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난 엄마아빠 다음으로 시오한 네가 최고 좋아.]
눈가에 붙은 머리칼을 떼어주던 시오한이 멈칫했다. 그가 입술을 꾹 물었다. 도하가 쑥스러운 듯 으으으- 몸을 떨며 웃는다. 장난기가 가득한, 개구쟁이 같은 얼굴로. 언제나 그는 상상도 해본 적 없는 곳으로 그를 끌며 짓던 웃음으로.
시오한도 활짝 웃었다. 도하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야, 너 또 왜 울어?!]
도하가 허둥지둥 시오한의 얼굴을 마구 훔쳤다. 얼마나 서툴고 손이 거친지 얼굴 가죽이 죄다 벗겨질 것처럼 아팠다. 시오한은 다시 웃음을 터트렸고, 도하는 별 희한한 것을 다 보겠다는 얼굴로 그를 보더니 곧 사뭇 어른스럽게 부욱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와락- 시오한을 끌어안는다. 순간 놀란 시오한이 움찔했다.
[너 완전 울보구나?]
팡팡, 작은 손이 그의 등을 두드렸다. 시오한은 난생처음 겪는 포옹에 놀라 팔을 든 채로 어쩔 줄을 몰라 하다, 조심스레 도하를 마주 안아 보았다. 아주 편안하고, 따뜻했다.
[…그런가 봐.]
팔에 힘이 들어갔다. 시오한이 도하를 꼭 끌어안았다. 꽉 누르는 힘에 도하가 끙, 하고 신음했지만, 도저히 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이 순간의 모든 것이 소중해, 도리어 사무치게 두려웠다.
[으악, 야, 놔 봐. 넌 힘도 이렇게 세면서 뭐가 무서워서 울어? 비 너무 많이 와서 그래? 멈춰줄까?]
없는 인내심을 잠깐 끌어모아 가만히 있어 주던 도하는 결국 오래 버티지 못했다. 버둥거리는 몸짓에 시오한은 스르르 그를 놓아주었다. 절대로 놓아줄 수 없을 것 같았으나, 답답해하니 더 버틸 수 없었다. 어차피 시오한은 이 아이를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얍.]
[잠깐-]
도하가 하늘을 향해 번쩍 손을 들었다. 순식간에 새까만 눈동자가 푸른 광채로 뒤덮이는 동시에, 우우우웅- 거대한 이명이 울렸다. 시오한이 반사적으로 말리려 했으나, 이미 한발 늦은 뒤였다. 땅이 다 잠겨버릴 것처럼 쏟아지던 폭우가 뚝 멈추었다. 먹구름만 흔적처럼 남아 일렁거리다, 물에 솜이 녹아나듯 찢어져 사라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 아주 금세 햇살이 그 틈 사이로 찬란하게 반짝였다. 길가를 걷던 사람들도, 천막 아래로 물건들을 다 당겨놓으며 정리하던 상인들도 어리둥절하여 멈춰 섰다.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주변을 채운다. 시선들이 하나같이 하늘로 향했다.
[……]
[됐지?]
도하가 뿌듯하게 묻는다. 햇살이 그 위로 내리쬔다. 검은색 머리칼이 반짝였다.
그 순간이었다.
세상이 번쩍였다. 일순 모든 것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새하얀 빛으로 쓸려나갔다. 시오한은 찢어지는 듯한 쇳소리와 쾅-! 하고 고막을 때리는 굉음을 들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머리가 울리고 세상이 위아래로 뒤집히는 것처럼 감각이 진탕된다. 머리가 흔들린 건지, 발밑이 흔들린 건지 알 수 없었다. 둔탁한 통증을 느꼈으나, 어디에서 오는 통증인지도 알 수 없었다. 손도, 발도, 전부 사라진 것 같다.
차가운 것이 흠뻑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시오한이 이를 악물었다. 머리를 부여잡은 손끝부터 천천히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하얗게 번졌던 시야에도 차츰 실루엣이 드러났다. 귀가 멍멍하다. 시오한이 머리를 흔들었다. 그는 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넘어지면서 쓸린 듯 손바닥에는 피가 나고 있었다. 머리가 따끔하게 아프다. 멍멍한 귓가로 쏴아아아- 거센 빗소리가 파고든다. 그는 온통 젖어있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비가 다시 쏟아지고 있다. 머리칼을 쓸어 올린 시오한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도하!]
그와 같이 가판에서 떨어진 도하가 발치에 엎드려 있었다. 머리를 감싸고 잔뜩 웅크린 채였다. 시오한이 얼른 그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푹 젖어 잔뜩 헝클어진 검은 머리칼 사이로 놀란 눈동자가 황망하게 시오한을 보았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시오한이 얼른 도하를 확인했다. 많이 놀란 듯하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시, 시오한-]
[이리 와.]
[너 피나!]
도하가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도하에게 잡힌 시오한의 손에서 핏물이 씻겨나가고 있었다. 시오한은 조금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그 피를 보다, 대수롭잖게 대답했다.
[그냥 쓸린 거야.]
[머리에서 피 난다고!]
그러나 도하는 그렇지 않았다. 울 것 같은 얼굴로 도하가 얼른 시오한의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제가 다 아픈 표정이다. 차마 갖다 대지는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르다, 입술을 깨문다. 순간 모든 걸 잊고, 시오한은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새까만 눈동자에 파도가 치듯 푸른빛이 들이치는 순간, 이마가 서늘해지며 통증은 사라졌다. 이어 손까지 스치고 지나가자, 남은 상처는 없었다. 서서히 다시 까만색으로 가라앉은 눈동자에 안도가 드는 순간이었다.
사방에서 울음소리, 비명 소리, 고함 소리 등이 둑이 무너진 듯 터져 나왔다. 잠깐 유리되었던 현실이 그들의 뒷목을 잡아채듯이. 시오한과 도하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도하가 망연히 입을 벌렸다. 겁에 질린 어깨가 들썩거린다. 숨이 가빠졌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앉아 있던 버려진 가판 뒤의 문 닫힌 가게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무언가에 후드려 맞은 듯 산산조각 난 건물의 파편이 사방으로 시체처럼 나뒹굴고 있었으며, 그 파편에 휩쓸린 사람들이 깔리고 맞아 신음한다. 검게 그을린 앙상한 뼈대를 불길이 집어삼키고 있다.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쓰러져 있었으며, 달리던 마차가 건물을 향해 돌진한 듯 난장판으로 밟힌 가판 위에 뒤집혀 있다. 외벽 유리가 송두리째 부서진 건물 안에서 말이 달려 나오다 엎드린 사람들을 밟고 넘어졌다. 깔리고 밟힌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고, 울음소리가 빗소리 사이사이를 가득 채운다.
손을 꽉- 쥐어오는 힘에 시오한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가쁜 숨을 들썩이며 얼어붙은 것 같았던 도하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홉뜬 눈동자가 다시 새파랗게 물든다. 우우웅- 이명이 울렸다. 도하가 팔을 휘둘렀다. 퍼붓는 비에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던 불길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불살라지던 건물이 까맣게 탄 채 앙상한 모습을 드러냈다.
버둥거리던 말이 둥실 떠올랐다. 헛바퀴만 돌던 마차도 떠올랐다. 널브러진 파편들도, 유리 조각들도 떠오른다. 빗방울도, 멈추었다. 주변을 꽉 채웠던 빗소리가 사라지자, 그 아래 묻혀가던 흐느낌과 비명 소리가 선명해졌다. 시오한이 고개를 내렸다. 그의 손을 꼭 잡은 도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더 꽉- 힘이 들어간다. 도하가 허공을 노려보았다. 새파랗게 물든 눈동자에 기이한 광채가 돌았다.
허공에 정지한 물방울들이 하나씩 푸르게 물들었다.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위로 보이지 않는 파동이 퍼지듯 하나둘씩 물들다가 한순간에 정지한 모든 빗방울이 푸른빛을 머금는다. 그리고 후두두둑, 그것들이 떨어졌다. 쏴아아아- 다시 비가 쏟아지는 듯하다. 그때 시오한은, 말에 밟혀 팔꿈치가 으스러진 것 같았던 남자가 벌벌 떨면서도, 그 팔로 몸을 받치고 일어서는 것을 보았다. 무너진 파편에 휩쓸려 피범벅이 되었던 여인이 고개를 든다. 바닥으로 번지던 핏물이 흐릿하게 쓸려나간다.
콰아아아- 다시 쏟아지는 빗속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몸을 일으킨다. 울고, 소리치고, 욕하고, 당황하면서도 서로를 살피기도, 어딘가로 달리기도 한다. 여전히 허공에 뜬 채인 말과 마차, 파편들을 가리키며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계약자야- 누군가 희망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헉- 도하가 숨을 토해냈다. 깜빡이는 눈꺼풀 속의 눈동자는 여전히 푸른빛이다. 그가 시오한을 돌아보았다. 당황하고 겁먹은 것 같았던 아이의 눈에 자신감과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시오한은 보았다. 푸하-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비에 얼굴을 한 번 쓸어낸 도하가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두근- 또 심장이 뛴다. 꽉 조인 듯 불안하게. 잡은 손을 당기며, 시오한이 입을 벌렸다. 도하야- 아마 그 소리는 빗소리에 묻힌 것 같다.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사위가 번뜩였다. 도하를 잡으려던 시오한이 휘청거리다 균형을 잃었다. 놀란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그들은 이미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쾅!! 굉음이 허공을 후려쳤다. 대기가 흔들렸고, 진동이 고막을 타고 뇌를 흔든다. 머리끝이 주뼛- 선다. 세상이 흔들린다. 우르릉- 하늘이 울부짖는 것 같은 울림이 빗소리를 타고 연이어 울린다.
시오한은 도하의 머리를 감싸고 그를 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도하가 뭔가 소리친 것 같았으나, 그들 위로 무언가 쏟아지는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콰아아아-! 시오한은 그것이 빗소린지, 비명 소리인지, 무언지도, 아니면 사실 아무것도 들리고 있지 않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폭포 속에 떨어진 한낱 돌멩이처럼 그들은 쓸려가고 있었다. 몸이 쉴 새 없이 부딪치고 떠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이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