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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29화 (129/250)

129화

[진짜 거짓말 아니야. 여기랑 저기는 세상이 다르잖아, 시간도 다른가 보지. 내가 먼저 네 말 믿을 테니까 너도 내 말 믿어줘.]

그럴 리가 없다. 계약자들의 세상과 이곳이 시간 편차가 있긴 하지만, 한 시간과 한 달 정도로 차이가 난다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다. 앞뒤가 맞지 않는데 사실 관계를 제대로 따지지도 않고 무작정 그냥 그럴 수도 있는가 보지, 하는 이치도 겪어본 적 없다. 시오한은 절 똑바로 응시하는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래.]

[믿는 거지?]

[믿는다.]

아이가 씩 웃었다. 그러더니 풀썩 뛰어 다가와 시오한의 팔을 툭 친다.

[너 실망했구나? 나랑 놀러 못 가서!]

[실….]

실망했구나. 시오한이 그 말을 되뇌어 보았다. 태자에게는 냉정하게 관조하는 미덕이 필요했으므로 제 사소한 감정을 곱씹는 일 같은 건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돌이켜 보니, 아이의 말이 맞는 것 같다.

시오한이 아는 실망이라는 단어는 늘 기대와 함께 따라가는 것인데, 그는 딱히 기대랄 것을 해본 적도 없어서 실망 같을 걸 하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대 말이 맞아.]

시오한이 조금 웃음 지었다.

[기대했던 모양이다.]

[아유, 이 할아버지, 정말. 가자!]

아이가 덥석 시오한의 손을 잡았다. 시오한이 또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응, 안 돼?]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시오한을 끌며 아이가 대꾸했다. 당연히 안 된다. 안 되는 이유로 따지면 아주 수만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입을 꾹 다문 시오한은 곧 그냥 고개를 저었다. 그가 아이의 손을 꽉 마주 쥐었다.

***

이리스티리움은 대체로 어느 극단으로도 치닫지 않은 훈훈한 기후를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여름을 최고의 계절로 쳤다. 해는 뜨겁지만 북쪽으로부터 선선한 바람이 불어 그늘에만 들어가면 아주 쾌적했고, 각종 화사한 여름 꽃이 만개하고 나무가 많은 국토 전역이 푸르러지는 데다가 해가 길어 놀기에도 일하기에도 그만이기 때문이었다. 해서 이리스티리움은 시종일관 비가 이어지는 봄의 끝, 우기의 끝자락에 만개하는 라날리 꽃을 신호로 하여 축제와 함께 아주 떠들썩한 여름을 맞이하곤 한다.

이 정도면 이리스티리움 성도 관광 책자에나 나올 법한 설명이고 사실 시오한에게 이 성대한 축제는 골치라는 인상이 더 컸다. 모두가 흥겨움에 취해 미친 듯이 먹고 마시고 놀며 사건 사고를 다 쳐대면 그걸 수습하고 정리해야 하는 게 바로 궁의 관료들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에 죽을상을 하고 눈 밑이 퀭한 사람이 있다면, 고위고 하위고 가릴 것 없이 궁의 관료였다. 그러니 그 꼭대기에 선 황제라고 사실 다를 것도 없어 정신없이 바빠졌고, 그건 곧 시오한의 미래였다.

시오한은 그 미래가 조금 빨리 찾아온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아니지, 야! 네가 치고 지나갔잖아!]

아이가 악악 소리를 질렀다. 시오한은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 올해는 폭우와 더위로 라날리 꽃이 제대로 피질 못해 분위기가 예년만 못하다더니, 이게 못한 거면 도대체 원래는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는 등을 퍽! 치고 지나가는 행인에 밀려 가판 다리에 박은 무릎을 문질렀다.

태어나서 한 장소에 이렇게 사람이 밀도 높게 가득 찬 것을 보는 것은 처음이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왁왁 소리를 질러대는 것도 처음 듣고, 이렇게 온 사방천지가 정신없이 제멋대로 번쩍여 대는 것도 처음… 그냥 갓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다. 그 모양이니 그와 아이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다.

세자든 태자든 하여간 왕족은 성 밖에 나오면 다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며 아이는 저는 물론 시오한에게도 거적때기와 비슷한 것을 씌워놓은 덕에 더더욱 그랬다. 황금색 찬란한 머리칼도 아이가 야무지게 뒤집어씌운 걸레인지, 후드인지 모를 것에 덮여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가 걸친 옷은 평범한 옷이라기보다는 정말 거지 옷처럼 보였고, 이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으나 아이는 아주 심취한 것 같았다.

사실 이 정도이니 저 아이들이 이리 무시를 해대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시오한은 생각하고 있었다.

[나 아니라고!]

[장난치냐? 내가 봤거든? 쟤가 혼자 막 넘어지고 그러는 애가 아니거든! 네가 쳤잖아! 죽을래, 진짜?!]

[여기 사람 개많은데 왜 나한테만 그러냐?! 좀 칠 수도 있지, 나라는 보장 있어?!]

[말귀 못 알아먹냐? 내가 봤거든?! 네가 쳤다고! 네가! 엄청 세게! 너 때문에 쟤가 넘어졌잖아!]

[아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아이가 야무지게 쥔 주먹을 흔들었다.

[사과하라고, 이 똘추 말미잘아!]

[……]

저런 욕도 처음 들어봤다. 시오한은 아주 불안했다.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는 아이의 성량은 가판에서 호객을 하는 상인의 목소리를 묻을 정도였다. 다른 아이였다면, 물론 그랬다면 애초에 이 난리통까지 와 있을 리도 없지만, 어쨌든 다른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아이였다면 저러다 말겠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아니다.

그가 조심스레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 여차하면 말릴 생각으로 그런 것이었으나, 보기에는 키만 멀대 같이 컸지 가느다랗고 곱게 자란 것 같은 아이가 드릉드릉 화를 내는 아이의 뒤에 숨은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이의 어깨에도 힘이 들어갔다. 흥! 하고 상대편 아이가 시오한을 향해 콧김을 뿜어냈다. 우웩, 코딱지 나오겠네! 아이가 시오한을 붙잡고 물러나며 이죽거렸다.

[이상하게 서 있으니까 그런 거지!]

[와, 이 코딱지 같은 게 진짜.]

별안간 아이가 제 얼굴을 쥐었다. 손가락으로 눈이며 코며 입이며 다 쥐는가 싶더니 그웨엑! 하고 이상한 소리까지 내는 것이 아닌가. 시오한은 뒤에 있어 아이의 얼굴을 정확히 보지는 못했지만, 아이가 제 얼굴을 쥔 모양이나 소리까지 해서 얼굴로 이상한 표정을 지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기만 했다. 그런데 상대편 아이가 으와악! 하고 아주 기겁을 했다.

[사과 안 해? 너 집까지 따라간다?!]

[아, 미안하다, 미안해! 됐지?]

[그래 인마, 꺼져!]

[야, 쟤 완전 또라이야!]

꺼지라는 일갈을 들은 아이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분한 표정으로 제 친구들에게 달려갔다. 시오한을 돌아보는 아이가 흥, 하고 우쭐한 얼굴을 했다. 이번엔 시오한이 먼저 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이대로 달려 나가 저 꼬마의 뒤통수라도 후려갈겨 버릴까 걱정돼서 그런 것인데, 아이가 시무룩하게 얼굴을 구기더니 입을 뿍 내밀었다. 턱밑이 쪼글쪼글해졌다.

[시오한, 괜찮아?]

[괜찮아.]

[아씨, 진짜 저놈 저거.]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시오한의 무릎을 살폈다. 애초에 시오한은 넘어진 게 아니었다. 그는 그냥 푸닥 넘어지기에는 너무 훈련이 잘 되어 있는 8살이었다. 옷이 좀 더러워지기는 했지만 무릎이 까지지도, 손바닥이 까지지도 않았는데, 아이는 시오한의 무릎을 살피더니 손까지 가져가 아주 열심히 뒤집어보고서야 안도했다.

[진짜 깜짝 놀랐네. 나한테 딱 붙어 있어. 엄마아빠랑 새해에 종 치는 거 보러 간 적 있는데 여기가 지금 딱 거기 같다. 아!]

시오한의 손을 꼭 잡고 제게 딱 붙도록 한 아이가 요령 좋게 옷자락들을 헤치며 나아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너무 가깝게 몸을 딱 붙이고 있어 조금 엉거주춤 걷다가 아이의 뒤통수에 코를 박을 뻔한 시오한이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내가 목마 해줄까?]

[…목마?]

그게 뭐지. 들어본 적은 없지만 불안하다. 시오한이 불안하게 아이를 보았다. 안심하기에는 아이의 눈이 몹시 반짝거리고 있었다.

[이리 와 봐. 이렇게 내가 널 어깨에 태우는 거지. 그럼 완전 잘 보여, 나도 아빠가 그거 해줬는데 대박이었거든? 내가 해줄게.]

[자, 잠깐.]

아이가 쪼그리고 앉더니 대뜸 시오한의 다리 사이로 머리를 쑥 들이밀었다. 또 난생처음 보는 이 망측한 자세에 시오한은 아주 기겁을 하고 말았다. 그가 분분히 물러나다 가판에 탁, 부딪쳤다.

[아, 왜? 진짜 잘 보인다니까?]

[내가 그대보다 키가 더 커.]

[무슨 상관이야, 나 힘세! 절대 안 넘어져, 약속. 너 나 못 믿어?]

물론 그럴 것이다. 아이의 능력이라면 키와 상관없이 절 어깨에 얹고도 넘어지지 않는 게 가능하겠지만, 시오한은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이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제 것을 거는 대신에 덥석 그 손을 잡았다.

[믿는다. 하지만 나는 그냥 손잡고 걷고 싶은데.]

[또 넘어지면 어떡해. 너 자꾸 막 부딪치잖아. 하나도 안 보이고.]

[그대가 지켜주잖아.]

[그렇긴 한데….]

아이는 아무래도 아쉬운 얼굴을 하고 일어섰다.

노을이 꾸덕하게 가라앉던 하늘은 벌써 검푸른 빛으로 어두워져 거리마다 동그란 등이 예쁘게 펼쳐져 있었다. 마차며 말이 혼잡하게 지나가고 사람들은 누가 옆에 닿는지 치는지도 모르고 저마다 제 갈 길 가고 할 일 하느라 바빴으며, 가게들마다 너나 할 것 없이 가판을 펼쳐놓아 더 좁기까지 하다.

집집마다 등불을 걸어놓고 연을 매달아 놓아 아주 예뻤지만 그런 것보다는 앞이고 위고 옷자락과 사람 턱으로만 시야가 가득 찼다는 뜻이었다. 시오한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아이는 그게 아쉬운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시오한에게 예쁘고 즐겁고 재밌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시오한의 손을 잡고 여기저기 작은 생쥐처럼 쏘다녔다. 이러다가는 황궁에서 걷는 법도 까먹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이 없는 시오한과는 다르게, 이런 번잡함에 아주 익숙해 보였고, 또 즐거워 보였다. 가판에 진열된 불빛이 나는 작은 인형 하나하나의 생김새에 웃었고, 조그만 정원이나 호수, 연못, 들판 같은 것이 장식된 투명한 구슬을 보고는 연신 감탄하며 이것저것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중 아주 작은 토끼가 두 마리나 들어있는 것을 보고서는 아주 귀여워하며 제가 토끼를 얼마나 키우고 싶어 했는지에 대해 한참이나 떠들기도 했다. 아이는 호객을 하다 목이 쉬어 삑사리가 나는 것을 듣고 웃음을 터트렸으며,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하나의 옷차림을 신기해했다.

와중에 이건 뭐야, 저건 뭐야, 하고 시오한에게 큰 것부터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것까지 물어보고는 했는데, 시오한은 대답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회의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는 지도를 봐 성도의 거리를 알고는 있었으나, 어느 가게가 어떤 가게도 무엇을 파는지는 아이가 아는 것 이외에 더 알 리가 없었다.

그런데 아이는 물어놓고 대답에는 별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옷 파는 곳인가? 내 세계에는 옷 파는 곳은 전부 유리가 이렇게 크게 있는데 여기는 안 그런 건가 봐. 아, 저건 극장 같은 건가? 여기도 백화점 있어?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아이는 또 추측에 빠져들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시오한도 아이와 함께 심취해서 회의감 같은 별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저 사람은 집에 급한 일이 있나 봐, 걸음 엄청 빨라. 저기 저 애 봐, 빵 하나 가지고 동생이랑 싸우다 엄마한테 혼났어, 여기도 강아지가 있네! 우와 저 시계 봐, 엄청 비싸고 예쁘다, 저 아저씨는 선물 고르나 봐, 엑, 저거 이상한데! 와 나도 새 밥 줄래!

굳어 먹지 못하게 된 빵을 뿌리는 상인에서 기어이 한 덩이를 얻어온 아이는 그것을 반쪽으로 나누어 시오한에게 주기도 했다. 시오한은 난생처음으로 새똥을 맞아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이는 깔깔 웃어대며 그것을 없애 주었지만, 새똥이 따끈하다는 것을 처음 깨달은 시오한의 오묘한 표정을 본 아이가 또 배를 잡고 웃었다.

아이는 세상 어디에서건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 같았다. 손을 꼭 잡은 채 아이가 이끄는 모든 곳에 시선을 주면서, 시오한은 그 틈 사이사이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이가 보여주는 세상은 물론 신기했지만, 아이가 더 신기하고 즐거웠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까만 눈동자에 이미 아이가 보는 세상이 모두 다 비추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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