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믐밤에 달이 뜬다-131화 (131/250)

131화

푸르스름한 빛을 머금은 작은 물방울들로 이루어진 발자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기의 아빠가 정말 그 자리에 있었던 과거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망설이듯 몇 번이고 초조하게 맴돌던 발자국은 이윽고 골목을 벗어났다. 빠르게 움직이는 발자국을 따라가느라 그들은 뛰어야 했다. 다 왔어, 다 왔다. 아이가 몇 번이고 아이를 달랬다.

시오한은 헐떡거리는 그를 중간에 붙잡고 아기를 건네받았다. 자세가 영 좋지 못하고 마치 짐을 들고 있는 것 같았으나, 아기가 알아서 시오한에게 엉겨 붙었다. 뜨끈뜨끈하고, 축축해 불쾌하다. 시오한은 표정 없이 생각했다. 사람의 온기는 마냥 기분 좋은 것인 줄 알았는데.

다급하게 뛰기 시작한 발자국은 골목에서 골목으로 굽이굽이 들어갔다. 발자국은 점점 성도의 외곽으로,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도망치고 있었다.

미로처럼 꺾인 골목으로 접어들려는 순간이었다. 시오한이 앞서 뛰는 아이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헉-! 갑작스레 중심을 잃은 아이가 넘어질 것처럼 크게 휘청였다.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발자국이 그대로 빛을 잃고 물방울로 녹아 사라졌다. 재빨리 그를 받친 시오한이 그대로 주저앉으며 몸을 낮췄다.

쏴아아아- 빗소리가 더 거세게 쏟아 붓는다. 목소리는 희미하게 들렸다.

[짜증 나게 진짜, 무슨 바퀴벌레도 아니고 졸라 튀네.]

축축한 흙냄새와 먼지 냄새 사이로, 비릿한 냄새가 끈적끈적하게 섞여든다. 숨을 헐떡이던 아이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시오한이 재빨리 아기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우는 아기가 그런 것으로 울음을 그칠 리 없었다. 아기가 이리저리 몸부림친다. 시오한이 이를 악무는 순간, 아이가 아기를 제 품으로 당겨 안았다. 푸르스름한 빛이 그의 눈에 일렁거렸다. 아기는 여전히 울고 있었으나,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아기를 꼭 안은 그가 몸을 움츠렸다. 아기의 등을 감싼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꼭 죽여 버리겠다고 했지. 반드시 죽일 거라고 했잖아. 기분이 어때?]

[아니 근데 이렇게 대놓고 이래도 되는 거야…? 아무리 오즈라지만… 너 잡힐 것 같은데.]

[상관없어.]

[아이 씨, 내가 상관있지. 무슨 일회용 계약도 아니고.]

[난 더 잃을 것도 없어.]

[아 글쎄, 내가 안 된다니까? 나 포르쉐 질렀어, 절대 안 돼.]

비가 떨어져 쉴 새 없이 요동치며 부서지는 빗물에, 골목 안으로부터 어두운 것이 스멀스멀 퍼져 나온다. 아기를 꼭 끌어안은 아이가 눈을 크게 떴다. 시오한이 그의 눈을 가렸다. 아이가 그 손을 붙잡았다.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떼어놓을 것처럼 쥐었으나, 그러지 못한다. 비가 그들 위로 쏟아졌다. 머리를 적시고, 옷을 흠뻑 적시며 그들을 두드렸다. 여태 몰랐으나, 눈조차 쉽사리 뜨기 힘든 폭우였다.

[--!]

신음소리가 들린다. 미처 터지지 못한 비명소리 같았다. 푹- 푹- 가죽 포대가 찢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빗소리 사이를 희미하게 뚫고 나온다. 빗방울에 눈을 내리깔고 있던 시오한은 고인 빗물을 타고 그들의 발밑까지 그 거뭇거뭇한 것이 스며드는 것을 보았다. 제 손을 꽉 쥐는 힘에 그가 아이를 보았다. 손바닥이 뜨겁고 축축했다. 빗물은 아닌 것 같다.

[가자고!]

[죽여.]

[어, 어. 죽일게. 얼른 가자.]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골목 밖으로 빗물을 타고 그림자처럼 스멀스멀 기어 나오던 것이 완전히 바닥을 검게 덮었다. 그리고 찰팍- 발소리가 났다. 아이가 흠칫! 몸을 떨었다. 시오한이 벽에 등을 대며 품에 손을 넣었다. 발뒤꿈치를 들고, 끝에 힘을 준다. 몸이 긴장으로 수축한다. 어둡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거뭇하게 물든 바닥을 차분히 응시했다. 찰팍- 골목 밖으로 신발 끝이 드러났다.

흠뻑 젖어 달라붙은 짙은 머리칼, 마른 몸, 짙은 어떤 것이 잔뜩 튀고 묻은 낡은 옷, 볼이 움푹 들어간 얼굴, 형형한 눈동자- 사내는 그대로 그들은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무심하게 지나쳤다. 사내의 뒤로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짙은 갈색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잔뜩 검붉게 얼룩진 제 옷을 털어내며 곧장 사내를 뒤따라갔다. 철퍽철퍽- 물기 어린 발소리는 멀어졌고, 금방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

완전히 까맣게 시야가 사라지는 어둠 속을 응시하던 시오한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에 얼굴을 묻다시피 한 아이가 손을 떨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아기는 여전히 울고 있다. 그때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가 시오한에게 아기를 넘기더니 골목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시오한이 얼른 아기를 내려놓고 그를 쫓아 들어갔다.

골목 안에는 남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주위가 온통 검다. 스멀스멀, 물감이 번지듯 주변으로 번지며 그들이 숨어 있던 곳까지 길게 흐른다. 아이가 그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우웅- 이명이 울리며 주위가 진동했다. 아이의 눈이 새파랗게 타올랐다. 퍼져나가던 것이 잠깐 멈추더니, 다시 남자에게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처럼. 마침내 그림자처럼 주변을 덮었던 것이 모두 사라지고 깨끗한 빗물만 남았다. 그러나 남자가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꼭 잠든 것 같았으나, 일어나지는 않는다.

[…아, 안 일어나. 시오한, 상처 다 없어졌는데 안 일어나. 어떡해?]

[……]

쏟아지는 비에 잔뜩 흐트러져 붙은 검은 머리칼 사이로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흔들린다.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굳이 남자를 짚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이미 죽었다.

[……]

시오한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무슨 말인가 해야 하는데, 뭐라고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이가 말했다.

[나 사람한테는 특기 써 본 적 없어. 못 해.]

아이가 말했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게 심상치가 않다.

[나 할 수 있는데, 못 했어. 못 했어, 시오한. 어떡해? 내가 구해줄 수 있었는데, 못 했어.]

[…괜찮아.]

[어떻게 괜찮아?! 나 할 수 있었단 말이야, 안 한 거라고! 진짜 큰일 날까 봐 무서워서… 무서워서…. 혹시, 내가 괜히 사건 생겼으면 좋겠다고 해서 그런 거면 어떡해?]

시오한이 깨물었다. 그는 여태 보았다. 아이의 힘은 여태까지 보아온 어느 계약자와도 달랐다. 계열도, 제약도, 한계도 없었다. 뭐든 할 수 있다- 그 말처럼 그는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멋대로 이루었다.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본다. 아이는 원한다면 계절조차도 바꿀 수 있다- 심지어,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조차도.

그러니 마음만 먹는다면 조금 전의 그들을 제압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는 것은, 아이 본인인 것이다. 어쩌면 아이의 말마따나, 남자의 죽음조차 아이에게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니다. 시오한은 그저 확신했다.

[그럴 리 없어.]

아이도, 아이였다. 무서웠을 것이다. 그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것을 시오한은 보았다. 어쩌면 그 작은 아기만큼이나, 그보다도 더 무서웠을 것이다.

[그대는 아기를 살렸잖아.]

비가 쏟아져 모두가 돌아간 자리였다. 그대로 있었더라면 아기는 그 속에 숨은 채 죽었을 수도 있었다. 절대로 나오면 안 된다- 움직이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대로 비가 쏟아지는 중에는 수납장 속에 웅크린 채로 우는 것밖에 하지 못했으니.

[…그래, 살리면 돼.]

그런데 아이가 말했다.

[뭐?]

[살리면 되잖아. 살리면 돼!]

두려워 주춤거리면서도, 아이가 남자의 몸 위에 손을 올린다. 까만 눈동자가 푸르게 달아올랐다. 두근- 시오한은 순간 사위가 적막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두근- 제 심장 소리만 들린다. 차갑고 거세게 떨어지는 비가 이대로 모든 걸 잠식할 것 같다. 그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갑게 온통 꿰뚫고 지나가는 것 같은 섬뜩함이 그를 덮쳤다.

[안 돼!]

시오한은 어느새 아이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당황과 혼란이 뒤섞인 푸른 눈동자가 시오한을 보았다.

[그러면 안 돼- 그러지 마라.]

[나, 나 진짜 할 수 있어. 괜찮아-]

빗물이 미끌거린다. 빠져나가려는 손을 시오한이 더 단단히 붙잡았다.

[안 돼. 그러면… 그러면 안 돼.]

시오한은 그 말밖에는 할 수 있었다. 논리적으로 아이를 설득할 만한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서러움, 원망, 자책, 두려움- 그런 것들이 얼룩진 얼굴로. 벌떡 일어선 아이가 시오한의 손을 뿌리쳤다.

[왜 안 되는데?! 살리면 되잖아, 그러면 되잖아?! 너도 나 못 믿어?]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어떡해?]

[……]

[그럼 어떡해….]

아이는 아기가 덩그러니 울고 있을 골목 밖을 보았다가, 시오한을 보았다가, 죽은 남자를 바라보았다가, 결국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것 같다. 눈물 따위는 비와 죄 섞여 그저 흘러가버리고, 통곡 같이 서러운 울음소리만 남는다. 시오한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손을 뻗는 순간,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깜빡, 하고 꺼져 버리듯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시오한이 멍하니 빈 제 손만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빗소리 속에 희미하게 아기의 울음소리만 들린다. 마치 잔상처럼. 잠든 것처럼 보이는 남자의 시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오히려 거짓말 같은 이 모든 게 현실인데, 그만 없다. 거짓말처럼.

[…일리온.]

[전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그가 황급히 시오한의 앞으로 부복했다. 그가 급히 제 웃옷을 벗어 시오한의 위로 덮어주었다.

[돌아가자.]

그것은 명이 없어 차마 나서지 못하는 내내 일리온 시타가 기다리고 기다렸으며, 또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옅은 회색 눈동자가 안도로 물들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가 조심스레 시오한을 안아 들었다. 남자의 시체 같은 건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이 쏟아지는 비를 황태자가 맞았다는 것으로 청년은 이미 눈앞이 아찔한 것 같았다.

[…저 아이.]

[예, 전하. 데려가도록 하겠습니다.]

한시가 급한 일리온 시타가 재빨리 대답했다. 시오한이 말없이 눈을 감았다. 피로가 몰려들었다. 쏴아아아- 절대 그치지 않을 것처럼 쏟아지던 빗소리는 어느새 조금 약해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