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술래에게 너무도 유리한 게임이었다. 이게 어떻게 해서 즐거울 수 있는지도 그는 알 수 없었다. 제가 그저 모른다고 하니 아이가 절 봐주기 위해 이런 게임을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시오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따라 오케이, 한 그가 나무를 짚고 돌아섰다. 아이가 재빨리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소원?]
[어, 아무거나. 에이, 이러면 내가 좀 불리하긴 한데, 봐줄게.]
[어째서 불리하지? 공평하게 해라.]
[어떻게 공평하게 하냐? 난 진짜 다 들어줄 수 있는데.]
[나도 다 들어줄 수 있다.]
시오한이 힘주어 말했다. 아무렴, 이리스티리움의 황태자가 들어주지 못할 아이의 소원이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아이가 씩 웃었다.
[아닐걸.]
[내기해.]
[해, 해. 지는 사람 소원 진짜 아무거나 다 들어주기. 못 들어주면….]
못 들어주면… 시오한은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아이에게도, 시오한에게도 그런 일은 아예 가정에 없었으므로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아이가 무릎을 걷으며 대충 손을 휘저었다.
[아,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해.]
시오한이 나무를 향해 돌아섰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낭랑하고 단정한 목소리가 재빠르게 숲에 울려 퍼졌다. 단 한 글자도 놓치지 않은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아주 재빠르게 말한 시오한이 홱 돌아보았다. 달려오던 자세 그대로 아이가 굳어 있었다. 시오한이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아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신기하게도, 정말 머리카락 한 올 흔들리지 않았다. 시오한도 움직이지 않았다. 대치가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자 자신만만하던 아이의 얼굴이 움직임 없이 묘하게 변한다 싶더니, 마침내 버럭 외쳤다.
[야!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어떡하냐?!]
[그대 움직였어.]
[아니 다시 노래해야지!]
[움직일 때까지 보고 있어야 한다고 했잖은가.]
[이씨, 그렇다고 계속 보고 있냐? 그건 반칙이지!]
[그대가 설명해 준 규칙대로 했을 뿐이다.]
[환장하겠네?]
아이가 이마를 짚었다.
[이건 연습게임 해, 연습게임. 다시 해. 10초, 아니 5초 이상 보고 있지 않기.]
[5초는 너무 짧다. 5초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은 없어.]
[아닌데, 내가 잘하는 거지! 원래 5초 힘들거든? 너 해 봐.]
그러나 시오한은 굳이 내기도 필요 없었다. 그는 원래 놔두면 그렇게 가만히 있는 사람이었다. 5초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긴 머리가 바람에 팔랑였다.
[머리카락, 머리카락 움직였잖아! 5초도 어렵다니까?]
[머리카락은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고 말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난 안 움직였잖아.]
시오한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는 아주 확신에 차서 말했는데, 사실 제 머리카락 한 올 정도 움찔해 봤자 모르는 게 정상이다.
[반칙은 그대가 했구나.]
[아닌데?]
[애석하게도 나는 머리카락을 움직이는 재주 같은 건 없다. 그러면 처음부터 이 게임은 그대가 이기기 위해-]
[아 진짜 아냐! 10초 해, 그럼!]
발끈한 도하가 외쳤다. 시오한이 넙죽 받아먹었다.
[좋아, 10초.]
돌아선 시오한이 슬그머니 웃었다. 그는 쉴 새 없이 이어진 생소한 상황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워 다소 바보처럼 멀거니 있었지만, 협상은 원래 도하보다 시오한에게 훨씬 더 능숙한 분야였다.
[이번엔 진짜야. 연습 게임 끝이야.]
[물론이지.]
답한 시오한이 나무에 손을 얹었다. 물기가 어려 묘하게 부드러우면서도 울퉁불퉁하게 거친 나무껍질에 고운 손을 얹고, 그 위에 도하가 했던 것처럼 제 이마를 얹었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그새 익숙해진 노래에 담겼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시오한이 돌아보았다. 입술에 맴돌던 웃음이 사라졌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라진 표정에서 묻어나지 않는 당황이 주춤거리는 발걸음에 나타났다.
아무것도 없었다.
가지가 별로 없어 우산처럼 드리워진 나무는 높고, 부드러운 흙이 깔린 바닥에 야생화 한 두 개가 피어있고, 그 위로 푸른 햇볕이 내리쬐는데 그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부터 시오한 혼자 있었던 것처럼.
[……]
시오한이 입술을 달싹였다. 몇 번을 그렇게 달싹거리다, 결국 부르지 못했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 꿈이었나? 실은 제가 환상 같은 걸 보고 있었나? 굳은 듯 서 있던 그가 바닥에 그어진 선을 발견했다. 그 애가 그어놓은 선이었다. 어디선가 떨어진 작은 나뭇잎 하나가 팔랑, 그 옆으로 가볍게 안착했다.
[전하!]
물끄러미 그 선을 바라보는 시오한이 옆으로 누군가 기척 없이 슥 나타났다. 시오한은 놀라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대도 보았나?]
[전하, 어찌…,]
[함구해라.]
시오한이 말했다. 차가운 눈동자가 고개 숙인 남자에게로 닿았다.
[그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거야.]
[…명 받듭니다.]
시오한이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말짱하게 맑기만 했다.
***
그 이후로 시오한은 시시때때로 일이 있어도, 없어도 부러 그 화원 주변을 서성거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날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흘러갔고, 어느 순간부터는 시오한도 점점 화원을 찾아가지 않게 되었다. 애초에 그렇게 화원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여유롭지도 않았다. 황제는 고작 8살 된 태자에게 얼른 국정을 넘겨주기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굴었으므로 그는 부쩍 바빴다.
그러나 화원에 찾아가지 않더라도 그는 이따금 잠시 생각을 놓고 멍하니 있게 되었다. 뭘 생각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생각하고 싶은 것처럼 넋을 놓고는 했다. 원래도 웃음이 잦지는 않았지만 유독 말이 없어진 태자를 두고 궁에서 두런두런 말이 나올 즈음이었다.
[태자. 요즘 많이 고됩니까?]
황후가 물었다. 짙푸른 머리칼을 우아하게 늘어뜨린 그녀는 마치 잘 벼려진 칼날 같았다.
[아닙니다, 모후.]
[괜찮다고는 안 하는군요.]
시오한이 슥, 제 어머니를 보았다. 그녀는 어린 제 아들을 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태자가 아직 어리기는 하지요. 귀족가라고 해도 8살이면 좀 더 마음 놓고 뛰어 놀 나이이니. 그대도 그러고 싶습니까?]
[동생을 낳아주시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시오한의 대답에 황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꿈도 크십니다. 적자가 또 있다 한들 어디 그대만 하려고요.]
[마음에도 없는 질문을 하시니.]
시오한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웃음기를 머금은 황후의 손이 다가왔다. 아들의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 것 같았으나, 조금 삐뚤어진 그의 찻잔을 바로 해줄 뿐이었다.
[태자가 이리 현명하니 폐하께서 그리 기대를 거시는 거지요. 얼른 도망가시려고.]
[…부황이 미우십니까?]
황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다듬어진 눈썹은 찌그러지는 와중에, 눈은 웃는 것 같다. 묘한 얼굴이었다.
[동정하지요. 가여워하고. 그리 나약하니 황가가 아니라 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겠습니까?]
황후는 언제 그런 표정을 했냐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매끄럽게 웃었다.
[부황의 선택이 어찌 끝나는지 잘 지켜보세요, 태자. 그게 군주의 삶이며….]
냉정하고 화사한 눈꼬리가 다정하게 휘어졌다.
[곧 그대의 삶이니.]
원한다면 수업을 좀 줄이고 배동을 들여도 좋다고 황후는 말했지만, 시오한은 딱히 그런 걸 바란 것은 아니었다. 없는 말을 지어서 한 것도 아니고 그는 정말로 고되지 않았다. 놀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답답하다고 느낀 적도 없었다. 그냥 아주 종종, 생각나지 않는 무언가로 기분이 가라앉을 뿐이었다.
책을 뽑으려던 시오한이 멈칫했다. 그는 책을 손에 들고 책장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보았다. 눈높이가 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키나 컸나? 원래 발을 조금 들어야 하는 높이였는데 좀 더 수월하게 손이 닿는 것 같다. 시오한은 제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가, 그냥 다시 내렸다. 그가 감흥 없이 책을 들고 테이블에 앉았다. 제 모후도 그렇고, 대대로 황가는 모두 키가 크니 저도 아마 키가 많이 클 것이다. 새로울 것도 없었다. 그가 책을 편 순간이었다.
[시오한!]
무언가 그의 어깨를 탁 쳤다. 시오한은 전에 없이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어찌나 놀랐는지 머리끝이 주뼛 곤두설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몸은 착실하게 반응했다. 제 어깨에 놓인 손을 잡고 끌어내며 팔꿈치로 관절을 꺾어낸다. 으악! 비명소리가 났다. 그대로 후려치려던 시오한이 흠칫 멈추었다. 황금색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너…!]
[초크 슬램!]
아이가 와락 시오한을 덮쳤다. 어디서 들어본 기술 이름이라고 지껄였을 뿐, 그냥 막무가내로 껴안기였다. 시오한은 얼결에 그 팔을 잡고 홱 몸을 돌렸다. 붕, 돌아간 아이가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우당탕, 굴러간 아이를 보고 시오한이 더 놀라고 말았다. 심장이 덜컥 떨어진 정도였는데 아이가 발딱 일어났다.
[와씨, 너 쩐다.]
엄지손가락을 척 든다.
[인정.]
[…머리를 다친 건 아니겠지.]
[내 머리는 그렇게 쉽게 흠이 나지 않아.]
뿌듯하게 말한 아이가 옷을 탈탈 털고 일어났다. 시오한은 입을 꾹 다물고 그를 보았다. 믿겨지지 않았다.
[뭐야, 여기 도서관이야? 너 책 읽어?]
[…공부하는 거다.]
[웩, 웬 공부? 보자.]
아이가 냉큼 시오한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음, 뭔가 아는 것 같은 얼굴로 책을 들여다본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하나도 모르겠어. 이건 뭔 글씨야.]
[글을 읽지 못 하나?]
[아니 이걸 못 읽겠다고, 한국어야 대박 잘 읽지. 나 국어 100점이야, 왜 이래.]
시오한은 아이가 글을 모른다 하면 직접 그에게 글을 가르쳐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이는 금세 흥미를 잃은 듯 했다. 앉은 지 일분도 안 돼서 의자를 털고 일어난 아이가 그에게 씩 웃어보였다.
[나 보고 싶었지?]
[…응.]
시오한이 대답했다. 아이가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