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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28화 (128/250)

128화

[저들이 어떻게 해서 전하께 만찬상을 내왔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 하는 것 같았습니다.]

[…….]

[혹 다른 궁인들이 내온 건 아닌지 조사하는 것 같았으나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명령을 받고 전하의 침실에 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알았다.]

부복해 있던 청년이 슥 사라졌다. 시오한은 고개도 들지 않고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텅 빈 종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멋들어진 깃펜 끝에서 똑, 떨어진 잉크가 종이에 까맣게 번졌다. 시오한은 잉크가 조금씩 번져나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그냥 펜을 내려놓았다.

창밖으로 노을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붉은빛이 스며드는 침대는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다. 사실 시오한은 제가 왜 대낮에 그렇게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는지를 떠올리는 데 한참을 할애해야 했다. 제 앞에 누워 있던 아이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도.

이제 아이가 꿈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환시 따위가 아닌 것도 알지만, 그렇다고 아이가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아이는 계약자가 아니라고 했고, 그건 분명했지만 그럼 또 달리 무엇일 수 있을까. 계약자가 아닌 이계의 존재가 이 세상에 스스로 찾아오는 게, 머무르는 게 어떻게 가능하기에.

왜 저는 자꾸만 아이의 존재도, 이름도 잊게 되는 걸까.

궁인들은 어째서 상올 내온 기억을 잊었지?

‘ㄷ… 버렸다.’

아이가 무슨 말인가 했던 것 같은데. 처음에는 제가 내렸던 눈을 말끔히 사라지게 만들었고, 그 뒤에는… 눈싸움 같은 건 처음부터 한 적도 없는 것처럼 모든 게 그 이전으로 돌아왔다.

돌아왔다.

시오한의 미간이 좁아들었다.

설마 아이가 시간을 돌린 걸까? 이 침실에, 그들이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며 놀았던 그 시간만? 그런 것도 가능한 걸까. 시오한은 분명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 침실에 별안간 눈이 소복하게 내렸던 것도, 눈을 굴려대며 던졌던 것도, 조그만 눈사람이 춤을 추던 것도 전부.

그런데 어째서….

[하아.]

시오한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서고를 아무리 뒤져봐도 알 수가 없다. 아이는 시오한의 이해 밖에 있었다.

차라리 계약자라면….

시오한의 눈이 다시 동그랗게 잉크가 번진 자국에 닿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야.’

제 손을 잡고 눈 위로 그려주었던 그 기묘한 도형 같은 글자들도, 혀끝으로 내뱉던 아이의 이름도.

[…놀러가자고 했으면서.]

시오한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이가 예쁘다며 연신 만지작거렸던 황금색 머리칼이 힘없이 쏟아졌다.

그 날 그의 침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건, 궁인들에게 어떤 기이한 일이 생겼건 시간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흘러갔다. 시오한은 완연히 새파래진 정원을 바라보았다. 꽃도 풀도 무성하던 것이 어느새 정리를 했는지 아주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여름에 들어선 햇빛은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아쉽다. 시오한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태자?]

부드러운 목소리에,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시오한이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에 비해 조금 더 어두운 금발을 짧게 자른 남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머리 위에 아름다운 왕관이 씌워져 있다. 벌써 여러 번 불렀는지 황금색 눈동자는 의아한 기색으로 차 있었다.

이 나라, 제국 이리스티리움의 황제.

[…예, 부황.]

조금 생소하게 그를 보던 시오한이 눈길을 내리며 대답했다.

[내 말을 들은 겁니까?]

[죄송합니다, 뭐라 이르셨습니까?]

[태자가 다른 생각을 할 때도 다 있고, 별일이네요. 덥기는 더운가 봅니다.]

황제가 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복 전쟁으로 온 대륙을 뒤덮다시피 했던 그 아칼테케 선황제의 아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유약하다- 시오한은 황제가 종종 그런 말을 듣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황제는 시오한이 태어나기도 전에 붕어했기 때문에 초상화로나마 보았지만, 그는 그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올해는 여름이 좀 빠릅니다. 난데없는 폭우가 내리더니 갑작스레 더워져 라날리 꽃도 제대로 피지 못했다고 하니 축제 또한 부진하고… 징조가 좋지 않아요.]

시오한이 시선을 주고 있던 창밖을 바라보며 황제가 말했다. 시오한이 시선을 떨어트렸다. 집무실의 책상 위에는 서류들이 어지럽게 쌓이고 널려 있었다. 갑자기 훌쩍 더워졌다 말만 들었지 그는 더운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밤새 난데없는 폭우가 쏟아졌다…, 그 역시 전해 들었을 뿐이다. 그는 비 한 방울 맞지 않았다.

[한낮 꽃이라 하여 허투루 봐서는 안 됩니다. 꽃이 피는 것도, 지는 것도, 햇볕이 너무 강하거나 비가 오거나 오지 않거나, 그 모든 것들이 그대에게는 징조고 신호여야 합니다, 태자.]

[유념하겠습니다.]

유약하지만 어진 황제. 어질지만, 유약한 황제. 시오한이 이 표현에 순서가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상관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태사에게 듣자 하니 그대에게 벌써 더 가르칠 게 없다고 하던데. 영민하고 영민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백을 알아 하늘이 내린 기재이니 감히 범인된 입장으로 가르칠 주제가 되지 아니 한다고.]

황제가 웃음을 머금고 태사의 말을 인용했다. 시오한이 무덤덤하게 답했다.

[태사가 원래 말을 좀 거창하게 하는 편입니다.]

[하하. 이리 대답하는데 어찌 거창하게 말했다 합니까? 태사는 이제 태자의 궁에 들지 않을 겁니다. 시강원에 명을 내려놓았으니 이제 수업이 아니라 정무를 두고 논의하게 될 겁니다.]

서류를 정리하던 시오한이 순간 움찔했다. 이런 말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태자는 앞으로 대전회의에 들어오세요.]

[…대신들이 시끄러워질 겁니다.]

[허니 더욱 태자가 보아야지요. 그들은 원래 시끄럽습니다.]

긴 손가락이 시오한의 정리한 서류 중 하나를 그에게 도로 내밀었다.

[이건 태자에게 맡겨 보겠습니다.]

시오한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도 잠깐뿐, 곧 시오한이 고개를 숙였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집무실을 나설 즈음에는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을 때였다. 백색 궁이라고도 불리는 에트레제의 새하얀 복도로 붉은빛이 스며들어 있어 알았다. 시오한이 흘긋, 창밖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구나. 어느새.

감흥 없이 고개를 돌리던 시오한은 딱 저 해질 녘과 비슷한 눈동자와 마주쳤다.

기사가 즉시 무릎을 꿇었다. 단정하게 하나로 묶은 머리칼 역시 눈동자와 같았다. 꼭 노을이 스며든 것 같아 보이지만 그녀의 머리칼이 원래 그런 독특한 빛이라는 걸 시오한은 알고 있었다. 지금 이 궁에서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에나 경.]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일어나시오.]

그녀가 일어섰다. 약식으로 가볍게 걸친 갑옷이 철그덕- 쇳소리를 냈다. 명을 받아 잠시 어딘가를 다녀오는 길 같았다. 기사의 키가 한참 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리깐 기사의 눈은 아직은 작은 태자를 지나 그 뒤에 선 시종에게 닿았다. 시종이 들고 있는 것은 고급스러운 황실의 원단으로 쌓인 서류였다. 그것을 알아본 기사의 눈에 잠시 복잡한 빛이 스쳤다.

[다음에 보지.]

[예, 전하.]

시오한이 그녀를 지나쳤다. 기사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복잡하다고 하면 또 복잡하다고 할 수 있는 관계였으나, 나눌 대화는 없는 사이였고, 신분이었다.

제 궁으로, 침실로 돌아오는 길은 여느 날과 같았다. 시오한은 책상에 앉아 시종이 올려놓고 간 서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침실은 참 조용했고, 바깥도 조용했다. 사위가 다 그렇게 조용하니 제 숨소리만 들린다. 시오한이 눈을 깜빡였다. 당연하지만, 모든 게 그대로였다.

뭐지.

시오한은 문득 제가 무언가를 기다린다고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니 심지어 조금 떨리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게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막연히 무언가가….

[안녕.]

시오한이 벌떡 일어났다. 튕겨진 의자가 우당탕탕! 유난히 큰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푸하하- 웃음소리가 터졌다. 시오한이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 여깄지롱.]

침대 위였다. 아이는 침대 위에 엎드려 이불에 제 몸을 동그랗게 말아놓고 있었다. 보이는 거라고는 까만 머리카락 몇 가닥과 얼굴밖에 없었다. 턱 밑에 베개까지 받친 것이 마치 그곳에서 하룻밤은 푹 자고 일어난 것 같은 모양새다. 시오한이 눈을 크게 떴다.

[…너….]

[너 멍 때리는 거 완전 웃기다. 내가 인사 안 했으면 진짜 잘 때까지 몰랐겠다. 너 심장마비 걸릴까 봐 내가 봐 준 거야.]

푸하하, 아이가 즐겁게 웃으며 꿈틀거렸다. 시오한은 아이의 말대로 정말 넋을 놓고 있었다. 그제야 떠올랐다. 정원, 눈부시게 내리쬐던 푸른 햇살, 머리칼을 세차게 흐트러트리던 바람, 눈, …약속.

저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시오한이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왜 갔지?]

[엉?]

[여기서 살겠다고 했잖나.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돌아갔던 건가?]

[집에 안 간다니까?]

어리둥절해 있던 아이가 순간 발끈해서 외쳤다.

[나 잠깐 편의점 갔다 온 건데? 여기 좀 이상한 게, 나 무슨 재채기 당해서 퉁 튕겨 나가는 코딱지처럼 계속 막 저기로 가 있어! 그래도 나 너 주려고 완전 맛있는 과자도 사 왔는데!]

아이가 이불에 돌돌 말린 채로 퉁 튕겨 일어섰다. 이것 봐라! 박쥐처럼 팔을 벌린다. 이불이 쫙 펼쳐졌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억! 아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분명 여기 있었는데! 당황하여 이불을 뒤집고 난리가 나는 것을 보며 시오한이 말했다.

[한 달이 지났어.]

[엥?]

제 배까지 까보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대가 사라진 지 한 달이 지났다고.]

[야, 진짜 너 뻥치지 마라! 한 시간쯤 지났겠다!]

[난 거짓말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나도 안 해!]

아이가 붉어진 얼굴로 외쳤다. 시오한에게 갖다 주려고 샀다는 그 과잔지 무언지도 흔적이 없으니 더 억울하고 분한 것 같았다.

[진짜 한 시간도 안 걸렸다니까? 엄마, 아빠, 하늘 다 걸고 맹세.]

아이가 몹시 진지하게 말했다.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더니 훌쩍 침대에서 뛰어내려 와 시오한의 앞에 섰다. 시오한의 시선이 아이의 발에 잠시 닿았다. 조그만 병아리가 그려진 양말 차림이었다. 아이는 침대에 뛰어들기 전 신발을 벗었었다. 한 달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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