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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33화 (133/250)

133화

하여 불쑥불쑥 나타나는 이 아이의 존재는 차츰 시오한에게 당연한 일상이 되어갔다. 이 일상은 그가 지금까지 알던 일상과는 전혀 달랐다. 매번 같았던 햇볕도, 쨍하게 초록빛으로 빛나는 풀도, 창틀을 내려앉은 나비 한 마리의 날개가 예쁜 푸른색인 것도, 침실 옆 나무에 둥지를 튼 새도, 궁인 하나가 제 옷자락을 밟고 와당탕 넘어졌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벌떡 일어나 태연하게 살살 무릎을 문질렀던 일도, 오찬 시간에 망부석처럼 서 있던 어느 호위기사의 어깨를 애벌레 한 마리가 열심히 횡단하던 것을 목격했던 일도, 모든 게 이전과 같지 않았다. 더 많은 것에 시선이 조금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 그는 그 모든 것들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고 잘 담아 두었다.

[아, 진짜! 너 바보야? 이 멍충이 말미잘아! 어떻게 만날 까먹냐?!]

[……]

마침내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듯 벌떡 일어난 아이가 분개했다. 그리고 시오한은… 시오한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난생처음 바보라는 말을 들은 그는 충격을 받았고, 억울했다. 원래 이름은 물론이고, 계약자들이 남기는 모든 것은 이곳에 머무를 수 없는 건데…! 물론 아이는 계약자가 아니고, 시오한도 반드시 아이의 이름을 외우고야 말겠다고 다짐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타박을 들으니 조금 서럽기는 하다.

궁에서는 천재 취급을 받고 아이 앞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으니 참 중간이 없었다. 시오한은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기분에 머리가 조금 혼미해지는 정도였다. 그래도 어느 게 더 나은가, 하면 바보 취급이 좀 더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이! 도! 하! 이도하라고!]

[…응. 미안.]

[어휴, 어휴 이 바보!]

가슴을 팡팡 친 도하가 손을 뻗었다. 시오한의 책상 위에 있던 펜이 슝 날아와 그 손에 잡혔다. 그러더니 시오한의 손에다가 한 자, 한 자 제 이름을 아주 꾹꾹 눌러쓰기 시작했다.

[자 봐, 이, 도, 하. 도하. 도하도하도하도하도하.]

[…도하.]

[내 이름 뭐라고?]

[이도하.]

[어떻게 부르라고?]

[도하야.]

시오한이 고분고분 대답했다.

[좋았어, 또 까먹으면 목숨은 없다.]

도하가 시오한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었다. 시오한은 거기다 대고 나는 네가 쓰는 문자는 전혀 모르겠다, 하는 눈치 없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야, 됐어. 자꾸 까먹으면 그냥 만날 부르듯이 불러라.]

시오한을 돌려 앉히며 도하가 체념하듯 말했다. 시오한은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도하는 그의 머리를 하나하나 아주 공을 들여 그러모아 묶기 시작했다.

[만날 부르듯?]

[그거 있잖아. 그대, 하는 거.]

[내 말투가 할아버지 같다고 했잖아.]

[아냐, 그건 안 그래. 되게… 되게….]

단어를 고르듯 아이가 말을 골랐다. 시오한은 도하가 제 손바닥에 적은 이름을 아주 유심히 살펴보다가 조심스레 주먹을 쥐었다. 그 안에 무언가를 쥔 것처럼, 동그랗게 공간을 만들어 꼭 쥐었다.

[되게?]

[되게… 좀 멋있어.]

[그래?]

[응.]

도하가 시오한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시오한은 머리를 조금 흔들어보려다 말았다. 도하가 머리를 묶는 솜씨는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손재주는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대도 멋있어.]

[알아. 내가 최고 멋있지.]

도하가 부끄러움이라고는 없이 말했다.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릇푸릇하던 나무들이 어느새 싱그러운 빛을 잃고 조금씩 시들어갈 때까지, 아주 뜨거웠던 햇볕이 한숨을 돌릴 때까지, 그는 내내 그렇게 도하와 함께 했다.

[음, 나는 어른 되면 제일 먼저 술 마셔볼래.]

[술?]

[사실 추석 때 고기 먹다가 실수로 삼촌 거 한 번 마셔본 적 있거든. 으웩! 완전 이상한 맛 나. 근데 아빠가 어른 돼서 마시면 그게 또 맛있대! 말도 안 되지 않냐? 완전 쓰레기 맛 나는데 그게 어떻게 맛있어져? 어른 되면 혀가 달라지나?]

[…그러지는 않을 텐데.]

[그럼 도대체 어떻게 그게 맛있어져? 알 수가 없네. 넌 마셔봤어?]

[마셔보지 않았어.]

[야, 우리 지금 마셔볼까?]

[…이거, 술이야?]

[쏘오주!]

[그대 지금… 내 물을 술로 만든 거야?]

[그렇다니까. 마셔볼-웩! 우와, 냄새구려! 악, 왜 버려!]

[이렇게 해. 어른이 되면, 그때 함께 마셔보자.]

[어른 돼서? 아, 어느 세월에?]

[금방일 거야.]

[그럼 그 전에 먼저 마셔보기 없기.]

[응.]

[이거 해야 돼. 쨘, 건배- 크으아!]

[…그걸?]

[아 당연하지! 그게 술맛이라고 했다니까?]

늦은 밤을 별이 뜬 하늘과 선선한 바람, 푸릇푸릇한 꽃과 풀 냄새로, 수다로 보냈으며,

[와, 시오한. 너 진짜 천재였구나! 살았다!]

[…한데 이러면 들킬 텐데.]

[안 들켜, 안 들켜. 까먹었다고 하면 돼.]

[그대가 푼 수학 문제를?]

[그럴 수도 있지!]

[……]

[아무튼 이건 특기 쓴 거 아니니까 난 거짓말 안 했어.]

[들킬 텐데….]

[거참 안 들켜! 들키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

[그러지 마.]

[근데 시오한, 나 이거 한 권 더 있어.]

[……]

햇볕이 쨍하게 내리쬐는 더운 날을 바스락거리는 침대 시트 위에 엎드려 보냈고,

[지는 사람이 엉덩이로 이름 쓰기다.]

[좋아.]

[하나, 둘, 세- 프학! 야!]

[…! 능력은 쓰지 않기로 했잖아!]

[반칙에는 반칙이다, 이 짜식아!]

밤도, 낮도, 그 어느 한순간도 의미 없이 흘러가지 않으며,

[완전 다르게 생겼지. 저기 다 사람이 살아.]

[그대의 집은?]

[우리 집? 우리 집은… 이렇게 생겼지. 저기가 마당이고, 강아지 키우자고 했는데 아빠가 안 된대. 여기가 신발장, 저게 티비. 저번에 얘기한 그거 있잖아. 막 드라마하고 영화 나온다고 하는 그거. 이쪽으로 가면 내 방. 진짜 네 침대만 하지.]

[인형이 많네.]

[나 인형 좋아하거든. 너무 많아서 이제 엄마가 안 사줘. 넌 안 좋아해?]

[달리 쓸 용도가 없는 것 같아서.]

[용도가 왜 없어? 귀엽지, 안고 자기 좋지, 기대기 좋지, 귀엽지. 최곤데.]

[귀여워?]

[안 귀여워? 저 고래 봐, 내가 젤 좋아하는 인형이야. 완전 짱 귀엽지 않아?]

[인형을 귀여워하는 그대가 귀여운걸.]

[엥…?]

만개했던 여름 꽃은 하나둘 꽃잎을 떨어트리고, 어느새 이파리가 물들어 갈 때까지.

[--하여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빤한 듯하면서도 답이 없고, 또 비단 군사학을 벗어나 여러 문제에 있어서도 군주가 언제나 풀어야 할 문제라 할 수 있지요. 태자 전하께서는 어찌…?]

근엄하게 말을 이어가던 기사가 삐끗, 말끝을 올렸다. 망부석인가 싶을 정도로 움직임이 없던 시오한도 눈을 깜빡였다. 그의 검 끝에, 날개가 검은 나비 한 마리가 올라앉은 것이다. 시오한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색의 나비였고, 기사 역시 그러했는지 이 독특한 생김새의 나비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곧 다시 정신을 차린 그가 아무 일도 없는 척 말했다.

[…태자 전하께서는 어찌 하시겠…?]

그러나 그는 그 말도 다 끝맺지 못했다. 한 마리, 두 마리, 검은색 나비가 연약하게 팔랑거리며 연이어 날아들었다. 시오한의 검에 까맣게 일렬종대로 내려앉더니 그의 어깨에도, 기사의 머리에도 내려앉는다. 시오한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기사는 조금 당황한 듯 그의 눈치를 보며 팔을 휘둘렀으나, 이 오묘한 검은 나비들은 여유롭게 날개만 팔랑일 뿐 한 마리도 날아가지 않았다.

[경은 어찌 내게 답이 정해진 질문을 하지?]

대답하며, 시오한이 허리를 폈다. 그가 검 끝을 살짝 흔들었다. 기사가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꿈쩍도 않던 나비들이 나폴, 떠오르더니 그의 주위로 꽃잎처럼 팔랑팔랑 날아다녔다. 신이 난 아이의 발걸음 같은 날갯짓이었다. 시오한이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부황과 모후는 이 제국을 위해 나를 낳았고, 내 존재는 오직 이 나라를 위함이니 내게 있어서 경중을 두고 무엇이 더 중한가를 고민할 일이 있겠소? 경, 움직이지 않는 게 좋겠는걸.]

시오한의 주위로 팔랑팔랑 돌던 나비들이 전부 기사에게로 몰려갔다. 황제가 손수 태자의 검술 스승으로 임명할 만큼 유능하며, 젊고, 또 아주 강직한 이 기사는 제 머리로 까맣게 몰려드는 나비들을 차마 베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제자이자 어린 태자 앞에서 나비를 죄다 베어버리는 것도 정서상 안 좋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또 그런 태자 앞에서 허둥대는 모습을 보일 수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나비를 아예 모르는 척하기로 한 것 같았다.

그러자 이 나비들은 점점 기사의 짧은 까까머리를 뒤덮기 시작했다. 강직한 기사는 다급함으로 머리를 짧게 흔들었다. 그러나 나비들은 더 오밀조밀하게 붙어 날개를 팔랑거렸다. 머리에 괴상한 보자기를 뒤집어씌운 것 같다. 시오한의 웃음이 짙어졌다.

[하여 나는 완벽하게 그리 자라고 있지 않은가. 사사로이 고민할 필요도 없도록.]

건국 이후로 가장 번영한 시대에, 가장 완벽한 정통성을 타고난 태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찬란한 명목들에 목을 매는지 아는데. 마침내, 시오한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나비들이 아예 기사의 얼굴로 우르르 몰려들어 그의 머리통을 완전히 덮어버린 것이다. 결국 기사는 견디지 못하고 손을 휘저었으나, 나비들은 이파리가 바람에 날리듯 팔랑거리며 죄다 그 손을 피해갔다. 머리에다가 꼭 흐물거리는 보자기를 뒤집어씌워 놓은 것 같은 우스꽝스러운 몰골이었다.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아스터 경.]

[예- 예, 전하.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게, 읍-습니다. 물러가겠습니다.]

푸르르 얼굴을 털며 기사가 황급히 물러났다. 검은 나비들은 끝까지 그를 따라갔고, 달려가는 뒷모습조차 머리통만 검은색으로 우글우글하니 시오한의 웃음소리가 더 커졌다. 깔끔하게 잘 정리된 넓은 공터에 그의 웃음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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