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142화 (142/250)

142화

“아니야.”

이도하가 말했다.

“그렇게 따지면 계약주들은 마력 다 헛 쓰고 있는 거겠지.”

마력으로 계약자를 소환해 다양한 힘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계약주들이란, 오즈의 시선으로 따지면 ‘마법사’와 비슷할 것이다. 그런 계약주들은 대체로 황궁, 각종 귀족가, 현자의 탑, 길드 등 많은 곳에서 요구되고, 험하고 위험한 일에 투입되기 일쑤다. 오즈의 역사에는 강력한 계약주를 얼마나 보유했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판가름 난 적도 있었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순간에 계약한 계약자의 힘으로 위기를 벗어난 계약주들이 한둘이 아닐 텐데, 김윤혜식 이치로 따지자면 그들은 전부 죽었어야 한다. 그러나 김윤혜가 말했다.

“그건 이미 죽은 걸 바꾸는 게 아니잖아요.”

이도하가 지그시 이를 물었다.

“세상에 흐름이라는 게 있다고, 우르슬라의 계약주가 누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계약주의 죽음이 오즈의 흐름에 중요한 일이었다고 하면 말이 돼요. 어쩌면 이미 지나간 천 년 전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고.”

“김윤혜씨 언제부터 그런 거 믿었냐.”

“어느 명탐정이 그랬거든요. 아무리 말이 안 되는 것 같아도 남은 하나가 정답이라고.”

“아니야.”

이도하가 다시 말했다. 아무튼 그건 아니다.

“왜 아닌데요?”

“아니라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아니라는 식의 덮어 놓은 부정에 김윤혜가 슬 얼굴을 구겼다. 김윤혜가 아는 이도하는 이런 식으로 이유 없이 구는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이러니 아무래도 이상한 것이다. 여전히 수건으로 눈을 덮어 가린 이도하가 말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있을 것이다. 우르슬라가 그렇게 수없이 시간을 되감아 반복하면서도, 단 한 번도 계약주의 죽음을 막지 못한 이유가.

“어쨌든 그럼 맹약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건진 게 없는 거네요.”

“애초에 맹약을 생각한 사람이 우르슬라가 아닐 수도 있어.”

“갑자기? 그건 또 왜요?”

이도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지하 감옥의 소환진- 어쩌면 최초의 계약, 계약의 기원일지도 모르는 그 소환진에 대해서 김윤혜에게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걸. 이걸 지금 와서 얘기하자니 좀 아득해지는 기분도 들었으나, 그의 머릿속도 개판이 되어 아주 혼란한지라 이참에 말하면서 정리를 좀 하는 것도 낫겠다 싶었다.

“…천 년 전에, 소환된 사람이 또 있었어.”

“네?”

“현자의 탑에서 계약 양도 실험을 하다가 날 소환했을 때, 그때 내가 소환되었던 곳에 소환진이 있었다고. 바닥을 파서, 피로 그린 천 년 전의 소환진.

피로 그린 소환진. 이건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맹약이 분명하다. 김윤혜가 입을 벌렸다.

“흔적을 읽어봤는데, 거기서 소환된 건 우르슬라가 아니야.”

“…천 년 전이면 고려시대예요, 이도하씨. 로마 제국 때고, 황제가 교황한테 빌고 십자군이 유럽을 다 밟아 놓던 때라고요.”

“근데 아니야.”

알려진 최초의 계약이 고작 100여 년 전에 불과한데, 무려 천 년 전에 오즈에서 누군가를 소환했던 흔적이 있다. 그것도 맹약으로. 근데 그건 시간을 거슬러 간 우르슬라도 아니다. 이도하가 시간을 잘못 판단한 게 아니라면 이건 우르슬라처럼 시간에 관여하는 특기자가 또 있다는 소리거나… 아니면 정말로 천 년 전에 누군가 오즈로 소환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분명 학계가 아주 발칵 뒤집힐 소리였는데, 이도하가 저리 말하니 김윤혜는 이제 뭐가 중요한 건지 헷갈리게 되었다.

“…어쨌든 기록을 남긴 건 우르슬라니까…. 그 천 년 전의 소환진에서 누가 소환됐었건 우르슬라와 무슨 일이 있기는 했던 거 아니에요? 근데 우르슬라는 완전히 미쳐버려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고…? 와… 이게 다 뭐야?”

김윤혜가 허, 하고 탄식했다. 그러더니 문득 뭔가 깨달은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근데 이도하씨, 우르슬라를 만나고 온 거 아니에요?”

“맞는데.”

“어떻게?”

김윤혜가 다시 물었다.

“우르슬라가 시간을 되감아서 계약주의 죽음을 막으려고 하고 있다면, 어찌 됐든 지금 오즈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도하씨는 우르슬라를 어떻게 만난 건데요? 아니, 우리가 있는 지금 이 시간은 뭐예요?”

“…….”

이도하가 눈을 덮었던 수건을 치워냈다. 그가 김윤혜를 바라보았다. 아이라의 연구원들은 그들이 이미 이해하고 있는 과학을 기반으로, 이해할 수 없는 특기를 설명해내고 규명해내려는 이들답게 이치와 진리라는 것에 그리 빡빡하게 얽매여 있는 편은 아니었다. 사고가 꽤 자유로운 편에 속했고, 각종 기이한 현상들도 아주 흥미롭고 창의적으로 받아들여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윤혜는 지금 통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도하는, 그는 뒤통수를 얼얼하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김윤혜의 말이 맞았다. 우르슬라는 시간을 되감아서 계약주가 죽기까지의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낡은 오두막에 있었던 그녀는 뭐였을까. 그녀는 오즈에, 과거에 있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과거에도 있고, 지금 현실에도 있단 말이에요?”

김윤혜가 말했다. 그건 질문이라기보다는, 이해 못할 일이 있으면 일단 다 내뱉어 보려는 김윤혜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이도하는 문득 떠올렸다.

나이에 안 맞게 늙어버린 우르슬라. 주마등처럼 순간적으로 스친 그녀의 기억 속 어디에선가, 거울에 비쳤던- 이도하가 기억하는 젊은 그녀의 모습. 2001년, 16살이었던 이도하와 6살이었던 이도하. 뒤엉킨 시간.

“…그런가 보지.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있나 보지.”

어쩌면 우르슬라는 과거의 오즈와 지금의 현재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게 말이 돼요?”

“안 될 게 뭐가 있어.”

이도하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결국 다 같은 시간이지만, 그녀가 그렇게 되풀이한 시간을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그 육신이 오롯이 감당하느라고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하면 앞뒤가 맞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흘러가야 할 시간을 붙잡고서 뒤로, 뒤로, 감고 감다가 결국 쪼개져 버렸다고 하면.

그렇게 시간이 쪼개지고, 10여 년에 달하는 시간이 뒤엉켜 저는 제가 몇 살인지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 새 세상은 뒤엉키며 망가져 가고- 이만하면 참 인소더블이 할 만한 짓이다. 이도하가 조소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그가 김윤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이도하씨. 과거에도 있고 지금도 있고 그러면….”

되감기고 감긴 그 모든 시간들은 모두 우르슬라의 실패였다. 맹약으로도 붙잡지 못했든, 김윤혜의 말처럼 계약주의 죽음이 운명이어서든, 그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든, 그녀는 수십만 번의 시도를 해 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발버둥 치고 있다.

천 년 전의 과거에서.

그러니 한 번, 단 한 번 그녀가 성공하게 되면- 그녀의 계약주가 죽음을 빗겨가 살아남는다면.

“그럼 이 시간은 어떻게 되는 건데요?”

“…….”

“난 좀 노답인 것 같은 느낌이 오거든요.”

“…죽이면 될까.”

“이도하씨!”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김윤혜가 깜짝 놀라 이도하를 보았다. 죽일까, 죽여버릴까, 죽인다, 사람들이 참 흔하게 쓰는 말이고 입이 험한 김윤혜도 종종 쓰는 말이지만, 지금 이도하가 저렇게 말하니 조금도 장난 같지 않았다.

“그냥 지금 죽이면 되잖아.”

이도하가 무심하게 말했다. 이미 뒤엉킨 10년도, 앞으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시간도, 어쨌든 정말 우르슬라가 시간을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확인했으니 그렇게 하면 다 끝나는 게 아닌가.

“무서운 소리 하지 마요. 매듭을 풀어야지 끊어버리겠다는 말이랑 뭐가 달라요, 그게?”

김윤혜가 질색을 하며 말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이요. 그리스인들은 그게 무슨 대단한 발상의 전환이고 결단이었던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 대왕은 그냥 못 풀겠으니까 빡쳐서 냅다 잘라버린 거라고요. 해결한 게 아니에요. 그 불쌍한 여자를 냅다 죽여 버린다고….”

말을 하던 김윤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던 이도하가 그녀를 보았다. 김윤혜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세상에.”

“왜?”

“이도하씨, 나… 나 알겠어요. 왜 독일이 우르슬라를 그렇게 숨기려고 했는지. 왜 그렇게 잊히게 만들려고 했는지, 알겠다고요.”

갑자기? 이도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력이요!”

이도하도 눈을 크게 떴다. 더 이상 수출은 하지 않고 있지만, 독일은 아직까지도 우르슬라의 계약 당시 얻었던 마력국 타이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나라였다. 그 당시 개정했던 각종 에너지 관련 법안과 정책은 물론 그를 기반으로 한 나라 전반의 시스템을 모두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그건 인소더블 계약자 한 명이 나라 전체에 어떤 부와 풍요를 가져다주는지를 보여주는 표본이기도 했다.

우르슬라가 계약자로 활동할 수 있었던 건 고작 2년여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그녀는 인소더블이며, 또 다른 비교군이 없었으니 독일에서 공개하는 자료들이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인소더블, 이도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죽음을 되풀이하고 있는 계약주의 마력을 그대로 쓰고 있는 거라고요!”

설령 그게, 미쳐버린 계약자가 죽음을 되풀이하고 있는 계약주의 망령 같은 것으로부터 매개한 마력이라고 해도.

“우르슬라가 시간을 되감도록 한 게 그들이었을지도 몰라요. 인소더블이라고 해도 계약주가 죽으면 마력 매개는 그대로 끝이니까, 우르슬라를 부추겨서….”

그러면서 그녀가, 미쳐버리든 말든. 김윤혜가 벌떡 일어나더니 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다는 듯 씩씩거리며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도하는 할 말을 잃고서 그대로 누워 있었다. 외진 숲에 자리한 낡은 오두막, 낡은 흔들의자,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늙은 몸뚱어리. 벽난로의 불꽃에서 스민 온기만이 생기의 마지막 흔적인 것처럼, 오래되어 쌓인 낡은 먼지처럼 쇠하여 있던 우르슬라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계약자가 아니라 자네들을 이해할 수가 없네만… 또 아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혐오감이 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우르슬라가 그렇게 미쳐버릴 때까지 그 뒤에 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을 마누엘 뮬러, 그 남자가 잠깐 비추었던 동정이 떠오르니 역겹다. 고작 다른 세상, 계약이 아니라면 존재의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는 세상에서 만났을 뿐인 계약주의 죽음, 그걸 하나 놓지 못해서… 그래도 ‘인소더블’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미련스레 그렇게 파이프에 꽂힌 미라처럼 쇠락해 가고 있는지. 그건 안타까움을 가장한 멸시였다.

“완전 시발새끼들 아니야!!”

결국 김윤혜가 버럭 소리쳤다. 화를 이기지 못한 그녀는 홧김에 대야를 뻥 걷어 차버렸다. 물이 가득 차 있던 대야는 분노에 찬 발길질 한 번에 사방에 물을 뿌리며 거실 끝까지 날아가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김윤혜의 다리는 흠뻑 젖었고, 아무 말 없이 꿈쩍도 않고 누워 있던 이도하도 졸지에 냉수마찰을 하고 말았다. 김윤혜는 여전히 화가 나 씩씩거리면서도 일단 사과했다.

“아씨, 미안해요.”

이도하가 얼굴을 훔쳐내며 대충 손을 흔들었다. 마치 묘지에 아무렇게나 대충 버려진 시체가 된 것 같은 혐오감에 휩싸여 있던 그는 이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 정신이 들었다.

“어떡해요?”

김윤혜가 말했다. 어떡하긴- 이도하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대답이 엉뚱한 곳에서 툭 튀어나왔다.

“어떡하긴요. 놔둬야지.”

김윤혜가 홱 고개를 돌렸고, 이 낯선 목소리에 이도하도 몸을 일으켰다. 대리석이 깔끔하게 깔린 거실 입구에 정장을 입은 웬 여자가 케이크 상자를 들고 서 있었다. 늘 매체에서 단정하게 묶고 있던 생머리를 편안하게 풀어내려 조금 다른 인상을 주었으나, 그래도 몰라보기에는 너무 유명한 얼굴이었다.

“주승현?”

아이라의 집행 이사, 주승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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