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시오한?]
[시오한.]
시오한이 다시 말했다. 제 이름이었으나, 혀끝이 굴러가는 느낌이 몹시도 생소했다. 그런데 잠시 고개를 갸웃한 아이가 갑자기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오한이? 너 이름이 오한이야? 이름 진짜 웃기다! 오들오들!]
시오한은 배까지 잡고 웃어대는 아이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아이의 웃음은 조금도 웃지 않고 그저 절 쳐다보기만 하는 시오한의 시선에 조금씩 잦아들었다. 쩝, 입을 다시며 아이가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얘 좀 이상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시오한이 차분히 말했다.
[시오한 오르페노스. 그게 내 이름이다. 부르자면 시오한이라고 불러야 맞겠지.]
아, 그래? 웃어대더니 아이는 금세 수긍했다.
[그럼 오르페노스가 성이겠네?]
[옳다.]
[아하. 여긴 미국 같은 스타일이구나.]
아이가 의기양양해져서 손바닥을 짝 쳤다. 일단 시오한의 위에서 비킬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난 이가 성이고 이름이 도하니까 도하라고 불러. 이도하, 하면 혼나는 것 같단 말이야.]
[도하?]
시오한이 생소하게 되뇌었다. 아이가 부르는 법을 가르치듯 다시 말했다.
[도하야.]
[도하야.]
[응, 시오한.]
도하가 대답하며 씩 웃었다.
[너 몇 살이야?]
[……]
[아, 몇 살이냐니까?]
[8살.]
시오한이 낯설게 대답했다.
[올, 나도 8살이야!]
[그대가?]
[응. 왜, 좀 더 커 보여?]
도하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너무 어려 보인다.]
거짓말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시오한은 솔직히 대답했다. 그가 아는 8살은 누구도 저렇지 않았다. 저렇게 푸하하 소리를 내며 경박스럽게 웃지도 않았고, 뭐든 다 신기하다는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았고, 하여간 저렇지는 않았다. 저렇지는 않았고… 다 저 같았다.
나직하게 목소리를 조절해서 말하고, 단어와 말투에 신경을 썼으며 걸음걸이를 조심히 하고 시선을 조금 낮췄다. 시오한은 정말로 이런 8살은 본 적이 없었다. 이건 5살이나 하는 행동 아닌가? 그래서 그렇게 말한 것인데, 도하가 발끈했다.
[야, 나 뒤에서 4번째 쯤 되거든? 작다는 소린 진짜 처음 들어보네, 와.]
[작다고는 하지 않았는데.]
[그게 그거지! 일어나 봐, 나랑 키 재보자.]
도하가 날래게 벌떡 일어나더니 대뜸 시오한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옷깃 아래 깔려 있던 꽃잎과 풀들이 나폴, 따라 날아올랐다. 시오한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이는 그것도 모자라 시오한을 홱 돌려세웠다. 그러더니 제 앞에 딱 붙는다. 황제인 아버지는 물론이고 황후인 어머니와도 이 정도로 가까워 본 적이 없는 시오한이 흠칫 놀라 얼어붙었다.
[너도 비슷하네!]
너도… 여태 빠져본 적 없는 혼란에 빠져 있으면서도 시오한은 한껏 눈동자를 든 도하의 시선을 따라 눈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을 들었잖나.]
[안 들었어!]
[뒤꿈치를 내려라.]
[에이 씨, 안 들었다니까. 이거 신발이야!]
[신발은 나도 신었다.]
[아, 알았어. 벗어, 벗어. 공평하게 벗자.]
[신발을 벗으라고?]
여기서? 시오한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여긴 밖이고,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풀밭이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충격에 빠져있는 잠깐 사이에 아이는 이미 제 신발 두 짝을 홱홱 벗어던진 뒤였다. 그가 시오한의 신발까지 훌렁 벗겨냈다.
시오한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키를 재는 게 이렇게까지 열을 낼 일인가?
[자, 다시 봐봐. 똑같지?]
시오한의 머리에서부터 제 머리로 슥 쓸어내린다.
[그리 재면 뭐든 같다.]
결국 직접 도하의 손을 잡은 그가 제 머리부터 아이의 머리 위로 손을 아주 곧게 뻗었다. 거의 한 뼘이나 차이가 났다. 아이는 몹시 뚱한 얼굴로 그 손을 바라보더니 쳇, 하고 고개를 돌렸다.
[아, 됐어. 그래 네가 더 커. 잘났다, 좋겠다, 어휴 부럽다!]
[……]
대관절 또 이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제가 재자고 그렇게 난리를 피우더니 이건 꼭 시오한이 재자고 악다구니를 써 기어이 절 이겨먹은 것처럼 군다. 난생처음 덤터기를 쓰고 만 시오한은 대응해야 할 방법을 몰라 멀뚱히 아이를 보기만 했다. 아주 신기한 생물을 쳐다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근데 대박이다, 여기… 무슨 궁전 같은 거야? 엄청 크네. 엄청 예쁘고.]
그렇게 집착하더니 금세 키 재는 것에 흥미를 잃어버린 아이는 이제 고개를 꺾어 하늘을 깎아지른 절벽 같이 우뚝 선 에트레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스티리움의 황궁, 에트레제다.]
[이리스티리움? 오, 진짜? 여기가?]
[아는가?]
[알지, 내가 바보냐?]
아이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시오한은 또 할 말이 없어졌다. 에트레제는 아는데 저를 모른다는 건, 개는 아는데 강아지는 모른다는 것과 같았다. 어찌어찌 우연히 궁에 들어오게 된 아이여서 황족들의 얼굴을 모른다고 해도 시오한의 눈동자를 보면 당장에 알게 되어 있다. 황금색 눈동자는 이리스티리움 황가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절 왜 모르냐, 하고 묻는 대신에 시오한은 아이처럼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란히 선 두 아이의 까맣고 금빛인 조그만 머리통 위로 햇빛이 쨍하게 비추었다.
[전하-]
[엑.]
멀리서 들린 목소리에 아이가 납죽 고개를 숙였다. 머리 들어간 거북이처럼 아주 순식간이었다. 문제는, 시오한의 머리까지 잡고 내리눌렀다는 사실이었다.
[지금….]
[쉿!]
입술 가운데에 손가락을 세운 아이가 격렬한 바람 소리를 냈다. 전하, 하고 몇 번 불러보던 시종은 그대로 돌아갔다. 황태자가 그곳에 있으면서도 일부러 숨는다는 것은 하늘이 뒤집어져도 일어날 리 없는 일이니 그리 쉽게 돌아선 것인데, 바로 그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자의도 아니고, 타의로 인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시오한이 절 보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인기척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아이가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왜 숨는 거지?]
[들키면 안 되니까 그렇지!]
그것도 모르냐는 얼굴로 아이가 대꾸했다.
[어찌하여 들키면 안 되는데?]
[그야….]
이 당연한 의문을 생각하지 못한 듯 아이는 잠시 머리를 굴렸다.
[아, 그냥 그런 게 있어. 느낌이 그래.]
[허면 나는 왜?]
이것도 매우 당연한 질문이었는데, 아이는 뭘 또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귀찮은 얼굴을 하더니 한 번 더 주위를 슥 살펴보고는 무릎을 탁탁 털고 일어났다.
[넌 나랑 같이 있으니까.]
[내가?]
[응. 너 여기, 나 여기. 같이 있잖아. 아냐?]
‘같이’를 정의하는 이 간단하고도 기막힌 논리에 시오한은 또 할 말을 잃었다. 논리라는 건 이치와 사리에 맞고, 앞뒤가 옳게 맞아 떨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상대방이 할 말을 잃게 만들면 그게 논리가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내가 여기 온 건 비밀이야. 너만 알아야 해.]
아이가 짐짓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리 행동했으니 그건 알겠는데, 그래서 도대체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보편적으로야 신분도 알 수 없는 아이가 이렇게 궁에 들어와 있으면 ‘큰일났다’ 정도로 끝나지 않을 대단한 큰일이니 그렇겠지만, 아이는 보편적이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았다. 절대로 그런 이유는 아닐 거라고 시오한은 확신할 수 있었다.
[왜지?]
왜? 어째서? 시오한은 그렇게 묻는 저가 조금 바보같이 느껴졌다. 그는 대체로 뭐든 다 알고 있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 것 같다.
[너 되게 궁금한 거 많다. 있잖아, 세상에는 그냥 그런 것도 있는 거야.]
아이가 턱을 들고 퍽 너그러운 얼굴로 설명했다. 앳된 얼굴에 어른스러운 척하는 얼굴이 몹시도 어울리지 않았다. 조금 웃기기까지 하다. 시오한이 웃음을 참았다. 그는 지금 좀 바보가 된 것 같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정도로 정말 바보가 된 건 아니었다.
[장담하는데 백 퍼 겁나 혼난다.]
고개를 꺾어 에트레제를 구경하며 아이가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말했다.
[시오한, 이리 와 봐. 나 저기서 한 번 볼래.]
[어디-]
어디를? 이라고 물으려던 시오한을 말을 다 맺지 못했다. 아이가 시오한의 손을 답삭 잡았고, 눈을 한 번 깜빡인 순간 주변이 완전히 변한 것이다. 꽃 냄새도, 물기 어린 파릇파릇한 풀 냄새도, 흙냄새도 다 사라지고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에트레제의 가장 높은 옥상 위에 그들은 서 있었다. 황금색 머리칼이 세차게 휘날려 눈앞을 가렸다가, 또 홱 날리며 완전히 시야가 드러났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 얼어붙은 듯 굳어 있던 시오한이 눈을 크게 떴다. 성도의 전경이 온 시야 가득히 펼쳐져 있었다.
[와, 대박이다 여기!]
[……]
신이 난 목소리가 웃음기를 담고 소리쳤다. 눈을 크게 뜬 시오한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가 시선을 내렸다. 방금 전까지 그들이 있었을 화원이 풀 한 포기처럼 아주 자그마하게 보였다. 다시, 시오한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옆을 보았다. 검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휘날린다. 앳된 뺨이 어느새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방방 뛸 것처럼 들뜬 얼굴로 아이가 눈을 반짝이다 홱, 그를 돌아보았다.
[진짜 완전히 다르네!]
그래, 다르다. 시오한이 깨달았다. 이 아이가 계약자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고, 어떻게 해서 이곳에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 세상으로부터 온 존재는 아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부터 왔다. 하지만 어떻게….
[…그대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엉?]
[그대 이름.]
[뭐야, 벌써 까먹었어?]
새까만 머리가 까치집처럼 엉망이 되어 마구 흩날린다. 새까만 눈동자가 시오한을 보며 유쾌하게 웃었다.
[이도하, 이도하라고!]