다. 그 밑에 아주 굵게 쓰인 정자를 본 이도하는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아이라 연구 소장 이태학, 눈물의 양심선언]

“허.”

-……의 탑과 함께 아이라에서 내부적으로 불법 실험을 진행해 오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것입니다. 이태학 연구 소장은 자신이 이 모든 불법 실험을 계획하고 이끌어 왔으며, 책임 역시 모두 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얼마 전 최연소 계약자로 새로운 기록을 세웠던 신모 군 역시 이 불법 실험에 연루된 것으로 알려져 국민들의 충격을 사고 있는 가운데, 이 소장은 이 사건으로 인해 신모 군의 계약주가 사망했으며, 이에 대한 죄책감에 모든 걸 고백하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만 ‘계약 양도’ 실험으로 알려진 이 불법 실험을 감행했던 이유는 오직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였으며, 이 실험으로 인해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에 또 주의를 다했으나 이와 같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며, 국민의 어떤 단죄도 달게 받겠다고…….-

“저 미친 노인네가…!”

기가 막혀 입을 벌리고 있던 김윤혜가 빠드득-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

“보다시피 저쪽에서 먼저 선수를 치는 바람에… 상황이 좀 변했어요.”

주승현이 이도하의 무릎 위로 핸드폰을 던졌다. 툭, 이불 위로 떨어진 핸드폰 화면에는 기사의 댓글창이 떠 있었다. 하루에도 꼭지만 수십 개씩 올려대는 어중이떠중이 찌라시 뉴스가 아니라, 진짜배기 공중파 뉴스였다.

존나 개미친 계약 양도??????? 양도???????????????????????????? 이 시발놈들이 왜 애미애비도 양도한다고 하지 도랐나 진짜 근데 뭐 이 개도른 발상을 누가 했다고 이태학????????????????이태학?????????????????????????????????

ㄴ이 새끼는 물음표살인마야 뭐야

ㄴ도랐나 불꽃 패드립 오졌네 계약주가 애미애비냐?

ㄴ모르면 제발 주둥이 닫고 있자 계약자들한테는 부모 양도한다는 소리나 계약주 양도한다는 소리나 그게 그거라고 병시나

ㄴ미쳤다 진짜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태학이 이딴 실험을 주도 했다고? 내가 보기에는 이거 뒤에 누가 있다고 본다 이태학이 그럴 양반이 아니다 저 양반 젊었을 때 아이라 자정 활동에 누구보다 앞장선 인간인데

ㄴ나이 들고 보니 존나 욕심이 생겼나보지 솔직히 발상 자체는 존나 천재적 아님? 실험 성공해서 진짜 양도 되면 수수료만 떼먹어도 씹부자되겠네

ㄴ빡대갈아 수수료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이태학이 그래도 아이라 거의 1세대 급인데 살날도 얼마 안 남은 노인네가 돈이 궁해서 저랬겠냐?

ㄴ그럼 뭐 때문임

ㄴ진짜 나라를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 세상 돌아가는 꼴 봐라 인소더블 하나에 나라가 이리 들썩 저리 들썩 하는데 저 정도 양반이면 그 꼴 보기 힘들었을 수도

ㄴ 나라를ㅋㅋㅋㅋ위해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염병났다 진짜 대환장파티하네

나는 이태학 진심이었다고 본다. 솔직히 인소더블 특별법 백날 발의하고 난리쳐봤자 지들끼리 이빨깔 뿐이지 그 대단한 이모씨가 배째라 하면 어떻게 할 방법 있음??? 없음. 1도 없음. 그냥 인소더블님 제발 마력 매개해주세요 하고 기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는데 나라 하나가 겨우 개인한테 이만큼이나 의지한다는 게 존나 기형적인 구조라 이거야. 계약은 안 그래도 운과 확률과 운명 같은 거에 의지하는 불확실한 시스템인데 그나마도 계약주 죽거나 계약자 한 명 죽으면 끝난단 말임 둘 다 두 번 다시 계약 못 하니까 ㅇㅇ 우리나라에 계약자는 200명쯤 된다 해도 특기자는 존나 많을 텐데 계약이 양도가 되면 그 많은 특기자들이 다 잠재적 계약자로 활동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거. 로또 맞을 확률로 계약자가 200명이 생겼는데 계약 하나 끝났다고 199가 되는게 아니라 그 200이라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으면 이건 해야 되는 일이지.

ㄴ 222222222 인정 이거 되면 진짜 인소더블이라고 우리가 이모형이모형 매달릴 필요도 없음

ㄴ 지랄한다 이모형이 언제 너보고 이모형 하고 빨아달라고 했음?ㅋㅋㅋㅋㅋㅋㅋ지가 존나 꼬리 흔들면서 빨아놓고 이제와서 지가 존나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구네 개웃곀ㅋㅋㅋㅋㅋㅋㅋ그럼 자존심이 좀 세워짐?ㅋㅋㅋㅋ

ㄴ 아니 나는 저걸 애초에 불법실험으로 했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된다. 계약자들 존나 이기적인 거 아님? 공개된 것처럼 계약 양도가 그런 시스템이면 솔직히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서라도 자기들이 참여했어야 되는 일이지. 불법실험으로 할 게 아니라 나라가 주도해서 공식적으로 실험했으면 도대체 문제 될 게 뭔데?

ㄴ 아니 시발 이해가 안 가냐?? 계약을 양도한다는 그 발상 자체가 존나 미친 발상이라고 너는 가족 다른 사람한테 양도하냐? 하냐고, 그게 말이 되는 발상이냐고 시발 계약주가 무슨 집문서에 싸인한 것처럼 계약 휘갈기고 끝난게 아니라 파장이 맞고 기원이 맞고 거의 기적의 확률로 모든 게 일치하는 쌍방이 있어야 계약이 성립되는건데 뭘 양도해 양도하길

ㄴ 계약 파기하는 계약자들도 가끔 있는데 뭐 그럼걔네는 셀프 파양임?ㅋㅋㅋㅋㅋ계약주가 엄마고 아빠면 붙어먹는 새끼들은 도대체 뭔데ㅋㅋㅋㅋㅋ 그냥 마력 받고 힘 빌려주고 하는 사이에 운명적인 척 필연적인 척 우주의 힘이 도운 척 으으으으 시발 오글거려 웩

ㄴ 이게 다 영화랑 드라마 때문임 계약자랑 계약주 관계로 온갖 드라마틱한 사연들 다 뽑아내고 맨날 비극적인 척 하고 지랄 똥을 싸니까 이지경이 된 것

ㄴ 그냥 이 참에 공식적으로 실험해서 제대로 성공해라. 오히려 그래야 저 애처럼 계약주 죽는 사고 안 생기고 안전하게 실험할 수 있을 듯. 계약 양도 진짜 성공하면 존나 획기적인 거지 시대가 바뀜 ㅇㅇ

ㄴ 그래서 쟤 계약주는 왜 죽은 건데??? 이름을 언급하면 안 되는 이모씨 그분이랑 뭐 폭행논란까지 있었다더니 걔가 죽인 거 아님?

ㄴ미친

이거 따지고 보면 계약자주랑 계약자들한테도 좋은 거 아님? 파장이 맞고 자시고 가끔 파기하는 계약자들 있는거 보면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는 건데 자기랑 더 맞는 것 같은 계약주로 바꿀 수도 있고, 뭐 불의의 사고로 계약주가 죽었다고 해도 계약 양도해서 옮겨가지고 새 주인 찾아서 계속 계약자 할 수도 있고, 계약자가 죽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잖아. 기적적인 확률로 계약자 생기는 것보다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으며 마력 수급도 더 안정적으로 되는 거고, 모두에게 다 좋은 윈윈인 것 같은데?

ㄴㅇㅇㅇ 이거지 근데 또 계약자 인권이지 차별이니 지랄날까봐 이태학이 일단 불법적으로라도 실험하고 제대로 공개하려고 했을 듯. 그런데 말한 것처럼 피해자 발생해가지고 바로 중단한 거고. 들어보면 계약 양도도 쌍방 동의가 있어야 되는거고 그러면 불법이라고 해도 저 실험에 참여한 계약자들도 다 동의했다는 거잖음. 몰래 했다는 것 말고는 문제 될 것 없다고 봄.

ㄴ계약자들 진짜 무슨 계약주가 운명의 반쪽인 척 영혼의 단짝인척 구는 거 웃기지 않음?ㅋㅋㅋㅋㅋㅋ막상 저거 성공해서 양도된다고 하면 얼씨구나 반길듯

ㄴ진심 이태학이 짬바도 그렇고 천재는 천재인듯 와 계약을 양도한다는 발상을 어떻게 하냐 존나 획기적이다

ㄴ이참에 그냥 정부에서 아예 주도해가지고 공개적인 시스템으로 연구했음 좋겠다. 몰래 해서 실험이지 까놓고 하면 연구 아닌가. 그냥 단어 차이지 뭐

ㄴ걍 용서해주자 저 정도면 애국이다

ㄴ용서해줘라22222222

ㄴ애국 인정

“…….”

핸드폰을 던지듯 치워버린 이도하가 고개를 숙였다. 눈을 가리고 그는 잠깐 심호흡을 해야 했다. 매사에 무심했던 이도하는 뭐든 그러려니 하는 통에 딱히 크게 화를 낼 일도 없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참지 않으면 아주 큰 일을 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심호흡을 하는데도 속에서 무언가 치밀어 올라 숨이 가빠졌고,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엉엉 울던 신은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내고, 빌고, 그러다가 결국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울기만 하던 얼굴이. 아무도 계약주를 잃은 그 애의 눈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용서? 애국? 당신들이 도대체 뭘 알아서.

‘수사는요.’

‘쉽사리 접근할 수 없는 문제여서 그래. 잘못했다가는 우리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드리시니언의 말이 떠올랐다.

역풍.

이런 뜻이었구나. 이도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 우르슬라는 지금 죽은 계약주를 되살리려고 과거의 시간을 되풀이하느라고 미쳤다, 그리고 사실 그건 독일이 우르슬라의 마력을 계속 뽑아먹으려고 부추긴 걸지도 모른다, 밝히면.”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이도하가 대충 던진 핸드폰을 줍느라고 허리를 숙인 주승현이 그의 코앞에 있었다. 그녀가 눈을 접으며 유하게 웃었다.

“인간들이 어떻게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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