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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밤에 달이 뜬다-126화 (126/250)

126화

[오올.]

아이가 퉁, 튕겨 일어섰다.

[오올. 들라. 물러가라. 오오오올. 너 무슨 왕자, 세자, 그런 거야?]

[……]

시오한이 입가에 어려 있던 웃음이 조금 잦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처음부터 시오한을 보고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넌 뭐냐고 물은 건 시오한이었고, 아이는 이름으로 답했다. 그게 제 전부라는 것처럼. 그래 놓고 역으로 또 이름을 물어오니 시오한도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생각해 보니 그 이후에 줄곧 얼이 빠져 있어 그 역시 아이에게 어디서 왔냐, 어떻게 왔냐, 그런 것들은 하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묻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시오한은 잠시 생각했다.

[태자.]

[오오오오.]

시오한이 짧게 대답했다. 아이가 한층 더 격하게 반응했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시오한의 팔을 주먹으로 퍽 치는 것이 아닌가. 시오한이 눈을 크게 떴다. 그가 제 팔을 바라보았다. 황태자라고 말했는데 어째서 때리는 거지?

[이야아, 대박 신기해!]

아이가 풀쩍 뛰어 음식이 차려진 상으로 거의 날아가다시피 했다. 그리고는 시오한에게 손을 흔든다. 어서 오라는 뜻이었다. 시오한이 팔을 문지르며 아이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핵대박. 너 그럼 아빠가 황제야?]

상을 보고 감탄하는 건지, 시오한이 태자라는 사실에 감탄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아이는 이미 젓가락을 들고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음식부터 집어먹고 있었다. 시오한은 모호한 얼굴로 그런 아이를 바라보았다. 저게 질문인지 감탄인지조차도 헷갈렸다. 저렇게 서슴없이 ‘황제’라고 부르면 아주 큰일이 난다고 알려줘야 할 것 같지만, 아이가 여태 보여준 능력을 보면 딱히 큰일이 날 것 같지도 않다. 이리스티리움은 계약자가 황가에 무례를 저지르면 계약주를 처벌하는데, 아이는 계약자라고 하기에도 영 이상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

시오한은 배가 고프지도 않고 원래 입도 짧았다. 그는 먹는 대신 아이를 구경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그럼 나 여기서 살게 해 주라.]

[……]

시오한이 눈을 깜빡였다. 그대는 계약자냐고, 그렇다면 계약주는 누구냐고, 그런 질문들이 목구멍 언저리에서 맴돌던 참이었다.

[…여기서 살고 싶다고?]

[응, 너 안 먹어? 저쪽에서는 맨날 안 된다, 하지 마라, 조심해라, 잔소리만 한단 말이야. 내가 무슨 위험 폭탄인 줄 알아.]

시오한의 그릇 위로 노란색 푸딩 같은 음식을 덜어준 아이가 투덜거렸다. 언뜻 보기에는 계란만 들어간 것 같지만 사실 계란에다 가격으로는 입이 떡 벌어질 만한 온갖 향신료들이 조화롭게 들어가 간이 된 가벼운 에피타이저였는데, 그게 아주 입맛에 맞았던 모양인지 아주 싹싹 비우다가 마지막 남은 것을 시오한에게 덜어준 것이다. 아이는 이제 다음 요리를 공략하고 있었다.

[어떤 잔소리를?]

[그냥 다 하지 말래. 난 진짜 요만큼도 힘들지 않단 말이야. 다 조절할 수 있는데 뭐만 하면 그러다 큰일 난다고만 하면서 내 말은 아무도 안 믿어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무슨 계절을 바꾼 것도 아니고 겨울에 꽃 좀 피우는 게 뭐 그렇게 큰일 날 일이라고, 진짜 딱 꽃만 피웠다니까? 다른 건 아무것도 안 했어! 봄에 벚꽃 제대로 안 펴가지고 구경도 못 했단 말이야. 엄마도 벚꽃 좋아한다고 그래 놓고서는 혼내기나 하고. 와, 이것도 맛있겠다.]

아이는 보통 서러운 게 아닌 눈치로 불퉁하게 말하다가, 또 요리에 정신이 팔려 연신 젓가락을 놀렸다. 시오한은 왜 아이의 주변에서 그에게 그리 안 된다, 안 된다 말하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굳이 잔소리를 한 마디 더 얹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으므로, 얌전히 아이가 하는 말에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근데 여기는 뭐든 해도 되는 곳이잖아? 계약자들은 능력 써서 돈까지 버는데, 까짓 난 혼자 살 수 있다 이 말이야.]

아이가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 말은 꼭 아이에게 계약주가 없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대는 계약주가 없다는 말인가?]

[말이야.]

[…없다는 말이야?]

산만해 보이더니 또 이런 것에는 꾸준하다. 아이가 일러준 대로 순순히 말을 고친 시오한이 다시 물었다. 아이가 확인도장을 쾅 찍었다.

[당연하지. 난 다 혼자 할 수 있다니까?]

[……]

아이는 별것도 아니라는 듯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으나 시오한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지? 계약자들은 애초에 이 세계에 속하지 않고, 속할 수도 없다. 계약명을 통해 이곳에 임시로 존재를 실체화하고, 계약주의 마력으로 그 존재를 눌러 앉혀야만 그 마력이 허락하는 한계까지 잠시나마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끊임없이 그들을 거부하는 세계와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게 진리였다.

[내가 말했잖아.]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 그 의구심이 드러났던 모양이었다. 시오한은 아차 했으나, 아이가 눈을 가늘게 뜨며 씩 웃었다.

[난 뭐든 할 수 있다고.]

의미심장하게 내뱉은 아이가 별안간 움찔, 굳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작스러운 모습에 시오한도 덩달아 놀랐다. 아이의 손에서 젓가락이 툭, 떨어져 처량하게 테이블 위로 굴렀다. 시오한은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였다. 잘 먹다가 갑자기 왜? 아이가 엉거주춤 입을 벌렸다.

[…매어.]

[뭐?]

[…매어어어….]

순식간에 아이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차올랐다. 시오한은 정말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도르륵, 눈물이 닭똥처럼 톡 굴러떨어지더니 거짓말처럼 아이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눈도, 코끝도, 뺨도 그냥 막무가내로 누가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아이가 눈을 질끈 감자 눈물이 본격적으로 후두두둑 떨어졌다.

[므, 므!]

아이가 숨을 헐떡이며 손을 휘저었다. 용케 알아들은 시오한이 황급히 가장 가까운 물 잔을 낚아채 아이에게 건네주었다. 아이가 그 물 잔을 어찌나 거세게 제 입 안에 털어 넣었는지, 동그랗고 거대한 물방울이 마치 스스로 아이의 입 안으로 뛰어드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시오한은 즉시 아이 몫의 물 잔까지 건네주었다. 그것마저 입으로 쑥 들어갔는데도 아이는 전혀 나아진 것 같지 않았다.

[으아, 아파아파! 미쳤다, 겁나 매워!]

쓰하, 쓰하, 거세게 제 입 안으로 공기를 밀어 넣은 아이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일어나 발만 동동 굴렀다. 아이는 그저 매워서, 시오한은 그저 당황하여 서로가 어쩔 줄을 몰랐다. 그의 식사에 올라오는 음식 중에 저만큼 매운 게 있을 리가 없는데 아이가 유독 매운 걸 못 먹는 건지, 아니면 뭐가 잘못 들어간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눈물이 줄줄 날 정도로 매운 걸 먹으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오한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난리가 나건 말건 일단 어의라도 불러와야겠다고 결심한 시오한이 재빨리 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쭉 미끄러지며 쿵, 엉덩방아를 찧었다.

[?]

난데없이 제 침실에서 미끄러진 시오한은 순간적으로 어리둥절해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충격에 엉덩이가 얼얼하고 허리가 찌르르 울린다. 와중에 푸하하- 웃음소리가 터졌다. 돌아보니, 아이는 시오한을 보며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거의 울면서 웃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반사적으로 바닥을 짚은 손바닥이 아주 차갑다. 시오한이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얼음?]

바닥이 온통 얼음이었다. 얇은 얼음층이 단단하고 투명하게 깔린 것이다. 그리고 그 얼음을 짚은 손등 위로 새하얀 것이 톡 떨어졌다. 설마… 눈을 깜빡인 시오한이 고개를 들었다. 눈꺼풀 위로 솜털 같은 것이 툭, 떨어졌다.

[……]

무심결에 손끝으로 훔치자, 차가운 물만 남는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천장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으, 안뎐 매어. 미혔어.]

얼음 위에다가 아예 혓바닥을 붙여버린 아이가 헥헥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시오한은 아무리 그래도 바닥에다가 혓바닥을 붙인 아이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야 할지, 아무것도 없는 천장에서 펑펑 눈이 내리는 것에 충격을 받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잠깐 현실감각이 완전히 달아난 사람처럼 멍해졌다. 와중에도 눈발이 어찌나 굵은지 몸 위로 착실하게 눈이 쌓였다. 차갑고, 부드럽고, 가볍고… 만지면 그대로 녹아버리는, 진짜 눈이었다.

[와,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야, 미안. 추워?]

잠시 뒤에 벌떡 일어난 아이가 물었다.

[진짜 너무 매워가지고, 나도 모르게. 그래도 예쁘다, 그치? 설마 눈 싫어하는 거 아니지?]

[…싫어하지 않는… 않아.]

시오한이 간신히 대답했다. 조금 눈치를 보는 것 같던 아이는 그 말에 신이 난 것 같았다. 우웅- 하고 이명이 나며 침실이 진동하더니 눈앞이 번쩍했다. 팡, 하고 솜 인형을 내리친 것 같은 하찮은 소리가 나기도 했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던 시오한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 방 안이 완전히 겨울이 되어 있었다. 침대 위에도, 얼음이 깔린 바닥 위에도, 창틀에도, 테이블 위도 전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퍽, 무언가가 시오한의 머리를 강타했다. 단정하게 잘 빗어져 있던 황금색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눈 덩어리들이 후드득 떨어진다.

지금 맞은 건가? 눈에? 시오한은 또 새로운 충격에 휩싸였다. 돌아보니, 아이는 어느새 손에 눈덩이를 두 개나 들고 있었다.

[덤벼.]

갑자기? 그러나 항의고 뭐고 할 새도 없었다. 허공을 붕 날아온 눈송이에 재빨리 피한 시오한이 덥석 눈을 쥐었다. 작은 주먹 아래에 단단하게 뭉쳐진 눈송이가 아이를 향해 날아갔다. 눈송이는 놀라운 겨냥으로 정확히 아이의 이마를 향해 슝,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러나 고작 한 손에 뭉쳐진 눈송이는 몹시 하찮은 크기였고, 결국 날아가는 도중에 푸슬푸슬 흩어지고 말았다.

푸하하하하-! 아이가 마구 웃어대더니 그새 눈사람 머리만 하게 키운 거대한 눈송이를 두 손으로 힘껏 던졌다. 제법 야심차게 던졌으나 이 눈송이는 너무 컸고, 시오한에게 닿지도 못한 채 음식이 한 상 가득 차려진 테이블 위로 쿵! 떨어지고 말았다. 와장창! 테이블이 갓 잡은 생선처럼 튀며 그릇들이 죄다 난장판으로 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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