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내가 당신을 잊을 수도 있잖아.’
‘그대의 웃음, 목소리, 온기… 절대로 잊지 않을게.’
휘영청 달이 떴던 밤, 선선하게 불던 바람.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이 시간이 사라진다면,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래서 내가 당신을 잊는다면, 꼭 다시 불러, 시오한.’
‘응.’
‘포기하면 안 돼.’
다정하게 웃음 짓던, 황금색 눈동자.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부를게, 화이람.’
눈가를 훔치며, 이도하는 눈을 떴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니 안개가 낀 듯 뿌옇게 흐려진 시야에 초점이 돌아왔다. 불이 꺼진 형광등이 보였다. 그래도 사위가 밝은 걸 보니 낮이었다. 이도하는 숨을 들이켜다 콜록, 기침했다.
배에 힘이 들어가니 머리도 찡하게 아팠다. 머리를 부여잡으려던 이도하는 축축한 뭔가를 움켜쥐게 되었다. 뭔가 얹혀있다 했더니, 물에 적신 수건이었다. 그런데 손에는 또 샛노란 밴드가 잔뜩 붙어 있다. 팔목과 손바닥에 걸쳐서도 아주 덕지덕지 붙어 있었는데, 피가 배어 나온 자국이 선명했다.
“열 엄청 났어요.”
이게 다 뭔가 싶어 쳐다보고 있던 이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전혀 몰랐는데, 옆에 김윤혜가 앉아 있었다. 편한 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등을 기대고, 세운 무릎에 노트를 올려놓은 걸 보니 낙서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옆에는 물을 담은 대야가 있었다. 이도하는 그걸 물끄러미 보다, 다시 김윤혜를 보았다.
“왜요, 뭐요.”
김윤혜가 불퉁하게 말했다.
“아니, 이 구도가 좀 새삼스러워서.”
“난 하나도 안 새삼스러운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도약점을 잘못 잡는 건 아이라에서 두고두고 놀려먹는 바보 같은 실수라는 거 알죠? 생전 감기도 안 걸리던 사람이 열이 나질 않나, 헛소리를 하질 않나.”
“무슨 헛소리?”
주변을 둘러보며, 이도하가 물었다. 그는 낯선 거실 한가운데에 있었다. 두툼한 베개를 베고 있었으며, 아주 푹신한 이불도 덮고 있었다. 이물감이 느껴져서 보니 둘둘 걷어 올린 다리며 팔에도 밴드가 오색찬란하게 잔뜩 붙어 있었다. 바닥에도 카펫이 깔려 있어 푹신하다. 이도하는 온몸이 코끼리에게 작신작신 밟힌 것처럼 쑤셨고, 누군가 머릿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뇌를 주무른 것처럼 머리도 아팠으므로 이대로 좀 더 누워있기로 했다.
“알면 쪽팔릴 텐데.”
“우르슬라, 시오한, 안 돼, 뭐 그러든?”
“와?”
“내 머릿속을 내가 모르겠냐.”
이도하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김윤혜는 이도하가 얼마나 뻔뻔한 인간인지 다시금 깨달았지만 그래도 그를 유심히 한 번 살펴보았다.
이도하가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지만, 티비고 인터넷이고 각종 매체에서 인소더블 특별법에 대해 쏟아내며 이도하가 독일로 넘어갔니, 이미 귀화를 했니, 사실은 붙잡혔느니 하는 진짜 헛소리를 해대고 있는데 어쨌든 이도하는 공식적으로 ‘행방불명’ 상태였다. 독일은 이도하에 대해 아예 모르는 것처럼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러나 꼬박 하루 전에 거실 테이블을 죄다 산산조각 내고 거실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던 요란한 등장을 생각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아주 격렬하게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런데 이도하는 몹시 평온하고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요, 무슨 일인데요.”
“만났어, 우르슬라.”
“와, 해냈네. 뭐래요? 아무 말도 안 해줘요? 한 판 했어요?”
이도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 여자는 무슨 말을 할 상태도 아니며, 한 판을 하자면 차라리 개미랑 하는 게 더 볼만할 것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아니, 열려고 했다. 그러나 입술이 딱 붙은 것처럼 벌어지지 않는다. 목과 입이 마비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지, 김윤혜는 이도하가 인상을 쓰는 걸 보면 아주 굉장한 일이 있었나 보다, 하며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 서약. 이도하는 그제야 까맣게 잊고 있던 마누엘 뮬러와의 서약을 떠올렸다. 우르슬라를 만난 후 누구에게도 그녀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밝히지 않는다, 어쩌고저쩌고하던 그 약속. 그래, 그런 게 있었다. 이도하가 목 위로 손을 얹었다. 긁어내듯이 가볍게 손가락을 모아, 꽉 쥐었다.
쨍그랑- 파열음이 났다, 이도하에게만 들리는. 이도하는 그저 목이 잠깐 간지러워 긁었던 사람처럼 손을 털고는 말했다. ‘무한한’, ‘이해할 수 없는’- 그 인소더블을 이미 제 나라에서 보았을 텐데 그저 간과한 건지, 아니면 우르슬라는 참 정직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는 처음부터 이깟 서약 따위는 지킬 생각도 없었다.
“우르슬라는 미쳤어.”
“…예?”
김윤혜가 반문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대뜸 욕부터 박는 거지, 하는 표정이었다. 이도하가 다시 말했다.
“말 그대로 미쳤다고. 미쳤고…… 불쌍한 여자야.”
“…이 기시감 뭐지.”
이도하는 그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잠깐 말문을 잃고 말았다. 그가 김윤혜를 보았다. 어떤 표정으로 보았던 건지, 김윤혜가 좀 당황하면서 물었다.
“왜 그래요?”
“…아니야.”
저도 모르게 가슴을 한 번 꽉 누른 이도하가 약간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윤혜씨. 만약에 나혜 누나가 죽었어.”
난데없는 말에 김윤혜가 와락 인상을 썼다. 꽤 험상궂었으나, 이도하는 멈추지 않았다.
“네가 보는 앞에서. 누군가에게 살해당해서. 그럼 어떡할래?”
“뭘 어떡해요?”
“네 특기, 쓰지 않을 수 있겠어?”
이도하가 제 이마 위에 있던 수건을 내밀었고, 김윤혜가 그걸 바라보았다. 수건은 아마도 그가 깨어나기 전부터 그곳에 있었을 테지만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것처럼 아주 차가웠다. 김윤혜가 처음 차가운 물에 담갔던 그 순간에 시간을 멈춰놓았기 때문이었다.
‘멈추고 싶은 순간.’ 다중 발현자인 김윤혜의 특기 중 하나는 사물의 시간을 잠시 멈출 수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생물이나 운동하고 있는 사물이라면 3, 4초 남짓. 그저 상태를 유지하는 것뿐이라면 상황에 따라 3시간 정도도 가능했다. 이도하가 그랬듯, 그리고 특기자들이 대체로 그렇듯 김윤혜도 이 특기를 실생활에서 아주 하찮고 알뜰하게 사용했다. 커피가 절대 식지 않게 한다든가, 핸드폰이 떨어지는 순간 잠시 멈춰 얼른 낚아챈다든가 하는 등이었다.
“한 번쯤은 쓰겠죠. 죽음을 받아들이는 가장 첫 번째 단계가 부정이라니까. 근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내가 이도하 씨처럼 인소더블도 아니고 말 그대로 ‘안 죽은’ 순간을 조금 더 볼 뿐일 텐데.”
“네가 인소더블이라면?”
잠시, 잠깐이 아니라 힘이 허락하는 한계까지 죽음 직전에 놓인 사람을 붙잡아 놓을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힘에는 한계가 없다면.
“…그럼 살리려고 하겠죠.”
소중한 사람의 죽음. 죽음을 붙잡아 놓을 수 있는 힘. 인소더블. 우르슬라. 김윤혜는 이 어렵지 않은 퍼즐을 쉽게 맞춰냈다. 김윤혜가 미간을 좁혔다. 이도하가 수건으로 제 눈을 덮었다.
“계약자가 죽어서 우르슬라가 지금 계속 시간을 되돌리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러다가 미쳤다고?”
되돌린다. 그리 단순히 표현이 되니 좀 우습다. 이도하가 말했다.
“‘되돌아가는 태엽.’ 그 여자의 특기는 시간을 감는 거야.”
태엽을 감듯이, 어느 한순간을 기점으로 삼아 시간을 과거로 되돌린다. 그리고 우르슬라는 계약주가 죽은 그 순간부터 태엽을 감기 시작했다. 손을 놓는 순간, 되감긴 태엽은 천천히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듯 그녀는 되감은 시간을 온전히 다시 겪어내야 한다. 태엽이 멈추는 순간- 처음 태엽을 돌리기 시작했던 그 순간으로 천천히 다시 다가가는 것이다.
계약주의 죽음으로.
“그 여자 머릿속에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어.”
그리고 그녀는 다시 태엽을 감고, 또 감았다. 몇천 번, 몇만 번을 거듭해서. 매번 계약주가 죽는 그 순간으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기억이 다 늘어진 테이프처럼 녹아내릴 때까지. 켜켜이 쌓이고 쌓인 기억이 더 이상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저며질 때까지.
“계약주가 죽는 순간을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있을 뿐이라고.”
무심한 푸른 눈동자, 번뜩이는 칼날, 흩뿌려지는 핏방울…. 좋고 행복한 기억 따위는 죽음 그 순간에 짓눌려 다 썩어버리고, 반복되는 죽음을 막지도 못하고 되풀이해 지켜보면서 우르슬라는 결국 미쳐버렸다. 그러고도 아직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도하도 알고 있었다. 우르슬라의 계약주가 죽었고, 어쩌면 그래서 우르슬라가 시간을 몇 번이고 되돌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는 이미 추측했었다. 그러나 그 추측은 사뭇 가벼운 것이었다.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아니, 왜요?”
김윤혜가 말했다.
“시간을 되돌려서 다시 겪는다는 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있다는 소리잖아요. 그런데 왜 계약주의 죽음을 못 막아요?”
한두 번도 아니고 수백, 수천, 수만 번- 계약주의 죽음을 지켜보다 완전히 미쳐버릴 때까지 반복했다면 도대체 왜? 그녀의 계약주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거라면, 가장 단순하게는 그 사람을 죽이기만 해도 계약주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예정된 운명 같은 건가?”
김윤혜가 말했다. 태어나서 단 일 초라도 운명, 필연, 아무튼 사람의 인생이 예정되어 있다는 식의 모든 걸 다 사기꾼들의 장사놀음이라고 생각해 왔던 그녀는 제가 지금 이 말을 하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 말고는 정말 답이 없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더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려고 노력한 끝에 김윤혜가 말했다.
“원래 두 세계는 서로 간섭할 수 없잖아요. 아무리 섭리를 속여 소환된 계약자라도 죽음처럼 중요한 일에 그런 식으로 간섭할 수 없기 때문에 바꾸지 못한 거 아닐까요? 그래서 어떻게든 거스르려다 생각해 낸 게 맹약일 수도 있어요.”
등을 맞댄 거울. 절대로 마주 볼 수 없는 세계. 같은 곳, 같은 시간. 목숨에는 목숨으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맹세. 반드시 지켜질 약속. 맹약의 기록을 떠올린 김윤혜는 이 가정이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맹약으로도 붙잡지 못한 거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