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나도 너 보고 싶었어!]
[왜 사라졌지?]
[아 그때? 나도 몰라.]
아이가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갑자기 다시 학교던데. 으, 귀신 나오는 줄.]
[학교?]
[어, 갈 데가 없어 가지고 학교 갔었거든.]
아, 집에서 쫓겨났다고 했었다. 시오한은 저도 모르게 아이의 발을 흘긋 보았다. 이번엔 멀쩡하게 신발 두 짝을 신고 있다.
[집에 돌아간 건가?]
[뭔 소리야. 삼 일 만에 포기하면 이도하가 아니지.]
아이가 코웃음을 쳤다. 시오한이 언뜻 미간을 좁혔다. 삼 일?
[삼 일이 아니야. 삼 주가 지났다.]
[엥? 그럴 리가 있어?]
[거짓이 아니다.]
[그럼 너만 삼 주였나 보지. 난 삼 일.]
아이는 별 고민도 없이 경쾌하게 말했다. 그러더니 물었다.
[시오한, 밥 먹었어?]
[밥?]
[그럼 밥 먹자, 나 배고파.]
당장 시오한을 끌고 갈 것처럼 아이가 거침없이 시오한의 손을 덥석 잡고 앞장섰다. 그러나 도서관을 이유 없이 두 바퀴쯤 돌고 나서야 아이는 제가 이곳을 전혀 모른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우뚝 멈춰선 아이는 천장이며 벽을 여러 번 둘러보더니 멀뚱히 시오한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받은 시오한이 풉,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여기 너무 복잡해서 그래. 투시를 해도 무슨 개미집 같단 말이야.]
아이가 투덜거렸다.
[괜히 도약하다 벽에 막 끼고 그럼 엄청 추하다, 진짜.]
그러면서 으름장을 놓는다. 시오한이 아이의 손을 잡았다. 궁의 주방은 한두 곳도 아닌데다가 복잡하고 사람도 많았다. 궁은 끼니 때가 아니더라도 늘 손님으로 가득하니 비워지는 일도 잘 없다. 그런 곳에 황태자가 정체도 알 수 없는 아이를 데리고 가는 건 궁이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내 궁으로 가자.]
다행히, 이 황실 서고는 황태자궁과 아주 가까웠다. 관료들이 함부로 다닐 수 없는 한적한 길도 알고 있다. 시오한이 그를 이끌고 가려는데, 이도하가 덥석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네 궁이 어느 쪽인데?]
[…저쪽.]
시오한은 손으로 서고 한쪽을 가리켰다. 그때 우웅- 이명이 들렸다. 시오한은 저와 거의 귀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진 아이를 흘긋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에 새파란 기운이 불꽃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시오한은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계약자들이 능력을 쓸 때마다 어김없이 일어나는 현상, 섬광이다.
그 순간 시오한의 시야가 한 번 흔들렸다. 그가 눈을 깜빡인 다음 순간에는, 모든 게 변해 있었다. 숲의 나무처럼 무수히 늘어선 책장들이 반투명해져 있다. 책장과 책장을 넘어, 그 벽을 통과해 정원 한쪽에서 가지치기를 하고 있는 정원사마저 통과해 또 그 너머, 제 침전까지 훤히 보였다.
[……]
[보이지?]
시오한의 시선은 반투명하게 투과되어 제 방에 닿았지만, 그 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좀 혼란스러웠다. 정원을 지나 우측으로 조금 꺾고 좌로 세 발자국쯤 걸어 꺾인 복도 끝의 태피스트리가 달린 방? 그런데 멀쩡한 시야가 확- 당겨지더니 제 방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흠칫 놀란 시오한의 옆에서 씩 웃으며, 아이가 물었다.
[여기 맞아?]
[…그래.]
대답하기가 무섭게, 반투명하게 투과되던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침실에 있는 것처럼 확대되었던 시야가 그 모습 그대로 또렷해진 것이다. 시오한이 눈을 깜빡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침실에 서 있었다. 시오한이 아이를 쳐다보았다. 아이가 에헴, 하더니 말했다.
[이도하 택시 이용 감사합니다. 밥 준댔으니까 특별히 공짜로 해줄게.]
한껏 으스대는 태도에 픽, 웃고만 시오한이 문으로 다가갔다.
[신경 써서 대접해야겠군.]
문가에 선 채로 궁인을 불러 제법 끼니가 될 만한 것을 들여오라 이른 시오한이 돌아왔다. 어느새 아이는 훌렁훌렁 신발을 벗고 베개까지 껴안고서는 그의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너 이 침대 혼자 써? 무슨 침대가 내 방만 해?]
팡팡, 아이가 제 옆을 두드렸다. 여기 엎드리라는 듯이. 시오한이 조심스레 그 옆에 앉았다.
[자려는 건가?]
[밥 시켜놓고 뭘 자는가.]
시오한의 말투를 따라하며 아이가 푸하하 웃었다. 대체 왜 웃는지 영문을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낭랑하게 웃는 소리가 듣기 좋아 시오한도 덩달아 조금 웃게 되었다.
[시오한, 진짜 말투 왜 그래? 겁나 웃겨!]
[내 말투가?]
시오한은 정말로 어리둥절했다. 뭐가 이상한지 그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할아버지 같잖아! 그런가? 그렇군. 이리 오너라.]
눈에 잔뜩 힘을 준 아이가 한껏 굵게 만든 목소리로 말하더니 침대를 뒹굴며 또 푸하하 웃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떡하긴, 그냥 편하게 하면 되지.]
[그대가 가르쳐 줘.]
[좋아, 그럼 날 따라 해.]
아이가 널린 베개를 제 옆으로 끌어다 놓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라는 거지. 시오한이 멀뚱히 바라보자, 눈짓으로 베개를 가리킨다.
[?]
[아, 엎드릴 줄 몰라?]
[…엎드리라고?]
잘 것도 아닌데? 침대에?
[아냐, 안다.]
[알아.]
아이가 정정하듯 말을 다시 해 준다.
[…알아.]
그에 순순히 따라하며 시오한이 어색하게 몸을 기울였다. 아이를 흘끗 보고는 베개를 가슴 앞으로 대고 엎드리는 그 동작은 몹시 느릿느릿했다. 성질 급한 이도하는 또 손가락이 꿈틀거렸으나, 차르르 쏟아지는 황금색 머리칼에 시선을 빼앗겼다.
[머리카락 진짜 예쁘다.]
누가 봐도 편해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뻣뻣하게 엎드린 시오한이 멈칫했다. 아이는 서슴없이 제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 말은 처음 들어본다.]
[처음 들어봐. 그럴 리가? 진짜? 진짜면 여기 사람들은 눈이 다 이상한 거 아냐?]
[…처음 들어봐.]
[아닐걸, 진짜 완전 아닐걸. 다들 속으로는 엄청 예쁘다 생각하고 있을걸.]
손가락 사이로 스치는 머리칼의 느낌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쓸어내리며 아이가 말했다. 시오한은 천천히 몸에 힘을 빼며 조금 더 머리를 기울였다.
[금색이라서 예쁜가? 나도 해볼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의 머리칼이 바람에 차르륵 쓸린 들판의 풀잎처럼 한차례 쓸리더니 순식간에 금발로 변했다. 스치고 부딪치며 쇳소리가 날 것처럼 광택이 도는 시오한의 금발과는 다르게 병아리의 솜털처럼 샛노란 색이었다.
[어때!]
[…병아리 같다.]
시오한이 솔직한 감상을 내놓았다.
[같아. 그리고 병아리면 안 되지!]
착실하게 시오한의 말투를 고쳐주면서도 아이가 발끈했다. 아이가 심각하게 미간을 모았다. 끙, 하고 잠깐 힘을 주자 다시 그리 길지 않은 머리칼이 차르륵 흔들렸다. 그러나 차라리 병아리가 나았다. 진한 금빛으로 물든 머리칼이 정말로 번쩍번쩍 혼자 빛이 나는 것이다. 머리칼이 아니라, 머리에 휘황찬란한 뚜껑이라도 뒤집어씌운 것 같은 모양새였다. 마치 빛나는 딱정벌레 같기도, 눈코입이 달린 전등 같기도 했다.
[됐어?]
[……]
시오한이 입술을 꽉 물었다. 아이를 만나고 난생처음인 일을 몇 번이나 겪었지만 이건 위기감이 들었다. 그는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아이의 눈은 기대감으로 번쩍이고 있었고, 그 기대감을 절대로 박살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시오한은 정말 더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처음으로 제 몸에 관해서도 불가항력인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시오한이 베개에 얼굴을 푹 쳐 박았다. 아이가 그런 시오한의 어깨를 흔들더니 와락, 그의 뺨을 잡고 들어 올려버렸다. 시오한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시오한, 어떻냐니까? 완전 이상해? 안 어울려?]
정면으로 보니 한층 더 번쩍거리고, 한층 더 괴이하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아주 신기한 몰골이었다. 입술을 거의 뜯어낼 기세로 한껏 물고 있던 것도 다 소용없었다. 풋, 하고 한 번 빠져나간 바람에 꾹 눌러 참고 있던 둑이 와르르 터져버렸다. 시오한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배까지 잡고 웃어대는 시오한을 보며 아이가 헐, 재빨리 허공에 수경을 만들어냈다. 둘만 있는 침실에 박장대소가 울려 퍼졌다. 사실 아이는 잠깐 발끈한 참이었다. 그러나 제 몰골을 보자마자 아이도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와씨, 나 무슨 레고 같아!]
끄학-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아이는 웃어대더니 점차 웃음이 잦아드는 시오한에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거 봐라!]
찬란한 뚜껑 같은 머리칼이 정말로 깜빡깜빡 빛을 내기 시작했다. 시오한은 이제 거의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 아이는 신나게 침대를 굴러다니며 한참 웃은 뒤에야 빨갛게 된 얼굴로 머리를 헤집었다. 번쩍거리는 빛이 뚝 꺼지고 다시 검은색 머리칼이 결 좋게 흔들렸다.
[아 어렵네, 색 맞추기.]
[그대는 검은색이 가장 잘 어울린다.]
[어울려.]
여전히 목소리에 웃음기를 담은 채로, 어느새 편안하게 엎드린 시오한이 빙그레 웃었다.
[응. 그대는 검은색이 가장 잘 어울려.]
[난 잘생겨서 뭐든 잘 어울려.]
아이가 으스댔다. 시오한이 잔웃음을 흘렸다. 그때 똑똑, 밖에서 노크를 하며 식사가 왔음을 알렸다. 시오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아이의 머리 위로 이불을 뒤집어씌우며 일어섰다. 오오, 아이가 기대에 찬 눈을 반짝이며 이불 속에서 답삭 몸을 낮췄다. 시오한이 또 슬쩍 웃었다.
[들라.]
궁인 서넛이 트레이를 끌고 들어왔다. 시오한에게 깊이 고개를 숙인 그들은 접시 부딪치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아주 빠르게 테이블 위로 상을 차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기다렸다. 태자는 아주 묘한 식사를 명령했는데, 양을 줄여 거의 모든 요리를 조금씩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이건 거의 1인 만찬에 가까웠고, 만찬은 반드시 식사 시중이 붙었다. 그러나 시오한이 말했다.
[물러가라.]
[예, 전하.]
지체 없이 대답한 궁인들이 침실을 나갔다. 시오한은 죽은 듯 미동도 없는 이불 더미를 바라보다가 슬며시 웃음 지으며 손가락으로 끝자락을 끌어내렸다. 검은색 머리칼이 삐죽, 먼저 모습을 드러내더니 아이의 얼굴이 나타났다. 아주 뿌듯한 얼굴로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