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134화 (134/250)

134화

시오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는 검을 갈무리하고, 그 길이 원래 그가 가야 할 길인 양 단정하게 걸어 공터를 벗어나 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우뚝, 그가 어느 나무 옆에서 멈추었다.

나무에 기대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아이의 까만 머리통이 보였다. 또 무슨 장난을 하려는 것인지 막 손바닥에 올려놓은 제 머리카락에 바람을 불려는 듯 입을 쭉 내민 채였다. 시오한은 심장에 햇볕이 닿은 것 같았다. 그가 미소 지었다. 아이가 훅- 바람을 불었다. 그의 손끝에서 떠오른 머리칼이 순간 나비가 되어 팔랑- 날갯짓했다. 검은 나비는 나풀거리며 시오한이 내민 손가락 위에 앉았다. 제 손가락 위에 앉은 나비가 천천히 날갯짓하는 것을 본 시오한의 미소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

그의 기척을 분명히 느꼈을 텐데, 도하는 탁탁 손만 털고는 돌아볼 생각을 안 한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시오한이 조심스레 그의 옆에 앉았다. 나뭇잎이 쌓인 바닥은 어제저녁 내리 내렸던 비로 축축했으나, 별로 개의치 않는다. 시오한의 손가락에 앉아 있던 나비가 팔랑- 날아올랐다. 시오한의 시선이 잠시 나비를 따라갔다. 붉게 물든 나뭇잎 사이로 떠올라, 먹구름이 찬 하늘 위로 날아간다.

[…나보고 사기꾼이래.]

도하가 말했다. 부루퉁한 얼굴에 미간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눈이 애꿎은 제 발치의 흙만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뭐?]

[만날 특기만 쓴다고, 반칙만 한다고, 치사하대.]

[…누가?]

[반 애들이. 나 시험 칠 때는 진짜 한 번도 특기 쓴 적 없어. 공부한 거란 말이야. 근데 아무도 내 말은 안 믿어. 뭘 보여줘도 다 거짓말한대. 특기 쓰지 말라고.]

[……]

[내 말은 듣지도 않아.]

도하는 고집스럽게 땅만 노려보고 있었다. 목소리에 울분이 실려 있었으나, 울고 있지는 않았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나뭇잎이 잔뜩 떨어졌고, 하늘은 어둑하다. 시오한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 나비는 팔랑거리며 점점 더 떠오르고 있었다. 그가 다시 도하를 바라보았다.

[…내게 말해.]

[……]

[내가 다 들어줄게.]

[……]

[난 그대가 하는 말은 다 믿어.]

[…개가 풀 뜯어 먹는다고 해도?]

[응.]

[바보야, 개가 어떻게 풀을 뜯어?]

[그대가 보았다면 그런 거지.]

푸핫- 도하가 순간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놓고 혼자 얼른 다시 인상을 쓴다. 시오한의 입가에 언뜻 미소가 어렸다. 다시 한껏 분위기를 잡은 도하는 그제야 시오한을 돌아보았다. 눈가가 발갛긴 하지만, 운 것 같지는 않았다. 도하는 그러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시오한은 이제 도하가 돌아가 그를 사기꾼이라고 불렀다는 소위 ‘반 애들’의 눈물을 쏙 빼 놓는다에 이 나라도 걸 수 있었다.

[근데 진짜야, 나 옆집 개가 풀 뜯어 먹는 거 봤어.]

[응.]

[그 집 할머니는 만날 나보고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좀 하지 말라고 막 뭐라 그러는데, 자기 집 개가 진짜 풀 뜯어 먹는 건 아나 몰라.]

[왜 그대더러?]

도하가 늘 일반적으로는 상상도 못할 기행을 일삼기는 하지만 말까지 그렇지는 않았다. 게다가 도하는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면 그걸 말이 되는 소리로 만들어버리는 편이다.

[그 할머니 원래 욕쟁이야.]

도하가 대수롭잖게 말하며 제 발치에서 나무 막대기 하나를 찾아 쥐었다. 바닥에 깨작깨작 그림을 그리는데, 시오한은 이제 그게 저쪽 세상의 글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도 보다 보니 규칙을 조금 알 것 같았고, 조금 더 보면 읽을 수 있게도 될 것 같다.

[하여튼 진짜 웃기는 놈들이야. 지들이 달리기 못 해놓고 나보고 특기 써서 이긴 거라고 막 우기고. 아니, 지들 다리가 짧은 걸 어쩌라고?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치사하고 뭘 해도 다 반칙이래. 그냥 내가 특기자라는 것부터가 치사하대!]

[그들이 멍청이 말미잘이라서 그래.]

푸하하- 도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도하가 바닥에 꿈질꿈질 낙서를 했던 반듯하고 동글동글한 획들이 갑자기 퐁퐁, 솟아 일어났다. 시오한은 내색 없이 놀라 눈을 깜빡였다. 일어난 획들이 춤을 추듯 꿈틀거리며 통통 그들 주위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억, 이게 뭐야- 웃다가 그것들을 보고 놀란 아이가 홱 손을 휘저었다. 흥겹게 춤을 추던 것들이 다시 풀썩, 흙으로 돌아갔다.

[맞아, 다 멍청이 말미잘이야. 할 줄 아는 것도 없으면서 나한테만 뭐라고 하고. 아, 학교 가기 싫다. 걔네 다 싫어. 쥐똥만 한 것들이. 엄마도, 아빠도 만날 나보고만 참으라고 해.]

도하가 풀썩 흙바닥에 드러누우며 시오한의 다리를 벴다.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 투덜거린 도하가 시오한의 옷자락에서 그의 머리카락을 하나 찾아냈다. 손에 쥐고 훅- 불자 떠오른 머리칼이 어김없이 팔랑- 날갯짓을 한다. 별가루를 뿌린 것처럼, 금을 엮어낸 것처럼 반짝거리는 날개를 가진 나비가 되어 그의 손가락 위로 사뿐, 내려앉는다. 두근- 시오한의 저도 모르게 가슴을 눌렀다. 갑자기 도하가 벌떡 일어났다. 나비가 휘청거리듯 팔락, 날아올랐다.

[우리 놀러 가자! 기분이 꿀꿀하니 쇼핑을 해야겠어.]

[…응.]

[돈 있지?]

[그대가 저번처럼 옷을 바꿔버리지 않는다면.]

제 단추를 가리키며, 시오한이 말했다. 평소 입고 다니던 옷과는 달리 훈련을 하기에 맞춰진 간편한 옷이었지만 그래도 여밈마다 붙은 단추 하나도 범상치 않은 금붙이였다. 도하가 원하는 것쯤은 그게 부동산만 아니라면 궤짝으로 사줄 수 있을 터였다.

[드라마에서 보면 원래 그렇게 한다니까? 아무튼 알겠어. 접수.]

도하가 손을 내밀었다. 비가 아주 많이 왔던 그 날 이후로 아이는 단 한 번도 성 밖으로 놀러 가자는 말은 한 적이 없던 터였다. 빙그레 웃으며, 시오한이 그 손을 잡았다.

그래도 원래 위장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하며 도하는 드라마에서 본 왕족들의 나들이 법칙에 대한 고집을 버리지 못했고, 해서 이번에는 시오한의 눈과 머리칼을 저와 똑같은 검은색으로 바꾸었다. 옷을 넝마로 바꾸는 것보다는 훨씬 합리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시오한은 생각했고, 검은색이 된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려보며 퍽 만족스러워했다. 도하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하니까 꼭 우리나라 사람 같네! 네가 나랑 같은 반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진짜 매일매일 같이 놀 수 있을 텐데. 우리 집에도 놀러 가고, 숙제도 같이 하고.]

야심차게 엄포를 놓아놓고는 고작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산 도하가 시오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며 말했다. 주인은 아이스크림 두 개가 아니라 그의 집을 사고도 남을 단추 하나를 받으며 아주 태연한 얼굴로 원래 돈이 아닌 것은 받지 않으나, 제가 그들만 한 아들이 있어 봐준다며 앞으로 언제든 아이스크림을 그냥 주겠노라 선언했다.

행색이 절대 이곳과 같지 않은 도하나 어딜 봐도 귀한 집의 자제라는 게 티가 나는 시오한을 보고 돈 많고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들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시오한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저 성도의 길거리 상인들을 한 번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길가의 버려진 가판에 조심스레 앉은 시오한은 도하를 따라 다리를 흔들어 보았다.

[나도.]

[있잖아- 아, 안 되겠지. 넌 왕자니까.]

뭔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눈을 반짝였던 도하는 금세 시무룩해졌다. 시오한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쪽에 같이 갈래?

시오한은 늘 기다렸고, 그에게로 찾아오는 건 늘 도하였다. 도하는 종종 그런 아쉬움을 내비추고는 했다. 그는 제가 사는 곳, 제가 노는 곳, 제가 걷는 길을 시오한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했으니. 일반적이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코웃음조차도 치지 않았겠으나, 도하라면….

툭- 그들의 발치에 빗방울이 떨어졌다. 바닥에 동그란 자국이 생겼다. 그 한 방울을 시작으로, 비가 무섭게 내리기 시작한다. 아이고 또 비야?! 상인들이 험악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천막을 펼친다. 거대한 말 두 마리가 이끄는 마차가 비를 뚫고 지나간다. 몇몇은 익숙하게 우산을 펴고, 몇몇은 머리 위로 손만 드리운 채 분분히 가게의 비를 피해 여기저기로 들어간다.

여긴 비 진짜 자주 온다. 도하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들에게는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아무것도 없던 그들의 머리 위로 옆 가게와 똑같은 천막이 펼쳐져 있었다.

시오한이 다시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이상하게, 심장이 뛴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은 아니었다. 그것을 꾹 삼켜낸 시오한이 조금 망설이다 말했다.

[…도하야.]

[응.]

[계약자가 되는 건 싫은가?]

[계약자?]

[응.]

[뭐 하러? 난 너만 보러 오면 되는데, 그냥 계속 이렇게 보면 되잖아? 그리고 난 사람 죽이기 싫어.]

합- 합- 아이스크림을 한껏 입에 문 도하가 우물거리며, 제 손에 동그랗게 묻은 빗방울을 퉁겼다. 허공을 튀어 오른 투명한 물방울이 조그만 물고기의 형상을 이루었다. 물고기를 만들어놓고도 관심은 주지 않은 도하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빗속으로 발을 흔들며 발장난을 친다.

[나는… 나는 사람한테는 못 써. 쓰기 싫어… 계약자가 되면 시키는 거 해야 하잖아. 그리고 계약주가 누구일지도 모른다는데, 그것도 싫단 말이야. 나쁜 사람이면 어떡해?]

빗방울로 이루어진 물고기가 빗속을 헤치고, 헤엄치듯 그들 주변을 유영한다. 두근두근- 시오한은 이 기이한 감각을 애써 내리눌렀다. 조금 시무룩해진 도하가 무엇을 떠올렸을지는 빤하다. 시오한이 그의 손을 잡았다.

[…내가… 그대의 계약주가 되면?]

[뭐? 야, 싫지 당연히!]

두근두근, 불길하게 뛰던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는데, 도하는 즐겁게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시오한이 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잡아 온 손을 더 세게 마주 잡은 도하가 즐겁게 그 손을 흔든다.

[우린 친구잖아! 무슨 계약주야?]

[다른 사람이… 그대를 소환하게 될 수도 있잖아.]

[으, 그건 더 싫어, 웩, 완전 싫어.]

도하가 진절머리를 하며 부르르 떨었다.

[시오한. 절대 그럴 리 없어. 원래 계약자들은 셀수록 소환하기 힘들다 그러잖아. 그럼 난 아무도 소환 못 할걸? 엄청 세니까. 내가 제일 세잖아, 그치?]

[…응.]

[바보야, 너 내가 다른 사람한테 소환될까 봐 나 찜할라 그랬구나!]

도하가 푸하하 웃는다. 쏴아아아- 점점 더 거세지는 빗소리에 그 소리가 묻힐 것 같다. 시오한이 조금 더 고개를 숙였다. 지금쯤 제 궁의 궁인들이며 시종들이 절 찾고 있을 걸 알지만, 조금도 움직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가 조용히 웃었다.

[맞아.]

도하가 홱 고개를 돌렸다. 벌써 이러다 몇 번이나 그와 머리를 박은 적이 있는 시오한이 익숙하게 고개를 뺐다. 발장난이며 손장난을 치느라고 조금 젖은 머리칼이 죄다 흐트러져 얼굴에 달라붙어 있다. 간지러운 듯 도하가 마구 얼굴을 문질렀으나 더 엉망이 될 뿐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 시오한이 찬찬히 그것들을 떼 주었다.

[그럴 일 없어, 절대 안 그래. 우린 계속 이렇게 보면 된다고!]

[…정말?]

[당연하지!]

힘 있게 대답한 도하가 이어 말했다. 아주 큰 비밀인데, 큰맘 먹고 가르쳐 준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난 엄마아빠 다음으로 시오한 네가 최고 좋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