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우르슬라의 기억이 이도하를 덮쳤다.
[이올라!]
[이올라!]
[이올라!]
[이올라, 왜 그래?]
[이올라!]
[이올라!]
[이올라!]
수십만 개의 목소리가 겹쳐 울린다. 햇빛 아래서 반짝이는 황금색 머리칼, 황금빛 눈동자가 활짝 웃는다. 그가 무언가를 들고 이쪽으로 달려온다. 그 얼굴이 겹치고, 겹치고, 겹치고, 또 겹쳐 일그러진다. 눈 위로 코가, 코 위로 입이, 입 아래에 머리칼이 어지럽게 겹쳐 기괴하게 뭉그러지며 높고 낮은 목소리가 동시에 늘어진 테이프처럼 울렸다.
[안 돼-!!]
[안 돼-!!]
[안 돼-!!]
[제발- 제발-]
[안 돼-!!]
[안 돼-!!]
[안 돼-!!]
절규, 무심한 푸른 눈동자, 번뜩이는 칼날, 흐트러진 황금색 머리칼, 꽃잎처럼 점점이 떨어진 핏방울, 그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잠식하고 번지는 피 웅덩이, 피, 피, 피, 피. 주마등처럼 스치는 장면 장면들이 분간할 수 없이 뒤섞여 새까맣게 흘러내린다. 감각이 모조리 뒤틀어진다. 속이 뒤집혀 구역질이 난다. 머릿속을 갈퀴로 긁어내는 것 같은 고통이 덮쳤다. 섬뜩한 냉기가 와락 이도하를 붙잡았다. 이도하가 눈을 떴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시야에 가득 찬 것은 코앞에 부릅뜬 우르슬라의 연푸른 눈동자였다.
“---”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가 무언가 말했다. 시야가 어지럽게 이지러지는 가운데, 이도하는 그 연푸른 눈동자에 사로잡힌 것처럼 숨조차 쉬지 못했다. 그때, 커다란 손이 그 연푸른 눈동자를 덮었다. 어느새 이도하의 손목을 그러쥔 여자의 늙은 손을 잡고 차분히 떼어 낸다.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이건 반칙이지.”
특별 수사국 국장, 마누엘 뮬러. 서늘하게 웃으며, 우르슬라를 이도하에게서 부드럽게 떼어낸 그가 그녀의 눈을 덮은 채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대도록 했다. 방금 전의 일은 거짓말이었단 것처럼 그녀는 다시 쌕쌕 고른 숨을 내뱉으며 의자 위로 인형처럼 쳐졌다. 그녀의 손을 팔걸이에 얌전히 올려주고, 눈을 덮은 손을 떼어냈을 때 우르슬라는 이도하가 처음 보았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초점은 없고, 늙어버린 육신은 그저 껍데기만 남은 것 같은 모습으로.
“읏-”
이도하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시야가 이지러지고 흔들렸다. 질끈 눈을 감아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헛구역질을 하며 이도하가 가슴을 움켜쥐었다. 두근두근- 요동치는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일그러진 시야는 붉고 푸르게 물든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수많은 핏방울들이 제 시야에 뿌려진 것 같다. 입술을 깨물고 몸을 웅크린 채 신음하던 이도하가 으르렁거렸다.
“당신들… 무슨 짓을 했어.”
“아무 짓도.”
고개를 기울여 우르슬라의 숨소리를 잘 살핀 마누엘 뮬러는 그녀의 어깨를 잘 토닥여 주었다.
“모두 그녀의 선택이었지.”
이도하는 마누엘 뮬러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스치는 것을 보았다. 아주 짧은 찰나였으나, 그건 분명 동정이었다.
“나는 계약자가 아니라 자네들을 이해할 수가 없네만… 또 아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가 의자를 기울였다. 팔걸이를 단단히 쥐고 뒤로 의자를 끌어낸다. 엎드린 이도하는 두꺼운 양말이 신겨진 발이 멀어지는 것을 보았다. 숨이 점점 가빠졌다. 눈앞이 검게 점멸했다. 이대로 꼬꾸라져 버릴 것 같다. 이도하는 천근만근으로 느껴지는 고개를 들었다. 언제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웬 남자가 마누엘 뮬러에게서 의자째로 우르슬라를 건네받고 있었다. 반듯한 양복 주머니에 손을 꼽으며 그가 이도하를 내려다보았다.
“어디, 저 머릿속에 뭐 볼만한 게 남아 있긴 하던가?”
이도하의 신형이 사라졌다. 쾅-! 그는 부엌 한쪽, 작은 인형 따위가 옹기종기 조잡하게 놓인 책장으로 내던져지듯 나뒹굴며 나타났다.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자리에 거대한 새의 발톱 같은 검은 형체가 허공만 움켜쥐고 흩어졌다. 붉은 문양들이 바닥에서 산발적으로 떠오르더니 핏방울처럼 뭉근하게 퍼진다.
위치를 제대로 잡지 못해 벽에 처박혀 들어갔던 이도하가 헉, 숨을 들이켰다. 공기가 진득하게 변해 코와 기도를 틀어막았다. 붉은 문양들이 순간 번뜩이더니, 바닥을 긁듯이 이도하에게로 확 내달려 그를 덮쳤다. 손과 발을 순식간에 타고 올라가 벌레처럼 꼬물거리며 그의 머리를 완전히 휘감았다. 이도하가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마치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손끝에 그물망이 벗겨지듯 붉은 문양들이 끌려 나오기 시작했다. 지지직- 찢어지는 소리가 난다. 완전히 그의 머리를 붉게 뒤덮었던 문양들 틈으로, 푸르게 물든 이도하의 눈이 서릿발처럼 드러났다. 초점이 어긋난 눈동자가 점점 더 달아오른다. 수천 마리의 나비가 동시에 날갯짓을 하는 것 같은 연약한 소리가 소곤거리듯 주변을 에워싸더니 점점 커졌다.
비명 소리와 절규, 신음, 분노로 얼룩진 외침 같은 게 그 속에서 어른어른 흘러나온다. 무너지는 건물, 갈라진 땅, 번쩍이는 하늘과 피, 시체- 황금색 머리칼과 눈동자, 시야가 점멸되는 햇살- 허공에 흐리게 환영들이 스치듯 나타났다 사라지길 어지럽게 반복했다. 우우웅, 이명이 오두막을 흔들었다. 진동은 점점 거세지고, 천장에서 먼지와 가루들이 부스스 떨어졌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다.
동시에 진득하게 이도하의 주변을 뒤덮었던 공기가 푸르게 물들었다. 공기가 얼어붙듯 일렁거리다가, 빛줄기가 번지듯 사방으로 쫙 퍼져 콰가각-!!! 내리꽂힌다. 뾰족한 창날 같은 얼음덩어리들이 바닥을 부수고 주변을 모두 뒤덮었다.
천장이고 바닥이고 가릴 것 없이 온 사위에 칼날 같은 얼음덩어리들이 돋았다. 쇳소리가 날 것처럼 차게 번들거리던 얼음덩어리들에 쩌저적, 금이 갔다. 캉-!! 얼음이 수천 조각으로 잘게 깨어졌다. 날이 선 것들이 파르르 떤다. 검은 새의 발톱 같은 형체가 다시 나타나 그를 향해 쇄도했다가, 허공에서 산산조각으로 찢겨나갔다.
얼음 조각들이 새하얗게 번뜩이고, 허공이 어지러운 환영으로 뒤덮였으며, 귓가에 속닥거림과 비명 소리가 함께 들어찬다. 모든 게 다 터져나가 버릴 것 같은 순간, 이도하가 휘청였다.
환영이 뚝 끊어졌다. 씻은 듯 모든 게 사라졌다. 이명도, 오두막을 흔들던 진동도 사라지고 뱀의 비늘처럼 날이 서 있던 얼음조각들이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그리고 이도하도 사라지고 없었다. 남은 건 싸늘하게 재만 남은 벽난로와 모든 게 엉망진창으로 바닥에 엎어진 난장판이었다.
허공에 검은 형체가 날개처럼 확 펼쳐지며 몇 사람을 토해냈다. 마누엘 뮬러를 위시한 몇 사람들이 창백한 안색으로 순식간에 겨울이 내려앉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입을 여니 하아- 뿌연 입김이 새어 나온다.
<…미쳤어… 국장, 어떻게 합니까?>
손가락이 전부 밴드로 칭칭 감긴 남자가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던 마누엘 뮬러가 픽 웃었다. 이미 낡은 오두막은 오래전에 버려진 곳처럼 황폐해져 있었다.
<어때?>
<몰라요. 봤잖습니까, 다 뜯어내 버렸다고요. 그걸 어떻게….>
<요만큼도 읽지 못했단 말이야?>
마누엘 뮬러가 성의 없이 물었다. 별로 기대 같은 건 없는 어투였다.
<…무슨 폐허 같아서 읽고 말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만.>
<됐어, 그럼. 뭘 봤다고 해도 서약이 있으니 말할 수 없겠지.>
<가버렸잖습니까.>
바닥을 발로 비벼보던 여자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왜, 진짜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나 봐?>
자존심이 상한 것처럼, 남자가 잠시 눈썹을 찡그렸다. 그가 다시 물었다.
<이대로 둡니까?>
별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마누엘 뮬러가 픽 웃었다.
***
와장창-!! 쌓은 책 몇 권 위에 놓인 유리판 위로 무언가 쾅, 떨어져 내렸다. 유리가 산산조각으로 깨지며 박살 났다. 뜨거운 핫초코를 놓고 잔뜩 미간을 모은 채 식탁에서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던 김윤혜는 기절할 듯이 놀라 거의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왈칵, 핫초코가 엎어졌고 순간적으로 놀란 눈동자에 섬광이 번쩍 돋았다. 막 바닥으로 흘러내리려던 핫초코가 우뚝 멈추었다. 딱딱하게 굳어 잔뜩 긴장했던 김윤혜는 테이블 너머 거실을 목도한 순간 악!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섬광은 까맣게 가라앉았고 동시에 후두둑, 핫초코가 다시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김윤혜가 거의 날듯이 달려갔다.
“이도하씨?!”
박살이 난 유리 테이블의 잔해 위에 이도하가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그의 손이며 다리에 박혀 들어갔다. 바닥으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미쳤어, 움직이지 마요!! 이도하씨! 왜 이래요?!”
“…우르슬라-”
“이게 무슨 일- 네?”
“우르슬라.”
정신을 차리려는 것처럼, 이도하가 머리를 흔들었다.
비명소리, 하늘이 무너지던 소리, 땅이 흔들리던 소리, 시오한, 시오한- 엉엉 울던 제 울음소리, 잊어버려, 속삭이던 목소리, 황금색 눈동자, 몇천 번이고 겹쳐 눈코입을 분간할 수도 없게 괴물처럼 일그러져 녹아내리는 얼굴, 흩뿌려지는 핏방울, 뇌를 쏘아대듯이 순간적으로 번뜩이는 빛, 감당할 수도 없는 제 기억과 중첩되고 눌어붙은 우르슬라의 기억이 마구잡이로 뒤섞인다.
일어서는가 싶던 이도하가 또 휘청, 옆으로 넘어가고 만다. 김윤혜가 사색이 되어 그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살집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해도 이도하는 키가 180이 넘는 남자였고, 김윤혜의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박살 난 유리 조각이 손과 발에 다 박혀 피가 주르륵 떨어진 그 위로 이도하가 아주 꼬꾸라져 버릴 것 같자 김윤혜가 다급히 그를 흔들었다.
“이도하씨, 일단 정신 좀 차려 봐요!!”
그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뚝, 뚝, 깨진 유리 조각 위로 떨어지는 핏방울과 이리저리 번진 핏자국을 그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픽 웃었다. 이까짓 피 조금 난 게 뭐 대수라고.
“이도하씨!!”
시야가 까맣게 점멸된다. 툭, 이도하가 고개를 떨구었다. 눈을 감으며, 그가 중얼거렸다.
“…머리… 울리니까, 소리 좀 지르지 마….”
“지금 그걸 말이라고-”
까무룩, 이도하는 정신을 잃었다.
Chapter 6. 풀끝에 앉은 새 몸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