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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39화 (139/250)

139화

그래서 제가… 어린 이도하가 무슨 짓을 했나. 뭐든 할 수 있었던 이도하. 장난을 치며 멋대로 생명을 만들어내고, 시간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저 좋을 대로 기후를 바꾸고,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이도하가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그를 죽이고, 살려냈었다. 세계를 넘어 간섭해, 폐허 속에 묻힌 그의 죽음을 벗겨냈다. 그렇게라도 해야 했다. 그 아이라도, 그 애만은- 시오한만은 살려내야 했다. 어린 이도하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가 살 수 없음을 알았다. 다 돌이키고 싶었으나,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두렵고 무서워서,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도하야.]

숨이 넘어갈 것처럼 몸을 떨며 우는 이도하를 따뜻한 손이 감싸 안았었다.

[어, 엄마. 엄마- 엄마-]

이도하는 정신없이 그 품을 파고들며 울었다. 시오한, 시오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상냥한 손이 부드럽게 그를 쓰다듬어 주었다. 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꿈꿨나 보다, 우리 도하.]

아니야, 그건 꿈이 아니었다. 시오한은, 그 애는 꿈이 아니었다. 제가 그 애를 죽였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그 애도 죽였다. 그리고 그 애를 살려냈다.

[잊어버려, 도하야. 나쁜 기억은 다 잊어도 돼. 그래도 돼.]

[엄마-]

[잊어버려. 그럼 다 괜찮아질 거야.]

잊어버려.

그 말은 8살의 이도하에게 구원줄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차라리 그 모든 일들이 꿈이기를 바랐다. 그 모든 기억들을 꼼꼼히, 모두 그러모아 조그만 상자에 넣고 닫아버렸다. 저조차도 모르는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고 두 번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정말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모든 걸 잊고, 저는 이제껏 산 것이다. 아무것도 관심 없는 척, 사실은 여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이도하가 눈물을 떨어트렸다. 그는 다시 책상 밑에 숨었던 그 8살의 순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쩔 줄을 모르고 그저 무서워 벌벌 떨기만 하던 조그만 어린아이가 된 것 같다.

그 순간, 얼룩진 카펫 위로 푸른 소환진이 펼쳐졌다. 푸른빛이 삽시간에 그를 감싸 안았다. 차가운 손이, 몸이 그를 끌어안았다. 이도하가 눈을 크게 떴다. 푸른빛의 소환진이 너울거리며 그를 언제든 당겨 데리고 갈 것처럼 엮이는 곳, 모든 게 새하얗게 잠식된, 세계의 틈- 시오한은 지금 그를 소환할 기력도, 마력도 없다.

“화이람.”

“시오한, 너 지금-”

“사랑해.”

다정한 목소리가 말했다.

“내 모든 순간으로, 그대의 모든 순간을.”

그가 이도하를 당겼다. 부드럽게 이마를 맞대어, 이도하가 저를 바라보게 한다. 흰빛이 스며든, 창백한 석고상 같은 얼굴이 따뜻하게 웃는다. 그의 손이 부드럽게 이도하의 얼굴을 훔쳐, 눈물을 닦아냈다. 다정한 황금색 눈동자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어린 날 그를 보며 웃어주었던 것처럼, 늘 그를 향해 웃었던 것처럼 상냥하게 휘어지는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대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있어.”

기억 속의 조그만 손이 커다랗게 이도하의 손을 감싸고 꽉 쥐었다.

“그것만 기억해 줘.”

주르륵, 떨어진 눈물을 그가 다시 훔쳐냈다.

“다 괜찮아, 화이람.”

이도하가 그 손을 마주 쥐었다. 그리고 그 손에 얼굴을 묻었다.

빛이 꺼졌다. 이도하는 다시 그 조그만 오두막으로 돌아온 저를 발견했다. 이도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텅 빈 손은 마치 무언가를 꽉 쥐고 있었던 것 같은 모양이다. 큰 손이었다. 살이 별로 없으면서도 마디가 굵어 조금 울퉁불퉁해 보이는 손. 어린 티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손.

“…….”

입술을 깨문 이도하가 그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한동안 눈을 꾹 누르고 있다가, 제 얼굴을 쓸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손이 다 흥건하게 눈물이 묻어나온다. 그는 몇 번이고 얼굴을 닦아냈다. 소매가 다 축축해지고, 쓸린 눈매가 아플 때까지.

“다 괜찮기는….”

완전히 젖었다시피 한 제 소매를 본 이도하가 울 듯이 픽 웃었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그는 방금 전에 제가 수십만 명의 사람을 죽인 재난을 일으키고, 제게는 가장 소중했던 친구를 죽였다가 다시 살려냈으며, 도저히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할 수 없어 스스로 모든 걸 잊어버렸었다는 걸 깨달은 참이었다. 아무것도 괜찮을 수 없었다.

이도하가 꾹, 숨을 삼켜냈다. 깊이, 폐가 빠득하게 아프도록 아주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후, 하고 내뱉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우르슬라는 여전히 그 자리- 낡은 의자에 앉아 있다. 제가 이리스티리움으로 넘어간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레타 랭은 보이지 않고, 여전히 밤이었다. 다만 모든 게 다르게 보였다.

눈을 감은 채, 비몽사몽간으로 어렴풋이 세상을 보다 눈을 뜬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이 그에게 닿았다. 소리도, 색도, 제 눈물도, 전부.

질끈 눈을 감은 이도하는 또다시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대충 쓸어냈다. 휘청거리듯 걸어 우르슬라에게 다가간 이도하가 그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다 쓸려 발갛게 된 채 물끄러미 우르슬라를 올려다보던 이도하가 손을 뻗었다. 쏟아진 갈색 머리칼을 조심스레 치워냈다.

그녀는 눈을 뜨고 있었다. 연푸른 눈동자가 멍하니 깜빡인다. 주름진 손, 주름진 얼굴, 누가 봐도 이제 50대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늙은 노인의 모습이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이도하가 지난날에 보았던 눈동자와 같다. 화면 속에서 잠깐 카메라를 보던 또렷한 눈. 초점 없이 흐리게 깜빡일 뿐인 저 눈이 이제 어디를 보고 있는지 이도하는 알 것 같았다.

“인소더블 우르슬라, 인소더블 이도하….”

그녀를 보며,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당신 계약자가 죽었을 리가 없지.”

이도하의 시선이 그녀의 손목에 닿았다. 이올라- 흐릿하게 번진 그 이름에. 이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만나려고 했던 우르슬라가 이렇게 늙어버린 채, 미쳐버린 채 고장 난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모습에 놀라 간과했던 것이다. 그녀의 계약명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은, 그녀의 계약이 아직 유효하다는 사실임을.

“어떻게 죽을 수가 있겠어….”

이도하가 힘 빠진 웃음을 흘렸다. 한숨 같은 웃음이었다.

“당신이나 나나… 알아? 우리가 세상을 완전히 망쳐버리고 있는지도 몰라.”

인소더블은 소환될 수 없다- 그 존재만으로도 세계를 짓누르기 때문에. 어쩌면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고 이도하는 생각했다. 어쩌면 우르슬라도 저도, 처음부터 소환되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국의 그 양반은 그렇게 조용히 살고 있는지도 모르지. 아니, 조용히 살고 있는 줄 알았던 저가 이미 한 세계를 무너뜨릴 뻔했던 것처럼, 그 양반도 이미 아무도 모르는 사고를 치고는 그렇게 사는지도 모른다. 누가 알 텐가 말이다. 세상이 이렇게 비틀어져 있는 줄도 모르고 다들 태연히 살고 있는데.

“왜 우리 같은 인간들이 태어났을까.”

여자의 계약명을 가만히 한 번 쓸어보며, 이도하가 중얼거렸다. 살갗이 다 늘어나는 여자의 여린 손목 위에 계약명이 손길을 따라 이리저리 쓸리지만, 지워지지는 않는다.

‘그럼 달리 당신이 그만한 힘을 가진 이유가 뭐 때문이게요!’

‘많이 받은 종에게는 많이 요구하실 것이고, 많은 일을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원하신다, 그 힘이 당신만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기적인 거예요!’

바락바락 외치던 목소리가 문득 떠오른다. 그때도 이건 참 개소리다, 생각했지만 지금 떠올리니 웃음이 다 터질 지경이다. 그때 그 박사는 신을 믿었던 모양이지만, 신이 정말 있었더라면 개인에게 감당할 수 없는 힘 따위는 차라리 주지도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렇게 대단하고 바르게 쓰길 원했더라면, 자기가 직접 했어야지. 사람이, 인간이 이런 힘을 갖고 태어나 얼마나 옳고 정의롭게 세계를 위해 쓴다고. 결국 다 이따위로 제 욕심껏 휘두를 뿐인데.

어린 이도하가 세계 너머의 어린 태자를, 시오한을 만났던 건 완벽한 우연이었다. 조심해라, 하지 마라, 8살의 이도하는 그 잔소리들에 진절머리가 나 있었다. 아이는 뭐든 할 수 있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니 지루하고 답답했다. 그런 아이에게 계약자들이 전하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는 멋지고 신나기만 했다. 그곳에 가면 뭐든 해도 될 것 같았다. 원하는 만큼 힘을 쓰고, 원하는 만큼 놀고, 정의롭고 멋있는 사람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이는 고작 8살이었고, 계약자가 될 수 있을 나이가 되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으며, 계약자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몰랐다.

그러다 어느 날 생각한 것이다.

그냥 한 번 가보면 되잖아?

그는 정말로 혼자서 세계를 넘어갔고, 그렇게 해서 8살의 이도하는, 8살 시오한에게로 떨어진 것이다.

그렇게 된 일이었다. 그냥 한 번 넘어가 볼까- 8살의 어린아이에게 그 가볍고 치기 어린 충동을 현실로 이루어낼 힘이 있었던 탓에.

그저 그뿐이었는데. 그런 우연이었는데.

‘내 이름 말이야, 뜻이 있나?’

‘비밀이야.’

겁에 질린 저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전부 묻어버리기나 했는데. 너를 까맣게 잊어버리기나 했는데.

넌 왜 아직까지도 잊지 못해서….

사실은 무서웠다. 제가 살린 그가 절 원망할까 봐. 멋대로 굴다 제 나라를, 제 사람들을, 절 죽인 저를 증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신… 나를 기다렸어?’

‘…기다렸어. 많이.’

다시 이도하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떨어졌다. 입술을 깨물고 참아보려 한 이도하가 결국 제 한쪽 팔에 얼굴을 묻었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에 흐느낌이 번졌다. 우르슬라 앞에 주저앉은 채 이도하는 다시 또 숨죽여 한참을 울었다.

이윽고, 이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눈가가 온통 젖어있으며 젖은 머리칼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다. 우르슬라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에 벽난로의 붉은빛이 스며들었다. 한 번 깜빡이자, 고여 있던 물기가 도망치듯 주르륵 흘러내린다.

“…모르겠다, 나는.”

이도하가 말했다.

“죽어서 지옥 밑바닥에 꺼꾸러지든 할 테니까.”

우우웅- 이명이 울렸다. 오두막이 흔들렸다. 새까만 눈동자에 파도가 덮치듯 푸른 물결이 일어, 완전히 눈동자를 뒤덮는다. 섬광으로 새파랗게 달아오른 눈동자가 우르슬라를 보았다. 푸른 섬광으로 머금은 눈물이 턱 끝을 타고 뚝, 그녀의 담요 위로 떨어졌다. 이도하가 애원했다.

“그러니까…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발 좀 가르쳐 주라.”

맹약. 절대로 헤어지지 않을 맹세. 반드시 지켜질 약속. 당신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기록을 남겼는지. 어째서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지금 이 어긋나고 뒤틀린 시간은 어떻게 된 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더는 기다리게 할 수가 없어.”

그가 손을 뻗었다. 창백하게 질린 손끝이 떨린다.

“다시는, 기다리게 안 해.”

버짐이 피고 주름진 뺨에, 그의 손이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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