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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38화 (138/250)

138화

시오한이 일어섰다. 길고 화려한 옷자락이 바닥에 끌린다. 머리 위의 왕관에 대충 아무렇게나 떨어트리고, 침대 발치에 기대어져 있는 검집을 들었다. 맑은 쇳소리를 내며 서늘한 검이 뽑혀 나온다. 위로 세운 검날에 잠시 그의 얼굴이 비쳤다. 젖살은 모두 사라지고, 앳된 기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곧 검이 중심을 잃은 것처럼 아래로 떨어진다. 카각- 검 끝이 바닥에 박혀 들어갔다. 주욱- 박힌 채로, 길게 선이 이어진다.

이윽고, 시오한은 그 앞에 섰다. 거대하게 새겨진 소환진 앞에. 처음 이 소환진을 그렸을 때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더랬다. 가슴이 꽉 막혀 뭔가가 툭, 하고 터질 것 같았고… 조금 두렵기도 했다. 소환진에서 푸르게 빛을 머금기 시작했을 때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도 아이도 더 이상 아이가 아니게 된 지금까지, 아주 오랜 기다림 끝의 소환이었다.

그러나 빛이 사라지고, 소환진도 사라진 자리에 앉아 시오한은 아이가 모든 걸 잊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어쩌면 이곳과 저곳의 시간이 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이와 그의 시간은 매번 어긋나 있었으니, 그래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곳의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에, 사실 아이의 시간은 흘러가지 않은 걸 수도 있다고. 아이에게는 한 시간이었던 한 달을 기다렸던 것처럼 기다리면 될지도 모른다고. 또 그런 미련을 품었다.

재앙 이후로, 모든 것은 다시 그가 아는 이치대로 돌아갔다. 2년이 어긋나 있었지만, 아무도 그 사실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이 묘한 비틀림을 알아챈 것은 오직 그뿐인 것 같았다. 세상은 그저 그런대로 잘 흘러갔다. 별다른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그러니, 포기해야 맞다.

앉아 물끄러미 바닥에 새겨진 소환진을 바라보던 시오한이 픽 웃었다. 고개를 떨어트리자, 황금색 머리칼이 쏟아진다. 그가 검을 들었다. 힘을 줄 필요도 없었다. 검은 날카로웠고, 잘린 손목에서는 금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챙그랑- 검이 바닥을 굴렀다. 파인 홈을 타고, 피가 흐르기 시작한다. 소환은 기원이며, 그의 기원은 오직 단 하나뿐이었다.

기적.

시오한은 무감각하게 제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수많은 소환들은 다 포기하지 못한 제 미련이었다. 네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면- 잊었다면. 그토록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아 한다면 나는 너를 포기해야 맞다.

널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네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보았지만, 더는 할 수가 없다. 기다리고 기다리면 널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만이 내 전부였으니, 그것마저 없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어차피 죽을 거라면, 네 얼굴을 꼭 한 번만 더 보고 죽고 싶다. 네가 어떻게 자랐을지, 어떤 모습으로 컸을지, 한 번만 더 너를 보고 싶다.

푸른빛이 시야를 물들였다. 시오한이 고개를 들었다. 푸른빛이 줄기줄기 휘몰아치고 휘감기며 형체를 이루어낸다. 다리, 허리, 가슴, 팔, 어깨… 얼굴. 완전한 사람의 형체를 이루며, 빛이 흩어진다. 바람에 날려 살짝 떠올랐던 검은 머리칼이 가볍게 가라앉는다. 찌푸려진 눈동자가 그를 보았다. 까마귀의 깃털처럼 까만 눈동자가. 창백한 안색에, 놀란 얼굴로, 코를 틀어막는다.

[안녕.]

‘야, 안녕!’

햇빛이 어른거리던 얼굴이 떠오른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던 그 앳된 얼굴이. 환하게 그를 향해 웃던 얼굴이 이제는 완연히 어른이 되어 그를 본다. 조금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얼굴로.

[…미친.]

[드디어 얼굴을 보는군. 잘생겼는걸.]

[…미친놈인가?]

‘똘추 말미잘아!’

‘이 바보!’

하하-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제가 틀렸음을 직감했다.

널 보고도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니.

살고 싶다.

너를 보니 살고 싶어. 다시 한 번 네 웃는 얼굴을 보고 싶고, 네게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해주고 싶다.

너와 살고 싶다. 네가 있는 세상에서.

[그 미친놈이 이제 곧 죽을 것 같은데 살려주겠어?]

한번만 더, 나를 살려줘.

휘청, 몸이 기운다. 바닥에 부딪히는 충격이 없었다. 시오한은 아이가- 이제는 어른의 모습을 한 그가 저를 받쳐 안았음을 알았다. 주변이 시끄럽다. 시야가 어른어른, 거뭇하게 물든다. 시오한은 까맣게 가라앉으려는 시야로 그를 보았다. 정말 꼭 그날 같다. 해를 등 뒤에 두어 실루엣이 어른거리던 날 같다.

[야, 야- 이봐. 야! 이 양반아! 이름! 이름 뭐야? 이름 뭐냐고?!]

‘너 이름 뭐냐니까?’

제 뺨을 내리치는 손길에 픽- 별수 없이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만다.

[시오한… 오르페노스.]

[그래, 시오한 오르페노스. 이도하, 내 이름 이도하야. 들려? 이도하라고!]

‘오한이? 너 이름이 오한이야? 이름 진짜 웃기다!’

그대는 다 잊어. 내가 기억할게.

[빨리 계약명- 아니 이 미친놈아 죽지 마!]

시오한이 손을 들었다. 커다란 손이 그의 손목을 잡아 올린다. 느리고, 모든 걸 알고 있었지만 바보였던 제 손목을 낚아챘던 것처럼.

[화이람.]

“화이람!”

쨍그랑- 까맣게 암전되어 가던 시야가 산산조각으로 깨어져 나간다. 이도하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몸을 일으킨 시오한이 그의 손을 잡은 채 놀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화이람, 그대 어떻게-”

뜨거운 것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황금색 눈동자가 당황으로 흔들린다.

“화이람?”

“살아 있었구나.”

“뭐?”

“살아… 있었어.”

이도하가 손을 뻗었다. 앳된 얼굴- 노는 것도, 제대로 웃는 것도 모르던 아이. 고작 저와 같은 8살인 주제에 매사에 진중하고 근엄한 말투를 써서 저를 웃게 만들었던, 막무가내로 구는 절 고분고분 따라주며 결국에는 조그만 풀꽃처럼 웃어주고 말던, 제 조그만 왕자님.

떨리는 손이 시오한의 얼굴을 덧그렸다. 당황한 시선이 그런 이도하의 손을 따라갔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낸다. 다 부질없었다. 이도하가 눈을 감는 순간, 눈물은 주체할 수 없이 떨어졌다. 문득 이도하가 흠칫, 몸을 떨었다. 길고 곧은 손이 탁- 물러서는 이도하를 붙잡았다.

“화이람.”

이도하는 뿌옇게 흐려진 시선으로, 제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보았다. 우르릉- 천둥소리가 퍼진다. 검은 동공이 확장되었다.

‘어째서 비가….’

‘비가 많이 오네요. 우기라더니.’

‘우기는 지났습니다. 이렇게 많이 올 때가 아닌데… 이상하군요.’

쏟아지는 폭우, 바닥에 떨어져 있던 연푸른 꽃잎.

가야 한다. 여기 있으면 안 된다. 이건 실수고 착오였다. 오만이었다. 이런 식으로 세계를 멋대로 짓밟고 침범해 들어와서는 안 되었다. 이 세계에서, 저는 사라져야 한다.

“화이-”

그를 단단히 잡고 있던 손이 사라졌다. 우르릉- 경고처럼 울리는 천둥소리가 잔상처럼 멀어진다. 흘러내린 눈물은 황금빛 머리칼이 흐트러진 부드러운 이불 위가 아니라, 때가 탄 어두운 카펫 위로 떨어졌다. 타닥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들린다. 어두운 실내에 불꽃이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텅 빈 이도하의 손을 비추었다. 이도하는 그 위로, 제 눈물이 연이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찌르르, 밤벌레가 평화롭게 운다. 더 이상 빗소리 따위는 없었다.

이도하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난로에는 여전히 장작이 타오르고 있었고, 이 조그맣고 손때가 가득 탄 집은 어두운 가운에 그 불그스름한 빛에 물들어 있었다. 벽난로 가에 놓인 흔들의자에는 그 여자가 가구의 일부분인 양 앉아 있다. 우르슬라. 고개를 떨어트린 채, 죽은 것 같이 굳어진 모습으로. 느리게 오르락내리락하는 어깨만이 그녀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도하가 다시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그 위로 어린 손이 흐릿하게 겹쳐 보인다. 젖어 있고, 흙이 묻어 있는…. 소매에는 피가 얼룩져 있다. 이도하가 저도 모르게 소매를 문질렀다. 그러나 더 또렷해지기만 한다. 기억이 선명해진다. 그가 숨을 헐떡였다.

‘대지진 닥친 이리스티리움… 대비 없어 피해 커.’

‘재해 없다고 알려진 오즈에 재난 - 피해자 수십만 명으로 추산돼.’

‘직격타를 맞은 곳은 대제국 이리스티리움의 성도로….’

‘이리스티리움 대지진, 원인은 무엇 때문?’

저였다.

이도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손가락이 부러지도록 쥔 주먹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이도하가 바닥을 내리쳤다. 쿵, 쿵, 거세지던 주먹질은 제 손을 죄 부수어버릴 듯하다 어쩔 줄을 모르고 머리를 감싸 안았다. 통증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도하가 몸을 웅크렸다. 카펫 위로 검은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입을 벌려도 소리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목줄기를 송두리째 움켜쥐고 뜯어내는 것 같다. 비명은 속으로 파고들어 그의 속을 찢어놓았다.

모든 걸 할 수 있는 이도하, 뭐든 멋대로 하던 이도하. 세계조차 마음대로 넘나들며, 이치도, 법칙도 모두 무시하고 장난감처럼 모든 걸 제 좋을 대로 갖고 놀았던 이도하.

땅이 흔들리고 그 위에 선 모든 것이 무너지고 휩쓸리는 동안 하늘도 무너져 내렸다. 조각나고 깨어져 내리며 그것이 벼락이 되어 떨어져 부서졌다. 세계가 무너졌다. 고막을 찢을 듯 사위를 흔들던 벼락 소리는 꼭 세계가 포효하는 것 같았다. 사실은 가장 처음 벼락이 쳤던 순간부터 그는 이미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 모든 게, 저 때문이라는 걸.

철부지 어린애가 사고를 쳐 놓고 아무도 모르게 얼른 수습해놓으려고 하는 것처럼, 저는 그렇게 산산조각 나던 세계를 또 제멋대로, 고장 난 장난감을 고치듯 이어 붙여 보겠다고 손을 대다가… 결국 모든 걸 망쳐버렸다.

이도하가 웃었다. 울며 웃었다. 세계로부터 도망친 8살의 어린 저가 책상 밑에 숨어, 벌벌 떨면서 미친 것처럼 웃다 울었던 것처럼. 이도하가 귀를 막았다. 어린 이도하가 귀를 막았듯이. 신음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는 사방을 뒤덮는 울음소리를 들었고, 통곡을 보았다. 가족을 찾으려 손톱이 부러지고 뽑히도록 폐허 더미를 헤집던 사람들 틈으로 도망쳤다. 죽은 아이의 시신을 붙잡고 어쩔 줄을 모르고 우는 소리를 들었다. 절규를 보았고, 절망도 보았다.

너마저 죽였다.

“시오한-”

이도하는 울며 신음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이도하가 헐떡이며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내가 너를 죽였어.

내가 네 나라를 망치고, 모두를 죽이고, 너마저 죽였다.

그걸 견딜 수가 없었다. 이도하가 눈물을 쏟았다. 어린 이도하는 책상 밑에서 숨죽여 울었다. 귀를 막았으나 비명과 신음소리, 울음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잔해 아래 깔려 삐죽 나와 있던 피투성이 손이 모두 일어나 그를 붙잡고 다그치며 윽박을 질러대는 것 같았다. 원망, 절규, 오열 그 하나하나가 단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그를 타고 기어올라 귓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무너지는 폐허 속으로 가라앉던 아이의 모습이, 눈을 감아도 망막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절 보던 황금색 눈동자가 사라지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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