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137화 (137/250)

137화

시오한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궁의 깊은 침전 중 한 곳에 누워 있었다.

그날로부터 꼬박 일주일이 지났다고, 그의 곁을 지키고 있던 궁의가 설명했다. 궁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으며, 사상자가 많았지만 다행히 황제와 황후는 무사하다고. 행방을 알 수 없던 그는 궁의 화단에서 발견되었다고. 정신을 잃은 상태였으나, 기적적으로 다친 곳은 없다고 했다. 어둑하게 조명을 낮춘 침전을 한 번 둘러본 시오한은 제 손을 바라보며, 묵묵히 그 말을 들었다.

갑작스레 닥친 재앙은 갑작스레 끝났다고 했다. 그 위에 선 모든 것을 다 허물어 버릴 것처럼 흔들리던 대지도 멈추었고, 퍼붓던 비도 모두 함께 멈추었다고 했다. 그러고 나자, 거짓말처럼 해가 비추었다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세상은 그들이 원래 알던 세상으로 돌아갔다.

모든 것이 끝장난 것 같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건 세상은 그대로 흘러갔고, 차츰 모든 것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다시는 예전의 찬란했던 모습을 되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성도도 원래의 모습을 찾아갔으며,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사람들도 다시 살아가게 되었다.

그해에는 유독 계약주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이리스티리움이 다시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모두가 무언가를 기원한 때였다.

아무도 재앙의 피해가, 그들이 직접 겪은 재앙만큼이나 거대하지는 않았다는 걸 깨닫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살아남은 이들이 마주하는 모든 피해와 상실이 전부 불행이고 슬픔이었기 때문에. 그 크기 따위는 짐작할 여력이 없기 때문에.

낮과 밤은 늘 그랬던 것과 같이 찾아왔고, 하루하루가 흘러갈수록 모든 것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오한만 빼놓고.

어떻게 제가 살아있을까. 왜 아직도, 저는 살아있을까.

햇볕이 따스하게 비추는 낡은 책상을 바라보며, 어느 날 시오한은 멍하니 생각했다. 계절이 두 번, 세 번 바뀌고, 화창하게 여름 꽃이 만개하는 계절이 또 다섯 번째로 지나갔다. 그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를 기다리는 것은 그의 일이었다.

왜?

당시의 그는 죽었어야 했다. 성도의 폐허 속에 묻힌 사람들 중에 그도 있어야 했다. 그는 상처 하나 없이 황성의 화단에서 발견될 것이 아니라, 그 아래 시체로 발견되어야 했다. 그게 옳았다.

기다리면, 언제나처럼 네가 쨘, 하고 나타나서 알려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그는 아이가 나타나서 알려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절 살린 거라고. 기행을 벌이고 사고를 치며 제 어머니에게 혼이 났다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짓곤 하던 그 뜨끔한 것 같은 얼굴로, 네게만 알려 줄게, 하며 비밀을 말하던 얼굴로.

시오한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이와 잡았던 그 작은 손은 커졌다. 길어진 손가락이 낯설었다. 다리가 닿지 않아 종종 받침대를 받쳐야 했던 발이 단단하게 바닥에 닿는 느낌이 이상했다. 길게 허리까지 늘어진 머리칼의 무게도, 이 숨 막히는 정적도, 모든 것이 이상했다.

아무도 아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가장 가까이서 아이를 보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리온 시타조차도 아이에 대해서 조금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의 침실에 때아닌 눈이 내렸던 흔적도, 아이가 몇 번이고 벗고는 잊어버렸던 신발도, 꽃잎으로 그의 손톱을 물들어보려고 했던 흔적도,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애초에 이 세상에 단 한 번도 그가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게 꿈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러면 나는 왜 이렇게 견딜 수가 없지?

푸른 꽃잎이 흩날리는 창밖을 보며, 시오한은 생각했다.

왜 이렇게 숨이 막히지.

그 모든 게 꿈이었다면, 네 얼굴조차도 기억나지 않아야 할 텐데.

네 웃음도.

목소리도.

온기도.

오직 그의 기억만이 아이를 증명했으나, 시오한은 이제 아이의 이름조차도 기억나지 않았다. 황궁의 깊은 침실, 화단에서 발견되었다던 그가 일주일 만에 눈을 떴던 그 날 이후로 아이의 이름은 다시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이름조차 사라진 기억뿐이었다.

시오한은 누구에게도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그런 아이는 없다. 그런 아이가 있었던 적조차 없다. 꿈을 꾼 것 같다. 재앙이 덮친 충격으로, 뭔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누군들 그렇게 말하면 정말로 그렇게 믿게 될 것 같았다.

시오한이 눈을 감았다. 책상 위에 펼쳐 놓았던 낡은 책의 책장 위로 뚝-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이렇게 선명한데….

꿈일 리가 없다. 허상일 리가 없다. 네가 내 삶에 나타난 적조차 없을 리가 없다.

나는 이제 네가 없었던 세상에서 사는 법을 잊었으니. 그래서 하루, 매 순간, 모든 시간이 이렇게 숨 막히고 견딜 수가 없으니. 이런 세상에서- 네가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두려워 견딜 수가 없으니.

더 이상 네가 내게 와주지 않는 세상에서.

시오한이 눈을 떴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끔찍하게 적막한 서고에는 그뿐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시오한은 그 적막에 눌리는 것 같았다. 숨이 막힌다. 그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여전히 그대로였다. 손때가 묻은 오래된 책장, 높은 천장, 건조한 종이 냄새, 창문으로 밝게 들이치는 햇빛, 그 속에 유영하는 공기.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세상에 반짝이는 것은 모두 네가 가르쳐 주었는데.

내가 매번 널 잊어서, 네 이름을 잊어서, 그래서 너는 돌아오지 않는 걸까. 나 같은 건 전부 잊어버렸을까.

아니, 사실은 안다.

잊는 게 편할 것이다. 사람이 죽고 죽이는 게 만연한 이런 세상 따위,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람이 사람을 이용하는 이런 세상, 널 견디지 못하는 이런 위험한 세상 따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너는 상처를 받았을 테고, 무서웠을 것이다.

세상이 무너진 기억 같은 건, 없는 게 널 위한 길일 것이다.

울던 얼굴이 떠오른다. 빗속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겁에 질려 있던 얼굴이.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하지 마!’

그렇게 말하려던 게 아니었다. 네 탓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다 제 탓이라고, 알면서도, 어쩌면 모든 걸 예감했으면서도, 막을 수 있었으면서도- 너와 함께했던 그 모든 순간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못해서, 네 웃음을 보는 게 너무 좋아서, 네가 다시는 내게 오지 않을까 봐,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은 내 탓이라고. 그래서 그랬던 거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너는 늘, 단지 돕고 싶었을 뿐이라는 걸 알고 있다고.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시오한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손끝에 닿은 햇살처럼 따뜻한 것이 그의 볼을 타고 흘러 후두둑- 책장 위로 연이어 떨어졌다. 낡은 책장이 울룩불룩 물든다. 내내 보고 있던 글자들이 흐려진다.

‘화이람- 일상에 찾아와 변화를 안겨주는 기적의 존재.’

신화와 옛 전설 따위를 기록한 이 오래된 책 위로, 시오한은 무너져 내렸다. 긴 황금색 머리칼이 쏟아져 그를 가두었다.

보고 싶어.

그저 보고 싶다. 네가 너무 보고 싶어.

한 번만, 한 번만 더 내게 와준다면 두 번 다시 네 손을 놓지 않을게.

세계가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그러니 한 번만 더 내게 와줘.

끔찍하게 조용한 서고에서, 시오한은 제 울음소리를 들으며 울었다.

***

[폐하-]

창밖으로 부는 선선한 바람에 손가락을 놀리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긴 머리칼이 바람에 부드럽게 날렸다.

[명하신 대로 모두 처리했습니다.]

[수고했다.]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짧은 남색 머리칼이 흔들린다. 시오한은 잠시 그 머리칼을 응시했다. 담담한 얼굴 위로 빗속에서 엉엉 울던 아이의 얼굴이 스친다. 어느 날 암군으로 나타난 그를 시오한은 알은 척 한 적이 없었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날까지 저를 후원하고, 귀족 가에 입양되도록 한 게 시오한임을 아는 것을 내색한 적 없었다. 처음 암군으로서 시오한을 만났던 날, 남자는 정중하고 극진하게 예를 올렸고 시오한은 그의 존재가 기꺼워 웃었다. 남자는 아이의 흔적과도 같았다. 비록 본인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물어볼까.

시오한이 언뜻 웃었다. 다 부질없는 짓인 걸 벌써 몇 년에 걸쳐 확인했음에도 여전히 미련하게 구는 제가 우스워서. 대신에 시오한은 달리 물었다.

[군나르.]

[예, 폐하.]

[네 계약자는 어찌 지내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이리 물어보는 게 퍽 당황스러운 듯했다. 어찌 지내냐-하는 그 두루뭉술한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 같았다. 시오한은 흥미롭게 기다렸다.

[별일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남자가 마침내 대답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적절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잘 모르겠습니다.]

[사사로이 대화를 하지는 않는 모양이지.]

[송구합니다.]

툭, 시오한은 창가에 뒷머리를 기대었다. 아닌 경우가 도리어 특별하지, 계약자와 계약주의 관계가 대체로 저런 모양이었다. 계약주는 목적으로 계약자를 소환하고, 계약자를 소환하는 1분 1초가 모두 마력인데 별 의미도 없는 잡담으로 귀한 마력을 낭비할 계약주는 많지 않다. 저 군나르는 성격상 더욱 그렇다.

[그래, 물러가라.]

[예, 폐하.]

간결하게 대답한 남자가 사라졌다. 시오한은 조금 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창가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햇볕이 따스하고, 바람이 선선하며 하늘이 푸른 게 아주 좋은 날이다. 18번째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