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이도하, 이도하라고!]
이도하. 시오한이 속으로 되뇌었다.
[넌 저기 다 알아?]
도하가 물었다.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시오한이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도하는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성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모른다.]
시오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아직 궁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진짜? 난 우리 동네 완전 다 아는데.]
도하가 좀 실망한 기색으로 입을 삐죽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자신만만한 얼굴로 허리춤에 손을 척 올린다.
[뭐 됐어. 탐험은 또 내가 전문이니까. 넌 나만 따라오면 돼.]
그리고는 시오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시오한은 잠시 제게 내밀어진 그 조그만 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누구도 그에게 이런 식으로 손을 내민 적이 없어 무척이나 낯설었다.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아이는 그것도 못 참겠다는 듯 에잇, 하고 그의 손을 먼저 낚아챘다. 홱, 하고 딸려간 시오한이 깎아지른 성벽 밑으로 떨어질 것 같다고 느낀 그 순간 그들은 다시 꽃과 덤불 사이에 서 있었다.
[아, 내 신발!]
으악! 도하가 소리를 질렀다.
[내 신발 없어졌어! 망했다. 집에 가서 가져오지도 못하는데!]
그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시오한이 텅 빈 제 손을 잠깐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과연, 아이가 홱홱 날려 아무렇게나 대충 널브러져 있던 신발 두 짝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벗겨버린 시오한의 신발만 비슷하게 처량한 모양으로 뒹굴고 있다.
[왜?]
[왜긴 왜야, 쫓겨났으니까 그렇지. 내가 진짜 집에 가나 봐라.]
신발을 도대체 어떻게 대체해야 할지 심각한 고민에 빠진 아이가 대충 중얼거렸다. 그런 아이와 굉장히 낯설어 보이는 제 신발을 번갈아 본 시오한이 입술을 떼려는 찰나였다. 아이가 경쾌하게 말했다.
[아 됐어, 신발 없으면 안 신으면 되지!]
[……]
시오한은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결론이었다. 쉴 새 없이 그를 덮치는 생소한 충격에 시오한이 결국 잠시 넋이 나간 사이, 아이가 시오한의 신발을 잽싸게 낚아 올려 그의 발에 덥석덥석 신겼다. 시오한은 분 단위로 급변하는 아이의 속도에 좀처럼 적응할 수가 없었다. 시오한이 그를 신기하게 쳐다보는데, 벌떡 일어난 아이가 말했다.
[자, 네가 날 업어줘!]
[…?]
시오한이 눈을 깜빡였다. 아이는 아주 당당했다. 나는 신발이 없고 너는 신발이 있으니 그 신발에 나도 얹어라, 하는 식이었다. 그가 단순에 시오한의 뒤로 돌아가더니 어깨를 잡았다.
[힘 줘, 나 업힌다?]
그리고는 정말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시오한의 등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시오한이 반사적으로 얼른 손을 돌려 그를 붙잡았다. 그러나 참 당연한 일이지만, 고귀한 황태자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업어본 적이 없어 그 손짓이 몹시도 어색하고 서툴렀다.
[너 뭐해? 다리 잡아줘야지. 여기, 여기.]
매미처럼 시오한의 목을 꽉 잡고 등에 찰싹 잘 달라붙은 아이가 태연하게 시오한을 지도했다. 마침내 제대로 된 각도로 무릎 아래로 팔이 들어와 받치자 아주 편안하게 힘을 푼다. 그러나 그건 아이만 편했지, 시오한은 그대로 딱 굳어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오한은 태어나서 이런 자세는 난생처음 겪어 보았고, 지금은 그의 인생에서 감히 가장 불안하고 위태로운 순간으로 손꼽히는 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뭐 해, 안 가?]
시오한은 혼자 불안하고 위태롭고 난리가 났는데 저 혼자 해맑은 아이는 심지어 다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시오한이 몸에 아주 단단히 힘을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질 것 같았다. 제가 넘어지는 건 그렇다 쳐도, 아이마저 떨어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아주 크게 다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냥 이대로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큰일이 날 것 같았다. 평소에 그가 알던 무게중심이 완전히 다 달라져 이대로 어떻게 한 발을 내디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태어나 처음 걸음마를 한 신생아가 된 기분이었다.
[가자니까?]
[움직이지 마라.]
재촉에 못 이긴 시오한이 결국 걸음을 떼었다. 아주 신중하고 느릿느릿했다. 한 발 한 발 신경을 써서 그는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좀 익숙해지는 것 같고 방법을 알 것 같았다. 시오한의 입가에 얼핏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인내심이라고는 없는 아이는 그만 참을성이 다 하고 말았다. 그가 펄쩍 시오한의 등 뒤에서 뛰어내렸다.
[에잇, 진짜. 너 달팽이야?]
아이가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 어정쩡하게 굳어진 시오한의 손을 낚아챘다. 꼭 잡고, 걸음을 박찼다. 아이는 그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속절없이 끌려간 시오한의 눈이 커졌다.
흙이 튀어 오르고, 높은 덤불의 가지며 이파리가 얼굴을 때리듯 스쳐 지나간다. 그 별것 아닌 뜀박질에 얼굴로 바람이 달려든다. 저 높은 옥상 위에 서 있던 것처럼 단정했던 머리칼이 사방으로 휘날렸다.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치렁치렁한 옷자락이 이리저리 휘감겨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면 그의 손을 잡은 아이도 같이 휘청거렸는데, 그럴 때마다 아이가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 순간, 시오한도 웃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달리는 것뿐인데, 이 별것 아닌 것으로 마음이 벅차오르게 즐거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낭창한 웃음소리가 한데 섞였다. 꽃이 흐드러지게 핀 덤불이 사라지고 키가 큰 나무들이 하늘을 떠받친 기둥처럼 줄 지어 우거진 숲까지 둘은 정신없이 뛰었다. 꽃잎처럼 가늘고 얇은 나뭇잎 사이로 햇볕이 푸르게 내리쬐고 있었다.
[이겼다!]
아이가 번쩍 손을 들더니 외쳤다. 헐떡이며 이마의 땀을 훔치던 시오한은 정말 영문을 몰랐다.
[이 나무까지 누가 더 빨리 오나 한 거야.]
시오한이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의기양양한 아이를 보았다.
[언제 그런 내기를 했지?]
[오면서.]
[난 듣지 못하였다.]
[다시 하자고? 알았어, 알았어.]
시오한은 그저 당연한 부당함을 제시했을 뿐인데, 아이가 크게 성심이라도 쓰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바닥에 양말뿐인 발끝으로 슥 선을 긋는다. 시오한은 저도 모르게 아주 당연한 듯 그 선 뒤에 섰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말했다.
[아니야, 시오한. 다른 거 하자. 이건 내가 하자고 한 거니까 이번엔 공평하게 네가 하고 싶은 거 해.]
[…내가 하고 싶은 거?]
[어, 뭐든 받아줌.]
[……]
그러나 이 한 마디에 시오한의 사고는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다. 이 난데없는 내기는 목적도 없었고, 이유도 없었다. 이런 것은 해본 적이 없어서 뭘 해야 하는지 그는 전혀 몰랐다. 하고 싶은 거라고 했지만 떠오르는 게 정말로 하나도 없었다. 머리가 텅 비어버리는 것 같았고, 시오한은 진중한 얼굴로 눈만 깜빡이게 되었다.
푸르게 스며드는 햇빛, 파릇파릇한 숲의 청량한 냄새, 그곳에 우두커니 선 시오한은 정말 그려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분명 그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난감함 속에 멍을 때리고 있었지만 황금빛 속눈썹이 차르르 내리깔린 모습은 알 수 없는 슬픔에 빠진 숲의 정령, 뭐 그런 것 같았다. 성질 급한 아이는 넋 놓고 그 모습을 바라보느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모르겠어.]
마침내 시오한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을 때, 아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엥?]
[모르겠다.]
[뭘 몰라?]
[뭘 해야 하는지.]
[아니 하고 싶은 게 없어?]
[모르겠어.]
[뭐래는 거야.]
대화가 헛손질처럼 빗나갔다. 시오한은 정말 모르겠어서 그렇게 답한 것인데, 아이는 하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는 말이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것 같았다.
[게임 같은 거 아는 거 없어?]
아이가 물었다. 그는 아무래도 제가 알던 것 말고 이 새로운 세상의 색다른 무언가를 체험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나 시오한이 아는 게임이란 활쏘기나 승마, 그런 것들이었는데, 지금 그런 걸 말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가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어휴, 너 진짜 놀 줄 모른다. 놀 줄 모르는 애는 재미없는데.]
또 우두커니 선 시오한을 보며 아이가 탄식했다.
[형이 가르쳐줘야겠네. 어디 보자… 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알아?]
시오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 순한 움직임에 아이가 다시 혀를 찼다.
[완전 애기네, 애기. 이리 와 봐. 네가 먼저 술래 해. 자, 네가 여기 이렇게 짚고 서 있어. 떼면 안 된다, 그럼 지는 거야. 내가 저기서부터 올 테니까, 아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해 봐.]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아 여기 이 나무 보고! 그 노래 부르는 동안에는 뒤돌아보면 안 돼. 여기 딱, 어, 이렇게. 그동안에 내가 저기서부터 조금씩 오는 거야. 노래 끝나면 딱 뒤돌아보고, 그럼 난 딱 멈추는 거지. 여기서 노래 끝나고 돌아보는 동안에는 움직이면 안 되는 거야. 진짜 요만큼도 움직이면 안 됨. 머리카락도 움직이면 안 되고 코도 움직이면 안 돼. 진짜 완전 움직이면 안 돼.]
[눈동자도?]
[당연하지!]
아이가 엄한 얼굴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움직이면 지는 거야. 내가 저기서 안 움직이면 네가 다시 이 나무 보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는 거고, 난 그동안에 막 너한테 오는 거지. 다 와가지고 내가 너를 탁 치고 얼른 저 선까지 다시 도망가야 돼. 내가 저기 갈 때까지 네가 날 못 잡으면 지는 거야. 오케이?]
아이가 뿌듯한 얼굴로 허술한 설명을 마쳤다. 물론 시오한은 이 허점투성이 게임이 도무지 이해가지 않았다. 움직이는 걸 잡아내면 되는 거라면 움직일 때까지 보고 있으면 되지, 다시 고개를 돌려서 노래를 부를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머리카락도 움직이면 안 된다니, 머리카락은 사람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신체 부위가 아니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