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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27화 (127/250)

127화

[으악!]

큰일 났다!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제 등짝을 걱정하던 아이의 얼굴로 곧바로 눈송이가 날아들었다. 퍽! 적당한 크기로 아주 잘 뭉쳐진 눈송이가 장렬하게 부서졌다. 시오한은 뭐든 배우는 게 빨랐다. 아이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재빨리 식탁 아래로 몸을 날렸다. 숙련된 눈싸움 경험으로 이어질 공격에 대비한 몸짓이었다. 개판이 된 밥상 걱정은 이미 둘의 머릿속에 사라지고 없었다.

8살에 이미 아칼테케 정복 황제의 뒤를 이어 이리스티리움 제1기사의 영예를 얻는 황제가 될 거라 확실시되는 태자와, 다년간의 눈싸움과 온갖 기행에 도가 튼 것 같은 아이의 때아닌 눈싸움 때문에 태자의 침실이 역사에 유례가 없던 수준으로 개판이 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시오한은 헉헉, 숨을 몰아쉬며 그나마 멀쩡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침대가 있어야 할 자리는 수북하게 쌓인 눈으로 묻혀 그냥 눈밭에 누운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얼굴은 홧홧했고, 눈에 젖어 머리고 몸이고 할 것 없이 죄다 축축했다. 옆에 누운 아이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무승부, 무승부 하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이가 말했다.

[그대가 먼저 누웠다.]

[누웠어.]

[그대가 먼저 누웠어.]

[너 근데 왜 자꾸 그대라고 해?]

아이가 불쑥 물었다. 뻔뻔하고 빤한 말 돌리기였으나 아주 허를 찔렀다. 시오한은 크게 움찔, 하고 말았다. 아이가 홱 몸을 돌려 시오한을 바라보았다. 시오한이 슬그머니 아이를 마주 바라보았다.

[……]

[너 설마 내 이름 까먹었어?]

[…미안해.]

[그럼 무승부하기.]

아이는 냉큼 말했고, 시오한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팔다리를 휘적이더니 몸을 뒤집었다. 시오한도 아이를 따라 몸을 돌렸다. 아이가 눈 위에 손가락으로 선을 그었다.

[이, 도, 하.]

[이도하.]

[써 봐. 선생님이 뭐든 써야 잘 외워지는 거라고 했어. 이도하.]

시오한의 손을 잡은 아이가 손수 눈 위에 제 이름을 써주었다. 선과 동그라미로 이어진 기이한 문양들이 시오한에게는 도무지 글자로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아이를 따라 하나하나 발음해 보았다. 그 소리가 혀끝으로 굴러가는 느낌을 기억하려고 애쓰며.

[이도하.]

[도하야.]

[도하야.]

[이제 까먹으면 안 된다?]

[응.]

[까먹으면 소원 들어주기.]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나?]

[있어?]

[있어?]

잊지도 않고 꼬박꼬박 제 말투를 고쳐주는 도하의 모습에 조금 웃음을 흘리며, 시오한이 다시 물었다. 그는 완전히 한겨울의 풍경이 된 제 침실을 흘긋 둘러보았다. 도하는 그의 말마따나 정말 제가 원하는 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도하가 바라는 소원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음. 소원?]

도하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에 상큼하게 대답했다.

[몰라.]

시오한은 그런 도하를 보며 눈만 깜빡였다. 그런 게 없다면 소원을 이뤄주는 내기를 하는 데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것이다. 그런데 도하는 그런 게 다 뭐가 중요하냐는 듯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냥 그때그때 하고 싶은 거 하는 거지.]

[……]

[아무것도 안 걸면 재미없잖아.]

턱을 괴고 대수롭잖게 말한 도하가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었다. 이름을 쓰느라 옆으로 밀린 눈이 바람에 흩날리듯 떠올리더니 조그만 눈사람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난 뭐든 해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도하가 즐겁게 웃었다.

[…여기서 살아라.]

그런 도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던 시오한이 말했다. 완전히 뜬금없는 것처럼 들리는 말에 도하가 응? 하고 되물었다.

[아까, 여기서 살게 해달라고 했잖… 했잖아. 그렇게 해.]

[그래!]

도하가 지체 없이 즉각 대답했다. 발을 흔드는 걸 보니 꽤 즐거운 기색이었다. 그들 앞에 놓인 조그만 눈사람이 팔을 흔들며 춤을 췄다. 시오한도 어느새 조금 미소 지었다. 그는 도하가 하듯 손을 포개고 조심스레 그 위에 턱을 기대보았다. 그렇게 기대니, 한겨울이 내려앉은 침실 창문 밖으로는 환한 여름 햇살이 빛나고 있었다. 불현듯 무척 즐거워져, 시오한이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도하가 그런 시오한을 보더니 영문을 모르면서도 따라 웃었다.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났다. 전하- 하고 부르는 소리에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후다닥 일어났다. 이도하가 팔을 휘둘렀다. 방 한가득 쌓여있던 눈이 파스스 흩어져 사라졌다. 눈은 그렇게 감쪽같이 사라졌으나, 물기와 눈싸움을 하는 통에 난장판으로 어질러진 방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으엑.]

기다려라- 시오한은 차분하게 말했지만 도하는 마음이 급해진 것 같았다. 우우웅- 이제까지 들어본 것 중 가장 큰 이명과 함께 방이 진동하더니, 모든 게 일순 뿌옇게 흔들렸다. 또렷한 테두리를 잃고 그대로 흐를 것처럼 흐려지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에는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그들이 막 눈싸움을 시작하기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크, 자화자찬으로 감탄하며 제 턱밑으로 브이자를 그려 보인 도하가 곧장 이불 속으로 뛰어들었다. 시오한이 웃음을 흘렸다.

곧 궁인들이 들어와 기척 없이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시오한의 눈이 문득 이채를 띠었다. 침실에 들어오기 전 시오한에게 인사를 올렸으며, 가벼운 다과와 찻잔을 내려놓고 다시 조심스레 나가는 궁인들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음식이 가득한 테이블을 정리하던 궁인들은 마치 뭔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운 사람들 같았다.

황궁, 그것도 황실 직계가 기거하는 내궁까지 출입하는 궁인들은 어지간한 상황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만큼 훈련받고 노련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이 방에 들어와 테이블 위에서 시체를 보았다고 해도 전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을 것이다.

[일리온.]

시오한의 뒤에서 누군가 슥 나타났다. 검은색 일색의 젊은 청년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오한을 보았다.

[가서 무슨 얘기를 하는지 들어 보아라.]

[예, 전하.]

청년은 나타났던 것처럼 기척 없이 사라졌다. 시오한은 잠시 문을 바라보다가, 푸하- 하고 들리는 숨소리에 다시 웃음을 띠우며 침대로 다가갔다. 하얀 시트 위에 도하의 새까만 머리칼이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이것 봐, 나 정리도 다 할 수 있는데.]

도하가 크게 하품했다.

[눈싸움 하고 나면 꼭 졸리더라.]

소리소문 없이 나타났다 사라진 청년의 목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텐데 그런 건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다. 도하는 정말로 잘 모양으로 뒤척였다. 시오한이 베개를 끌어다 도하의 머리 아래에 받쳐주며 그가 눈을 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고른 숨에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한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오한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도하의 검은 머리칼이 닿을 듯 말 듯 팔랑거렸다.

문득 도하가 번쩍 눈을 떴다. 흠칫 놀란 시오한이 그대로 굳었다. 도하가 멀뚱히 시오한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넌 안 졸려?]

[……]

[같이 자자.]

시오한은 너무 놀라 심장이 벌렁거리고 있었고, 또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잠깐 망설이던 중이었다. 그러나 도하는 또 참지 못하고 혼자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베개 하나가 붕 날아오더니 도하의 옆으로 풀썩 안착했다. 시오한이 엉거주춤하게 몸을 기울이는데, 도하가 다시 베개를 머리맡 반대편으로 홱 밀어낸다.

[아, 아냐. 햇빛 엄청 좋으니까 저쪽에서 자자.]

[…거꾸로?]

[응. 저쪽이 더 창문도 잘 보이고 햇빛이 잘 들잖아.]

시오한은 항상 머리를 대고 자는 쪽에 발을 대고 거꾸로 잔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이제는 이 충격이 신선하기까지 하다. 이불을 감싸 안고서 일어날 생각은 없이 애벌레처럼 꿈질거린 도하가 먼저 눕더니 베개를 팡팡 두드린다. 시오한이 조심스레 그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도하가 그의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음, 이거지.]

도하는 눈을 감은 채 부스럭거리는 이불을 기분 좋게 주섬주섬 끌어안았다. 창문이 슥, 열리더니 선선한 바람이 들었다. 시오한은 얌전히 누워 눈동자만 굴렸다. 매일 보는 제 침실이 부쩍 낯설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스며드는 햇살도, 그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천장도, 모든 게 달리 보였다.

[앗, 그러고 보니 아까 천사 보여주려고 했는데 그냥 돌려버렸다.]

[천사?]

[응. 눈 위에 누워서 이렇게 하면 천사 생겨.]

눈도 뜨지 않은 채 도하가 똑바로 눕더니 팔다리를 휘적였다.

[뭐, 다음에 보여주면 되지.]

제가 먼저 말해놓고 미련이라고는 없어 보인다. 도하는 다시 몸을 뒤척여 시오한 쪽으로 누웠다. 시오한도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그는 도하가 한 것처럼, 제 머리 밑에 팔을 괴어 보았다.

[우리 밤 되면 밖에 놀러 나가자.]

[응.]

[밤에 놀러 나가면 진짜 제일 재밌거든.]

예전에 엄마 아빠와 함께 심야 영화를 보고 밤거리에서 쇼핑도 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엄청 재미있었다며 도하가 잠꼬대처럼 웅얼거렸다. 제가 정리도 잘 하는데 엄마는 늘 정리하기도 전에 뭐라고 한다며, 이걸 봤어야 한다며. 응, 시오한은 그 잠꼬대에 일일이 대답해 보았다.

[잘 자, 시오한.]

도하가 말했다. 시오한은 입술을 달싹였다가, 혀끝을 다시 굴려보았다.

[…잘 자, 도하야.]

팔과 베개에 고개를 파묻다시피 해서 잘 보이지 않는 도하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시오한이 마침내 제 이름을 기억해 준 게 퍽 기쁜 모양으로. 흐흥- 웃음소리가 베개에 묻혔다. 시오한도 웃음 지었다. 선선한 바람이 나란히 침대 위로 흐트러진 머리칼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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