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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36화 (136/250)

136화

[…한, 시오한!]

시오한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허전한 품이었다. 그것을 느낀 순간 심장이 덜컥, 떨어졌다. 머리부터 발끝으로 몸속의 따뜻한 것들은 모조리 쓸려 나가는 것 같다. 시오한이 번쩍 눈을 떴다. 푸른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오한!]

비가 떨어진다. 시오한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눈을 깜빡였다. 도하는 울고 있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엉엉 운다. 시오한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시오한, 시오한!!]

[도하야.]

[죽은 줄 알았잖아!]

퍼붓는 빗줄기 속에서 눈물 따위는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그냥 온통 젖어 있었다. 눈조차 제대로 뜨기 힘들었으며, 목소리는 간신히 들렸다. 도하는 시오한의 옷자락을 붙들고 그곳에 얼굴을 묻었다. 그 머리를 감싸주려던 시오한이 멈칫했다. 그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폐허 속에 있었다. 모든 게 무너져 있었다. 석양이 붉게 내려앉을 때면 옹기종기, 올록볼록 선을 만들던 성도의 전경이 모조리 쓸려 나가고 없다. 주변에 원래는 무엇이었는지 모를 건물의 잔해가 파묻히고 쓸린 시체와 함께 대충 버린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

그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는 도하의 몸이 덜덜 떨린다. 시오한이 눈을 깜빡였다. 여러 번 깜빡여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머리는 새하얗게 비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비가 쏟아지는 아래에서, 그들은 한동안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러고 있었다. 우르릉- 다시 한 번 세상이 흔들릴 때까지.

대지가 흔들린다. 아래에서부터 금방이라도 무언가 올라올 것 같이 들끓는다. 그들은 반사적으로 서로를 붙잡고 눈을 질끈 감았다. 우우웅- 이명이 울린다. 그 순간 시오한이 번쩍 눈을 떴다.

시오한은 퍼붓는 빗속에서 그들을 감싸고 동그랗게 둘러진 보이지 않는 막을 보았다. 빗방울이 허공에서 튕겨 부서져 나가며 그 형체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비가 올 때면 도하가 어김없이 만들곤 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주변으로, 다시 빗방울이 하나씩, 모두 허공에 정지한다. 퍼붓는 빗방울이 멈추고, 하늘에 가득 찬 먹구름도 멈추었다. 어느새 흔들리던 대지도 멈추었다. 세상 자체가 붙잡힌 것처럼.

[내, 내가 고칠게, 시오한.]

울며, 도하가 말했다. 도하는 시오한이 세상의 마지막 끈인 양 온 힘을 다해 끌어안고 있었다. 그마저 놓으면 정말 모든 게 끝나버릴까 봐 두려운 아이 같았다.

우우웅- 이명이 다시 허공을 흔든다.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세상이 다시 흔들릴 것처럼 진동이 대기를 타고 퍼져나간다. 그 파장에 닿은 듯 부르르 떤 빗줄기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늘을 꽉 채운 먹구름이 움직인다.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사이 햇살이 비추었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한다.

성도가 다시 움직인다. 그들을 그 자리에 두고서, 무너졌던 모든 것들이 다시 살아있는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간다.

시오한은 비가 쏟아졌다가 멈추길 반복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이 환상처럼 가득 수놓아진 것처럼 보인다. 하늘이 움직이는 모습이, 꼭 도하가 언젠가 환상으로 보여주었던 바다 같다.

[하지 마!]

시오한이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를 붙잡고 있던 도하가 눈에 띄게 움칠했다. 거짓말처럼 모든 게 우뚝 멈추어 섰다. 숨이 막힐 정도로 시오한을 꽉 끌어안고 있던 힘이 조금 풀렸다. 느리게 몸을 떼어낸 도하가 숨을 헐떡이며, 멍하니 그를 보았다. 완연히 푸르게 물든 눈동자를 마주하며 시오한이 다시 말했다.

[…하지 마.]

도하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만해.]

시오한은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렁그렁 물기로 가득 차 있던 도하의 눈에서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를 것이 또르륵 흘러내리는 순간, 쏴아아아- 다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춤, 도하가 그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가쁜 숨에 작은 어깨가 들썩인다. 아아악- 어디선가 들려온 절규에 파드득, 떤다. 황망하게 돌아가는 시선을 시오한이 붙잡았다.

[안 해도 돼, 그냥… 그냥 둬.]

제발. 시오한은 그 말을 삼켰다. 그도 두려웠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숨기며 시오한이 도하를 붙잡았다. 이유 같은 건 없다. 그저 예감일 뿐이었다. 말할 수 없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사람들이 다쳤잖아!]

[도하야.]

[할 수 있다고!]

도하가 그의 손을 뿌리쳤다. 안간힘을 쓰며 참는 듯했으나, 그 얼굴이 일그러진다.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안 해?!]

왈칵, 도하가 울음을 터트렸다. 도와줘야 된단 말이야- 그 말은 울음에 묻혀 뭉그러졌다. 얼굴을 마구 닦아내고 쓸어내며 일어섰으나, 온 사방이 절규와 울음으로 휩싸여 있었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메아리처럼 울리는 비명 소리에 어쩔 줄을 모르고 겁에 질려 운다. 푸른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린다. 그가 질끈 눈을 감는 순간, 또다시 쿠르릉- 하늘이 울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머리카락을 뜯어낼 듯 몰아친다. 다시 흔들린 땅에 시오한도, 도하도 무너진 잔해 위로 넘어져 굴러떨어졌다.

뾰족한 무언가가 옆구리를 푹, 파고든다. 불로 확 지지는 듯한 통증에 순간 시오한은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이만 악물었다. 아아악-!! 비명소리에 시오한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입구가 무너진 건물에서 서로 밟고 밟아 뒤엉킨 사람들 위로 굴러 떨어진 도하가 일어나려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다급히 몸을 일으킨 시오한이 성큼성큼 무너진 잔해를 디디고 도하에게로 손을 뻗었다. 사색이 되어 시오한의 손을 잡고 잔해 위로 넘어온 도하는 시오한이 겁이 날 정도로 덜덜 떨고 있었다. 부여잡은 시오한의 소매조차 파들파들 떨릴 정도였다. 우우웅- 그는 허공이 소리 없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시오한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홱, 고개를 돌렸다. 뒤엉켜 깔려 있던 사람들이 신음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위에 있던 사람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쾅-!! 하늘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고막을 찢어놓을 듯 터져 나왔다. 귓가가 또다시 멍멍해진다. 도하가 와락 그를 붙잡는다. 반사적으로 그를 감싸고 고개를 숙였던 시오한은 순간 무언가를 느꼈다. 고개를 들었을 때, 그가 본 것은 우뚝 선 백색 성의 절반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었다. 성에 불길이 치솟는 모습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동쪽 성의 높게 솟은 첨탑들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거짓말 같다. 높이 휘날리던 휘장들이 불길 속에 삼켜진다.

[……]

시오한은 세차게 휘날리는 제 금발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폭우 속에서 불타오르는 백색 성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현실감이 없어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안 돼.]

시오한이 고개를 돌렸다. 도하가 멍하니 그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그가 고개를 젓는다. 별안간, 도하가 그를 뿌리치고 달려 나갔다. 잠시 시선을 빼앗겼던 시오한이 한 발 늦게 도하를 쫓았다.

땅에 처박힌 시계탑이 꼭대기와 깔린 사람들, 울며 절규하고, 상상해본 적 없는 재앙에 미쳐 웃는 사람들, 퍼붓는 빗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화마, 갈라진 땅, 널브러진 시체 위에 앉아 빗속에서 날개를 팔랑거리는 검은 나비- 모든 게 이질적인 폐허 속에서 아이를 쫓아 달리며 시오한은 그 작은 어깨가 어른어른 흐려지는 것을 보았다.

시오한이 그의 팔을 낚아챘다.

[안 돼-!]

아이가 발작하듯 시오한을 뿌리쳤다. 시오한이 입을 벌렸다. 그러나 그는 아이를 부르지 못하고 순간 멈칫했다. 질끈 입술을 깨문 그가 단단히 아이를 잡았다. 우웅- 또 이명이 울린다. 울며 고개를 흔드는 아이의 눈에 푸른 섬광이 번진다. 성을 전부 불사를 듯 휘몰아치던 화마가 한풀 꺾이며 고개를 숙인다.

[하지 마-!]

[안 된다고!!!]

아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의 신형이 흐릿하게 흔들린다.

[저기 네 엄마아빠가 있잖아!!]

[-제발!]

불이 완전히 꺼지고, 거뭇하게 그을린 성이 빗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시오한은 그 그을림이 씻겨 내려가듯 사라지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고 불길함에 가슴이 조여 든다.

[…그만해.]

[너… 너 왜 그래, 왜….]

[……]

[왜 그래….]

아이가 뒤를 돌아본다. 무너진 백색 성을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시오한을 본다. 그 순간까지도 여전히 섬광으로 푸르게 달아 올라있는 푸른 눈동자가 시오한을 지나쳐 그의 뒤에 있는 무너진 폐허를 보았다가, 시오한에게 붙잡힌 제 손으로 옮겨간다. 다시, 아이가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그의 숨이 점점 가빠진다. 어깨가 빠르게 들썩인다.

[…가야 돼. 여기 있으면 안 돼.]

주춤, 아이가 뒷걸음질 치며 고개를 흔든다. 우는 것이다. 그저 완전히 길을 잃어 도무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아이처럼 도리질을 친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숨이 넘어갈 것처럼 가빠지고, 아이가 가슴을 부여잡았다. 몸부림을 친다. 그 모습이 뿌옇게 흐려진다.

덜컥 겁이 난 시오한이 아이를 부여잡았으나, 아이는 그를 밀쳐냈다. 발작적인 손길에 퍽- 밀쳐진 시오한이 순간 휘청, 기울었다. 쿠르릉- 진동이 울린 것은 동시였다. 평소라면 그 정도 힘에 밀렸을 시오한이 아니었다. 아까 잔해 위로 굴러 떨어지며 무언가에 찔린 옆구리 때문인지, 그 순간 흔들린 땅 때문인지는 시오한도 알 수 없었다. 시오한이 아이의 손을 놓쳤다. 아이의 몸이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는다.

그 순간- 거대한 충격이 세상을 덮쳤다. 떨어지는 조그만 상자 속에 갇힌 세상에 불과한 것처럼 모든 게 흔들렸다. 하늘이 조각나고 땅이 일어섰다. 빗소리조차도 덮으며, 그저 무너지는 소리만이 귀를 꽉 메운다. 바람이 휘몰아쳤다. 발밑이 푹 꺼진다. 시오한은 경악으로 커진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다. 희망이 꺼지듯 푸른빛이 꺼졌다. 까만 눈동자에 속에 제가 비추었다. 그는 무너지는 폐허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아이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위로부터 새까만 그림자가 쩍 벌린 아귀처럼 시오한을 삼켰다.

[시오한---!!!!]

아마도, 그렇게 제 이름을 부른 것 같다. 쓸려 나가듯 사라지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시오한은 생각했다.

까맣게,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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