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어? 비 온다.]
뒷골목에야말로 진정한 스릴과 탐험이 있다며 탐정놀이를 하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시오한도 고개를 드는 순간, 그의 손등으로 툭-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어어어- 여기저기서 그런 빗방울을 맞았는지 거리가 어수선해지는 순간, 쏴아아아-- 거짓말처럼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시오한도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우와 엄청 많이 오네! 비에 흠뻑 젖건 말건 아이가 즐겁게 소리쳤다.
금방 골목에 얽히고설킨 천막 밑으로 들어갔으나 그들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옷이 불쾌하게 몸에 감겨들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조금 미간을 구긴 시오한이 엉거주춤 옷을 떼어내는 동안 옆에서 아이가 부르르 머리를 털었다. 물방울이 죄 시오한에게 튀자 아이가 또 푸하하 웃더니 그의 긴 머리칼을 붙잡아 조심스레 짜주었다.
[쨘.]
단순히 짜준다기에는 뭔가 묘하게 꼼지락거린다고 생각했더니, 아이는 어설픈 솜씨로 시오한의 머리칼을 묶은 뒤였다.
[머리칼을 내려주오, 그거 같다.]
[그게 뭐지?]
[동화책에 나오는 공준데, 머리카락이 엄청 길어서 왕자가 머리카락을 내려주오, 하면 그걸 내려줘서 잡고 올라오게 하는 거야. 왕자가 아니라 엄마였나? 뭐 아무튼. 완전 길잖아.]
아이가 머리칼을 잡고 올라가는 시늉을 했다. 시오한이 픽 웃었다. 그가 머리칼을 기른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는 애초에 제 머리칼에 감상이랄 것도 없었다. 시녀들이 알아서 관리했고, 그러니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부황도 머리칼이 짧다. 아이를 바라본 시오한이 물었다.
[자를까.]
[안 돼!]
화들짝 놀란 아이가 외쳤다. 생각지 못한 격렬한 반응에 시오한이 눈을 크게 떴다.
[완전 예쁘단 말이야. 자르지 마. 내가 묶어줄게.]
정말 시오한이 머리칼을 자를 것 같았는지 아이는 두 손까지 모으고서는 애절하게 말했다. 아니 이렇게까지… 시오한은 또 웃고 말았다. 아이가 반색을 하며 얼른 시오한의 머리칼을 쥐고 조금 더 만지작거렸다. 묶어준다고 한 그 말을 당장 지켜 보이려 한 것 같은데, 예쁘게 묶이기는커녕 점점 더 이상해지고 있었다. 한껏 집중을 한 아이가 인상을 썼고,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자르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
[응. 걱정하지 마.]
시오한이 빙그레 웃었다. 슬그머니 시오한의 머리칼을 풀어내던 아이도 웃었다.
쏴아아- 그들은 쫄딱 젖은 채로 비가 쏟아지는 모습을 구경했다. 골목까지 가득 차 사람으로 북적거리던 거리는 갯강구가 흩어진 것처럼 썰렁하기만 했고, 상인들은 황급히 가판을 정리하고 물건을 들여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잠시 지나 그 상인들마저 모두 들어가자 사위에는 쏟아지는 빗소리밖에 없었다.
[진짜 많이 온다. 하늘에 구멍 뚫린 거 아니야?]
[비가 올 때가 아닌데.]
[비야 뭐 아무 때나 오는 거지.]
아이가 대수롭잖게 말했다. 그러나 시오한은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렴풋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이리스티리움의 여름에 비가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라날리 꽃이 비를 맞은 적은 없다. 라날리 꽃잎은 연약해서 바람만 살짝 스쳐도 하늘하늘 떨어지는데 이렇게 비가 오면 꽃잎이 남아날 리가 없었다.
[비 싫어해?]
시오한의 표정을 본 아이가 물었다. 시오한은 비를 좋아한 적도, 싫어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아이가 이렇게 물으니, 지금은 좀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날리 꽃잎이 성도 전역에 흩날리는 모습은 아주 예뻤고, 이리스티리움에서 손에 꼽히는 경관 중 하나였다. 아이는 부러 계절에 안 맞게 꽃을 피운 적도 있다고 했으니 보았다면 좋아했을 게 틀림없었다.
[응.]
[멈춰줄까?]
[뭐?]
시오한이 아이를 돌아보았다.
[비 싫어하면 내가 멈춰줄게.]
[…그러면 안 될 거 같은데.]
[괜찮아, 괜찮아. 비만 멈추는 건데 뭐 어때? 다들 좋아해! 난 다 할 수 있다니까?]
시오한이 절 바라보는 게 못 미더워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아이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시오한은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어쩐지 심장이 쿵쿵 뛰었는데,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빗소리가 가득했고, 예쁘게 거리를 장식했던 등불은 하나 둘 꺼져 온통 어두웠다.
[…아니야. 괜찮아.]
[진짜? 나 할 수 있는데.]
아이가 조금 불퉁한 얼굴을 했다. 순간 시오한이 저도 모르게 아이의 손을 붙잡았다. 그는 늘 안 된다는 말만 들었다고 했다. 하지 말라는 말만 들었다고. 여기서는 다 해도 된다며 좋아했으니… 그게 아이가 이곳에 오는 이유일지도 몰랐다.
[그대와 봐서 좋아.]
[……]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밌어, 그대와 있어서.]
[진짜?]
[응.]
히히- 아이가 쑥스럽게 웃었다. 무척이나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저 즐겁게 푸하하 하고 웃어넘길 줄 알았는데 이렇게나 기뻐할 줄은 몰랐다.
[나도 너랑 있어서 좋아.]
헤헤, 웃으며 말한 아이가 벌떡 일어섰다.
[아, 원래 이렇게 비가 올 때 사건이 생기는 건데. 탐정 만화 보면 꼭 그래, 드라마도 그렇고.]
재미있다는 말에 아이는 무언가 책임감을 느낀 것 같았다. 아이는 비장한 주먹을 쥐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상한 소리 안 들려?]
[소리?]
시오한은 또 아이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다. 일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놀 아이였다. 그러나 아이는 정말로 무언가가 들리는지 신중하게 귀를 기울였다.
[애 울음소리 같은데….]
아이가 말했다. 그 표정이 심상치 않아 시오한도 귀를 좀 더 기울여 보았다. 그리고 시오한도 그 소리를 들었다. 아주 작은 울음소리였다. 높고, 연약하며, 멀다. 퍼붓는 빗소리에 묻혀 아주 간신히 들려오고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잡아내지 못할 소리였다.
[가보자.]
[잠깐-]
시오한이 벌떡 일어서는 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니 일단 치안대에 알리는 게-]
[위험할 게 뭐가 있어?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얼른 가보고 길이라도 잃었으면 데려다주면 되지!]
더 붙잡을 새도 없이 아이가 빗속으로 달려 나갔다. 시오한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가 황급히 아이를 따라나섰다. 잠깐 사이에 벌써 제법 고인 물이 박차는 발걸음에 튀며 부서졌다. 쏴아아아- 퍼붓듯 쏟아지는 빗속으로 들어오니 빗소리가 완전히 사위를 감싼다.
아이는 아기를 단번에 찾아냈다. 아기는 외진 골목의 쓰레기더미 속에 있었다. 버려진 낡고 조그만 수납장 속에 잘못 딸려 들어간 것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악! 완전 애기야. 야, 너 왜 이런 데 있어!]
수납장 문을 연 아이가 기겁을 하며 얼른 아기를 꺼내 안았다. 한눈에 봐도 값비싼 옷을 입은 아기는 3살, 4살 정도 되어 보였는데 얼마나 그 속에 웅크리고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얼마 전이었으나, 그새에 벌써 수납장에는 빗물이 제법 축축하게 고여 있었고, 아기도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조그만 수납장에 물이 고이기 시작하자 두려워 울음을 터트린 것 같았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으며 남색 머리칼은 전부 이마에 눌러 붙어 있고 몸이 아주 뜨거웠다. 벌컥, 수납장 문이 열리고 누군가 나타나자 겁에 질려 발버둥을 치던 아기는 아이의 조그만 품에 안기자마자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숨이라도 넘어갈까 봐 무서울 정도였다.
[아빠, 아빠- 아빠-]
축축한 아기의 몸에서 피어나듯 조그만 물방울이 하나씩 떠오르는가 싶더니, 곧 수백 개의 물방울이 일제히 떠올랐다. 아기는 처음부터 젖은 적도 없는 것처럼 아주 뽀송해졌다. 눈물범벅이 된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몽환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고, 단번에 아기의 시선을 뺏을 만한 광경이었으나 아기는 아이의 옷자락을 꼭 쥐고 울기만 했다. 이것 봐라, 예쁘지, 하며 달래보려던 아이가 어쩔 줄을 모르고 시오한을 보았다. 그러나 시오한은 아이와 있으면 번번이 뭘 모르는 바보가 되기 일쑤였고, 아기를 달래는 것 역시 그가 모르는 영역이었다.
[아빠 잃어버렸어? 아빠 찾아? 형이 찾아줄게, 뚝, 뚝.]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아이가 아기를 둥기둥기 달랬다. 사실 아기라기에는 조금 민망할 수준이고, 아이라고 봐야 옳았다. 아이가 둘이다. 시오한이 보기에는 애가 애를 안고 달래는 광경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기들은 별의별 사고를 다 친다지만 이 아기가 우연히 장난을 치다 수납장에 딸려 버려졌을 것 같지는 않다. 아기에게 저런 옷을 입히는 집에 저렇게 낡고 값싼 수납장이 있을 리 없었다. 누군가가, 이곳에 아기를 숨겼을 가능성이 크다.
시오한은 아기 하나 안을 줄 모르지만, 아기가 장난을 치다가 아빠를 잃어버렸구나, 하고 낙관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는 세상은 알고 있었다.
[……]
시오한이 입을 뻐끔거렸다.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꽉 주먹을 쥐었다.
[얘 아빠만 얼른 찾아주고 가자.]
[버리고 간 걸 수도 있다.]
아이가 얼른 아기의 귀를 막았다.
[야! 애가 듣잖아! 왜 그런 말을 해?]
[차라리 버리고 간 거라면 더 낫다. 혹시 더 위험한 일에 연루된 걸 수도 있어.]
[그럼 더 큰일이잖아! 도와줘야지!]
와락, 화를 낸 아이의 눈이 어둠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섬광이었다. 그들 주변의 공간이 푸르스름하게 물들었다. 비가 튕겨져 나가는 둥그런 원형의 막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보니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비를 맞지 않고 있었다. 허공에 떠오른 물방울들이 푸른빛을 머금고 빛난다. 그 빛이 교차되는 허공에, 뿌연 형상이 어른어른 드러났다.
‘군나르, 절대 소리 내면 안 돼, 절대로. 아버지가 꼭 다시 찾으러 오마. 꼭 올 테니까, 여기에 꼼짝 않고 숨어있어야 해, 알겠지?’
‘아빠-’
‘쉿- 지금부터 시작이야. 절대, 절대 나오면 안 된다. 아버지가 올 때까지.’
갈색 눈동자가 어른어른 드러났다. 수납장 밖으로 뻗어 나온 작은 손을 꽉 쥔 커다란 손이 이내 작은 손을 다시 밀어 넣는다. 형상이 사라졌다.
[버리고 간 거 아니잖아! 무슨 일이 생긴 거라니까!]
촤르륵-! 물방울들이 일시에 바닥으로 후두둑 떨어졌다. 보석이 떨어지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푸른 물방울들은 그대로 부서져 버릴 것 같았으나, 또르르르 흩어지며 굴러가 뭉쳤다. 발자국이었다.
[애기야, 이것 봐라. 아빠 발자국이야! 예쁘지?]
아기를 추슬러 달래며 아이가 시오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 모르게 진땀을 뺐는지 이마가 땀으로 반들반들하나, 눈은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시오한은 몇 번이나 입술만 달싹이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