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태자가 몰래 궁 밖을 나가 밤거리를 돌아다녔다는 사실은 당연히 황제와 황후의 귀에 들어갔다. 암군은 어린 태자를 따르고 존중했지만, 그들은 이래나저래나 황제 직속의 군단이었다. 그러나 일리온 시타를 위시해 태자를 호위하던 암군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태자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그리 멀리까지 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고, 그로 인한 문책을 피할 수 없었다. 다행히 황제는 태자가 반성하며 죄를 청한 것을 받아들여 그것을 암군의 충성심으로 보아 넘어가 주기로 하였다. 물론, 두 번은 없을 자비였다.
[전하.]
황제의 집무실에서 옮겨져 온 보고서와 결재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시오한이 고개를 들었다. 일리온 시타가 고개를 숙였다.
[명하신 대로 알아본 바, 살해된 자는 무라마트 그레이의 아들입니다. 범인은 어젯밤 자택에 침입하여 그의 아내까지 모두 죽인 후 불을 지르고 도주하여 현재 추적 중이라고 합니다.]
무라마트 그레이는 그레이 가의 가주로, 시오한도 익히 아는 이름이었다. 그레이 가문이 이리스티리움에서도 손에 꼽히는 부자 가문이기 때문이었다. 평민이면서도 오랜 옛날 황제로부터 성을 부여받아 준귀족의 대우를 받는데… 이들은 돈이 되는 것이라면 손을 뻗치지 않는 것이 없기로 유명하기도 하다. 무역, 건설, 귀족이고 평민이고 가릴 것 없는 대부업까지. 그러니 어디선가 그들을 향해 지독한 원한을 쌓았든 이상할 게 없기는 했다. 막을 자신이 있었겠지. 다만 설마하니 그중에 누군가 계약자를 소환하는 데 성공해, 계약주가 되어 나타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 아이는 죽은 것으로 하고 시설에 보내라.]
아버지도 죽고, 어머니도 죽었다면 아이가 이미 그 비정한 집안에 발붙일 곳은 없을 것이다. 무라마트 그레이는 이번에 죽은 아들 말고도 아들 셋에 딸이 둘 더 있다.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는 호랑이굴이나 다름없다.
[예, 전하.]
일리온 시타는 바로 물러나지 않고 조금 머뭇거리다가, 한숨을 삼키는 듯 고개를 숙인 후 사라졌다. 방 안에 다시 적막이 흘렀다. 사실 시오한은 어쩌다가 남자가 살해되었는지, 범인이 누구인지는 관심 없었다. 권력 싸움, 정쟁, 알력 다툼, 청부 살인, 길드 간의 세력 싸움- 보이건 보이지 않건 이리스티리움을 비롯해 이 땅에는 어차피 수많은 다툼이 있고 수많은 살인이 비일비재하다.
태자로서 그는 마땅히 법이 무시되고 무차별적인 살인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사건 하나하나까지 관여하지는 않았다. 그게 그가 직접 목격한 일이라고 해도. 무라마트 그레이의 아들이 아니라 무라마트 그레이 본인이 죽었다고 해도, 본래라면 그의 책상까지 올라오지도 않고 아래에서 해결될 일이었다.
이건 그냥… 그냥, 혹여 그 애가 물어볼지도 몰라서였다. 그렇게 되어 일어난 일이다. 무라마트 그레이의 아들, 그가 누군가에게 원한을 사 일어난 일일 뿐, 네 탓이 아니다. 네가 구해준 아이도 무사하다. 그렇게 말해주고 싶어서.
그러나 꼬박 무라마트 그레이의 아들과 손자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으로 귀족들이 한참을 수군대고,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라날리 꽃의 꽃봉오리마저 모두 떨어질 때까지도, 기후가 이상해진 게 아무래도 좋지 않은 징조 같다며 떠들어 대던 학자들이 시들해질 때까지도 아이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뭐가 나타나지 않지?
시오한은 하늘이 깨끗하게 비치는 연못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시중인들과 호위 기사, 그리고 보이지 않게 그를 호위하는 암군까지, 저를 둘러싼 기척들이 공기처럼 익숙했던 그는 언제부턴가 그들 모두를 물리는 버릇이 생겼다. 왜 그랬더라, 투레질을 하는 말의 고삐를 고쳐 잡으며 그는 무심히 생각했다. 막연히 뭔가 떠올리려고 했으나,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뭔가 기다렸던 것 같은데.
일상은 늘 그렇듯 흘러가고 있었다. 시오한은 제왕학을 배우며, 때때로 조금 쉬었고, 틈틈이 황제의 정무를 지켜보며 태자로서의 하루를 원만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자꾸만 이유 모를 무언가에 실망하는 저를 발견했다. 시선은 종종 엉뚱한 곳을 향했다.
[야.]
시오한이 눈을 깜빡였다. 초점 없이 무심히 연못을 보던 눈에 반짝 빛이 들었다.
[시오한.]
마치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반짝, 머리에 불이 들어오는 것 같았고, 갑작스레 시원한 찬물이 확 끼얹어지는 느낌 같았다. 시오한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의 발치, 아담하게 핀 꽃 사이에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까마귀처럼 반질거리는 검은색 머리칼, 그를 보는 검은색 눈동자.
[어… 안녕.]
아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시오한이 멍하니 입을 벌리다, 다물었다. 아주 부지불식간에, 정말 별안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안도감이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어떻게 할 틈도 없이 눈물이 똑, 떨어졌다. 아이의 눈이 황망함으로 커다래졌다.
[야..야, 시오한, 너 울어? 왜, 왜 그래, 울지 마.]
아이가 정말 안절부절을 못했다. 눈물은 딱 한 방울 떨어지고 그게 끝이었는데도 그랬다. 흘긋, 제 뒤를 한 번 본 시오한이 잡고 있던 말의 고삐를 놓고 천천히 무릎을 굽혀 앉았다. 약간 경사가 진 연못가에 그렇게 쪼그리고 앉자, 그제야 눈높이가 맞다. 슬쩍 눈치를 본 아이가 조심스레 시오한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저기, 있잖아. 많이 화났어?]
[…내가?]
시오한이 되물었다. 화가 났냐고? 그는 이 질문에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그런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이제야 깨닫건데, 그는 아주 많이 기다렸을 뿐이다. 아이가 한껏 시오한의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미안해.]
[……]
[그… 내가 막 화내고, 소리 지르고, 너만 놔두고 홀랑 가버리고, 그래서… 진짜 미안.]
시오한은 제 무릎 위에서 꼼질거리는 아이의 손을 바라보다, 제 손으로 덮어 보았다. 아이의 손이 완전히 감싸졌다. 석 달, 그 새에 그는 또 자랐다.
[이제 안 그럴게, 응? 미안해.]
이제. 시오한은 그 말을 곱씹어보았다.
[그대는….]
[응?]
[그대는 괜찮은가?]
시오한이 물었다. 아이는 금세 시든 꽃처럼 조금 풀이 죽었지만, 그 말대로 괜찮아 보였다.
[…응. 사실 나도 그러면 안 되는 거 알거든. 근데 그때는 너무 놀래가지고… 그 애, 불쌍하잖아. 아직 애기였는데.]
[그대도 아이야.]
그대의 탓이 아니다. 무서웠어도, 괜찮다. 그런 의미였는데 아이는 그 말을 또 어떻게 받아들였는데 입을 쭉 내밀었다.
[쳇, 너도 나랑 동갑이거든? 너도 애야.]
[…그렇네.]
시오한이 스르륵 웃었다. 눈꼬리가 휘고,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또 처음이다. 그에게 애라고 말한 사람은 이 아이가 처음이었다. 아이는 그에게 뭐든 처음이었다.
[약속, 다시는 안 그럴게.]
[…그래. 약속해.]
시오한이 먼저 손가락을 내밀었다. 언젠가 아이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는 조금 놀란 것처럼 그와 손가락을 바라보더니, 얼른 제 손가락을 엮었다.
[그 아기는 괜찮아.]
[어?]
[그대가 구했던 아기.]
[아.]
슬쩍, 뒤를 한 번 바라보고 오리걸음으로 시오한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던 아이가 멈추었다. 잠시 눈물이 핑 돌았는지 얼른 눈을 비비고는 씩씩하게 웃는다.
[진짜 다행이다.]
그래, 다행이다. 그렇게 말해줄 수 있어서. 시오한은 아이의 손을 좀 더 꼭 쥐었다. 무언가 옳은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기 근데 있잖아, 시오한. 나 여기서는 못 살 것 같아.]
[…어째서?]
[음, 엄마 아빠한테도 다시는 집 안 나겠다고 약속했고… 난 애잖아. 어떻게 혼자 살아.]
쑥스럽게 웃으며 아이가 헤헤- 괜스레 시오한을 툭 쳤다.
[집에 돌아갔구나.]
[응, 뭐. 그렇지. 이제 방학숙제도 해야 하고….]
[걱정했다.]
[아휴, 참 나. 괜찮다니까.]
아이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몸을 꼬았다. 엄마아빠가 보고 싶어 집에 돌아갔다는 말은 부끄러워서 하지 못하겠는 모양이었다. 시오한도 모르는 척 해주었다. 그래, 일반적인 아이라면 제 부모가 무척이나 필요했을 것이다. 제 아버지가, 어머니가 어느 때보다도 보고 싶었을 것이다.
[대신 자주 놀러올게.]
아이가 다시 시오한의 손을 꼭 잡았다.
[정말이야. 엄청 자주 놀러올게. 나 너 엄청 좋아.]
[……]
이 직접적인 말에, 시오한은 잠시 말문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햇볕이 따뜻하게 그들을 비추고 있었고, 맑은 연못에 하늘이 쨍하게 비추는 날이었다. 나뭇잎이 팔랑거리며 날아다니고, 아이의 주변으로는 소박한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새삼스러웠다.
[…나도. 나도 그대가 좋아.]
따뜻한 아이의 손을 감싸 쥐며, 조금 웃으며, 시오한이 마침내 말했다.
그 후로 아이는 정말 시시때때로, 시오한을 찾아왔다. 시오한은 불쑥불쑥 예고도 없이 나타나는 아이의 등장에 조금도 놀라지 않게 되어, 언제부턴가는 왔어? 하고 태연하게 웃으며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슨 요령인지, 아이는 대체로 시오한이 혼자 있을 때에 나타났으나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때론 이제 간덩이가 붓게 된 시오한도 간담이 서늘해질 때가 있었는데, 그건 황제나 황후와 함께 있을 때였다. 시오한은 황제의 집무실에서 정무를 배우는 동안 황제의 의자 밑에서 불쑥 나타났던 아이를 생각하면 등골이 주뼛 솟아 한동안 잠을 설치기도 했다.
당연히, 아이가 시오한 외의 사람에게도 눈에 띈 경우는 꽤, 아주 꽤 많았다. 궁은 어디든 사람이 많은 곳이었고, 아무리 주위를 물린다 해도 시오한은 늘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편이었다. 귀신도 사람 입은 못 막는다고, 시오한은 입을 조심하라 명을 내려 놓고도 어느 순간부터 언젠가 황제에게 불려갈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의 말대로라면 ‘발 없이도 천리를 간다’는 소문은 의외로 조금도 퍼지지 않아 그런 일은 없었다. 아이를 목격한 누구도 시오한의 앞에서 아이를 거론하는 일은 없었다. 마치 그런 일 같은 건 기억나지도 않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